숫자 1이 단톡방에서 사라지지 않아

- 영정 사진이 아름다워서 맘이 아렸다

byCha향기

정확하게 보름 전이었다. 그날은 사모님이 모임 자리에 나오시지 않았다. 그런 건 처음이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기에 지나가는 말로 들었다. 한 달 전에 만났을 때도 여전하셨지 않았던가?


사모님은 5년 전에 대장암 진단을 받았지만, 완치됐다. 그런데 다른 암이 발견되더니 항암 치료하며 3~4년 고생하셨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 삭발하셨다. 그 이후부터는 항상 모자를 쓰고 나오셨다. 주위에서 암이 완쾌되어 몇십 년 거뜬히 지내는 사람을 심심찮게 봤다. 그래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초기 암이라 고생을 좀 하시다가 괜찮아질 줄 알았다. 일상생활 하는데 큰 지장은 없어 보였다. 만날 때마다 우리는 앞담화, 뒷담화 하며 깔깔거렸다.


우리 두 가정이 ‘한지붕’이라는 이름으로 만난 지 어언 30년이 됐다.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둔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어서 우리는 서로에게 대나무숲이었다. 멀리 사는 혈육보다 가깝게 지냈다. 함께 떠난 1박 2일 투어도 잊을 수 없을뿐더러 쌓아둔 추억이 가득하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할 만큼 지나오며 각자의 얼굴에 늘어가는 주름을 보는 것도 익숙해졌다.


사모님은 타인을 잘 이해했으며 마음이 따뜻했다. 우리 아들이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하여 14년간 중증 환자로 누워있으니 우리 집 먹거리를 신경 써주셨다. 미역국은 국물 없이 자박하게 끓여 조금씩 소분하여 주셨다. 먹을 때 물을 두르고 끓여 먹으면 되게 말이다. 우리 남편이 좋아하는 파래무침은 잊지 않고 챙겨주셨다. 콩자반, 멸치볶음, 양념불고기 등 갖추갖추 챙겨주셨다.

“힘들더라도 식사 잘 챙겨 먹고 기운 잃지 말아요. 항상 기도하고 있어.”

사모님은 만날 때마다 우리 부부를 안아 주셨다. 우리가 당한 환란에 어느 누구보다도 맘 아파하셨다.


언젠가부터 사모님 손발은 항암 후유증으로 허물이 벗겨지고 벌겋게 됐다. 그 와중에도 크로스백과 토트백을 뜨개질로 만들어주셨다. 그것을 쉽게 받을 수가 없었다. 슬픔 가득한 사람이 또 다른 슬픔을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받기만 하고 드릴 게 없는 것도 고역이었다. 지난번 구정에는 세뱃돈이라며 사모님께 봉투를 건네 드렸다.

“저는 사모님께 뭘 챙겨드릴 게 없네요. 이거 약소하지만, 저희 맘이니 받아 주세요.”

그리고 만날 때마다 밥값은 우리가 내기로 아예 못 박았다.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도리라 여겼다. 사모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틈틈이 사모님을 만나 재미있는 얘기를 나눌까? 소소한 여행을 다닐까? 아니면 사모님이 드실 만한 웰빙 요리를 해볼까? 궁리만 하며 무심히 세월이 흘렀다. 날이 갈수록 사모님의 박꽃 같았던 웃음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우리 아들 사고로 한지붕 모임이 흐지부지해진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2년 전에 내가 정년으로 퇴임하면서 매달 마지막 화요일마다 인천대공원에서 만났다. 그분들이 미리 텐트를 치고 야외 카페를 준비해 두곤 하셨다.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그늘에, 산새가 날아 앉곤 했다. 그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지친 삶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게 하는 피로회복제였다. 헤어질 때는 잊지 않고 밑반찬을 건네주셨다. 그런 찐 사랑은 친자매나 엄마만이 할 수 있다. 하루 이틀에 그걸 다 준비할 수 없다. 어쩌면 한 달 내내 지지고 볶으셨을 것 같다. 사모님의 땀이 내게는 쉼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 주 월요일 아침, 한지붕 단톡방을 보다가 잠시 얼어붙었다. 보름 전에 만나고 왔던 목사님이 보내온 카톡에, 사모님을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었으며 임종을 기다린다고 하셨다. 우리 부부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호스피스 병동으로 달려갔다. 이미 사모님은 정신을 내려놓고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우린 그렇게 사모님의 마지막 모습을 뵈었다. 그 밤에 사모님은 떠나셨다.


모든 일상을 내려놓고 사모님을 애도하는 일에 집중했다. 우리 세대에서는 일흔한 살은 나이도 아닌 것 같다. 아직 한참을 더 정정하게 살 나이다. 인생은 칠십부터다. 이제 막 제2의 전성기를 누릴 때다. 사모님의 향년은 겨우 71세였다.


장례식장 빈소에 당도하여 영정 앞에 서니 울음이 터졌다. 사모님의 영정 사진이 너무 아름다워 목이 멨다. 사모님 성함 앞에 고(故) 자 붙는 게 생경했다. 받은 사랑은 많고 드린 게 없는 자는 울 일밖에 없었다. 영정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 요즘 누가 장례식장에서 곡하듯 울까? 그러나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슬픔이 목구멍을 뚫고 꺼이꺼이 터져 나왔다.


입관, 발인 예배 등에 동참하려고 먼 길을 매일 오갔다. 승화원에서 사모님은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어처구니없고 하룻밤 꿈같았다. 승화원 길 양편에 있는 수많은 무덤이 아우성쳤다. 삶과 죽음은 지극히 가까이에 있는 것이라고.


비어있는 봉안당의 안치대는 누군가의 죽음을 맞으려고 잔뜩 준비되어 있었다. 마치 입주 분양을 기다리는 아파트 같았다. 사모님을 봉안당에 모셔놓고 털레털레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넋을 잃고 멍하니 서있기도 하고 주춤거리기도 했다.


몇 달 전에 사모님의 휴대폰 케이스가 낡았길래 예쁜 것으로 주문하여 바꿔 드린 적이 있다. 주인 잃은 휴대폰은 이제 쓸모없게 됐다. 게다가 한지붕 단톡방 ‘말 주머니’에 붙어 있는 1이란 숫자가 사라지지 않는다. 단톡방을 손끝으로 스크롤하여 지난 추억을 어루만졌다. 사모님의 단톡방에서 하셨던 말은 이제 두고두고 가슴에 묻어둘 말이 되었다. 사모님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떠나시는 사모님도, 황망히 사모님을 잃은 우리도 한 치 앞을 몰랐다.


삶과 죽음은 바짝 붙어 있었다.


[대문사진: @ Cha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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