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다큐 퓨전극 같은 소설

[리뷰] 이슬아 작가의 <가녀장의 시대>를 읽고

byCha향기

뿌리 깊은 역사의 흐름 속에 박힌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오랜 관습을 통째로 뒤집어엎는 소설이었다. 이슬아 작가를 여태까지 몰랐다. 알고 봤더니 이슬아 작가는 매일 한 편씩 이메일로 독자들에게 글을 보내는 '일간 이슬아'로 자리 잡은 에세이스트였다. 이 바카라은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 <가녀장의 시대> 참신한 아이디어로 완성된 소설

'나'라는 일인칭 시점 대신 본인 슬아를 주인공으로 한 삼인칭 시점으로 쓰인 소설이다. 발칙하고 예의 없는 가녀장인 듯하지만, 주인공은 은근히 가족을 사랑하는 끈끈한 정이 있다. 요즘은 자녀가 가장 노릇을 하기도 한다. 신세대가 구세대를 이끌고 가는 구도가 낯설지 않다. 디지털이나 세상 돌아가는 것에 자신 없어하는 구세대를 신세대가 끌고 가는 추세다.


'부모' 대신 '모부', '가부장'을 '가녀장'으로 바꾸어 사용한다. 가부장(家父長)에서 아비부(父) 대신 계집녀(女)를 넣어 만든 이 말은 그녀가 제작한 신조어다. 젊은 여성이 경제적 주도권과 가족의 통치권을 쥐고 이끌어가는 새로운 가족 형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새로운 말을 바카라 제목으로 세상에 내놓는 작가의 배포가 야심 차다. 이런 발상을 밑바탕으로 하여 쓰인 소설은 픽션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구세대의 버벅대는 모습을 그린 장면에서는 웃음을 뿜지 않을 수 없었다.


글쓰기를 노동으로 삼아 돈을 벌어 가정을 일으켜 세우는 젊은 세대 '슬아'가 출판사를 차리고, 자기 부모, '복희'와 '웅이'를 직원으로 고용하게 되는 부분이 생경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바야흐로 그런 세태로 흘러가는 과도기다. 우리가 익히 들었던 소녀 가장이란 말과 뉘앙스가 다른 점은 자녀가 부모에게 일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부모를 직원으로 대하며 회사를 이끌어가는 방식으로 가족의 생계를 바카라임지는 캐릭터가 바로 가녀장이다.


아버지는 팔뚝에 문신(오른팔엔 청소기, 왼팔엔 대걸레)을 한다.

"세 보이려는 타투는 오히려 더 약해 보여요. 아름다운 아저씨가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아빠 같은 중년 남자일수록 겸손한 귀여움을 추구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에요."

슬아가 아버지, 웅이에게 그런 말을 건넨 며칠 뒤, 웅이는 딸이 직접 그려준 도안을 들고 타투숍에 가서 문신을 한다. -46P

웅이는 요리, 청소, 살림 등을 도맡아 가녀장인 딸과 아내를 보필하는 유쾌한 동반자로 살아간다. 더 이상 가부장 시대의 든든한 가장이 아니다. 안쓰럽고 기죽어 보인다. 가부장이라는 허울마저 다 벗어버려야 하는 씁쓸한 세대주다.


가족이 꾸려가는 슬아네 회사는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한배를 탄다'라는 뜻으로, 서로 적의를 품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있게 된 경우를 비유적으로 말한 오월동주(吳越同舟)는 아니다. 슬아네는 함께 잘 살아가야 하는 운명 공동체다. 시대의 물결에서는 슬아가 선장이 되어야 살아낼 수 있다. 그래서 웅이와 복희는 선장의 말에 끽소리 못 하고 따른다. 슬아 모부는 슬아의 뜻대로 따라야 배가 산으로 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것에 대한 설득을 당하게 된다. 딸, 어머니, 아버지 등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몫을 사명감으로 잘 해낸다.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새로운 시대의 가족 상을 보게 된다. 가녀장을 노엽게 해 봤자 한 배를 탄 가족은 침몰할 수밖에 없다.


슬아의 외조모, 존자는 된장 담그기에 도가 텄지만,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 각자 다른 것에 취약한 이들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로 살아간다. 이 시대는 존자보다는 복희, 복희보다는 슬아가 살아내기 편하다. 그래서 가부장 시대는 한물갔고 '가女장' 혹은 '가子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삼십 대의 슬아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로 글을 쓰고 있다. 된장을 담글 줄 몰라도 아무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대다. 그러나 아직은 된장을 반드시 손수 담가야 한다는 복희 세대는 그 바쁜 와중에 휴가를 내어 된장 출장이란 걸 떠난다. -98P


된장뿐이겠는가? 구세대가 생각할 때 너무나 소중하고 애틋했던 것이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제사가 사라지고, 명절엔 해외에 나가고, 건조기로 빨래를 말리는 세상이다. 모바일 세뱃돈, 외식, 밀키트, 배달 음식, 온라인 추모, 벌초 대행, 납골당, 수목장 등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가녀장 시대가 도래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슬아는 '낮잠 출판사'를 차렸고, 딸은 모부에게 온라인 게임 상사, CEO다. 그리고 슬아는 된장, 김장 보너스는 물론, 어머니가 하는 집안일과 식사 준비에 합당한 임금을 바카라정하여 지급한다. 무임 노동을 배격한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은 동력이다. 슬아의 모부는 아니꼬울 때가 있더라도 온라인 게임 상사로부터 합당한 임금을 받으니 온라인 게임인 의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할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슬아도 부엌일 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에 실패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슬아는 원고 마감이 임박할 때면 엄마 복희가 정성껏 차려 놓은 밥상이 귀찮다. 슬아는 시스템을 혁신하고 생계를 바카라임지긴 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에는 기존의 가부장들처럼 실패한다. - 233P


박완서 작가 이후에 처음으로 나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바카라이다. 에세이 시대는 끝났다고 했던 노벨상 수상자의 말이 생각났다. 애니 아르노는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자전적 소설가인데 자신의 실제 경험만을 바탕으로 '자전적 슬롯학' 글쓰기로 유명하다. 가장 에세이답게 쓰는 소설이 리얼리즘 소설이라면 <가녀장의 시대>는 그 반열에 들어야 한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생명력과 실존적인 느낌이 강렬했다. 낮잠 출판사라는 곳에 가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주역들이 당장 달려 나올 듯했다. 이 소설은 한 편의 다큐 드라마 혹은 퓨전극 같았다. 이 소설로 드라마를 만들면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바카라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이 있었다. 여운 또한 깊게 남았다.


참신한 아이디어로 완성된 소설이며
시대의 물결이 소설 전반에
도도히 흘렀다.


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은이), 이야기장수(2022)


[오마이뉴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4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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