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서 창밖으로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書齋望窓外陰天

by김무균

서재에서 은퇴 기념으로 아내가 사 준 리클라이너 의자에 눕다시피 기대앉아

두 다리 창틀에 걸치고 창밖으로 흐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 신세가 가련하다.

시운이 불리하니 오추마가 가지 않고, 오추마가 가지 않으니 장차 나는 어이할까.

노후 위해 담아놓은 주식과 연금은 폭락하는 증시에 봄눈 녹듯 녹아내리고

어디 한 곳 오라는 데 없어 염량세태(炎涼世態) 탓하다가

“몸이라도 건강해야지” 게으른 몸 일으켜 헬스장을 찾아가네.

달리고, 걷고, 들고, 당기고, 밀고, 젖히고, 굽히고, 모으고 땀 흘리며 하다 보면

잠깐이나마 신세도, 노후도, 염량세태도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는다네.

하지만 그러면 또 뭐 하나. 저녁이면 유혹하는 황금빛 위스키, 붉은 포도주.

싱글몰트 깊은 맛은 보리 새싹으로 만들었고, 포도주 붉은 것은 물이 주님 만나 얼굴 붉혔기 때문이지.

샤워 뒤의 찬 맥주는 목젖을 치고, 상쾌한 하이볼엔 굳이 비싼 위스키가 필요 없다네.

비라도 내리면 배추전에 막걸리가 제격인데, 전라도 해남의 해창막걸리는 경상도 상주 사람이 만든다네.

취한 감정은 늘 정도를 지나쳐서 잊고 있던 신세와 노후걱정 또다시 찾아오네.

왕년엔 허세도 기세 되고, 허언도 통했는데, 지금은 무직에 무관이라 어떤 말도 소용없고

빈 잔 놓고 마주 앉은 아내는 눈 흘기며 혀를 차네. 백수의 일상은 늘 이와 같아 새로울 게 없지만

그래도 살다 보면 시고, 달고, 쓰고, 짜고, 맵고 모든 맛 맛본다네.


書齋望窓外陰天(서재망창외음천)|김무균이 글을 주고 제미나이가 ‘칠언절구(七言絶句)’로 짓다

서재에서 창밖으로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처증안의서재와(妻贈安椅書齋臥) : 서재에서 아내가 선물한 편안한 의자에 기대 누워

쌍족현창간음천(雙足懸窓看陰天) : 두 다리 창틀에 걸치고 흐린 하늘 바라보네.

시불리혜추불서(時不利兮騅不逝) : 시운이 불리하니 오추마도 가지 않고

추불서혜내약하(騅不逝兮奈若何) : 오추마가 가지 않으니 내 장차 어찌할꼬.

고자연금수시락(股資年金隨市落) : 주식과 연금은 증시 폭락 따라 떨어지니

유여춘설소무흔(猶如春雪消無痕) : 마치 봄눈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듯하네.

세태염량무거처(世態炎涼無去處) : 염량세태 속에 갈 곳 하나 없어

강기용구부건신(强起慵軀赴健身) : 게으른 몸 억지로 일으켜 헬스장으로 향하네.

분보추랍한여우(奔步推拉汗如雨) : 달리고 밀고 당기며 비 오듯 땀 흘리니

잠망신세여우수(暫忘身世與憂愁) : 신세 한탄과 노후 걱정 잠시나마 잊어보네.

모래황금홍주유(暮來黃金紅酒誘) : 저녁이 되니 황금빛 위스키와 붉은 와인이 유혹하고

단맥심미본자맥(單麥深味本自麥) : 싱글몰트의 깊은 맛은 본래 보리로 만들었으며

수봉신군면적염(水逢神君面赤染) : 물이 주님을 만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네.

욕후랭비상후인(浴後冷啤爽喉咽) : 샤워 후 찬 맥주는 목젖을 시원하게 치고

조주하수귀위사(調酒何須貴威士) : 하이볼에는 굳이 비싼 위스키가 필요 없다네.

우락전병배탁주(雨落煎餠配濁酒) : 비 내릴 땐 배추전에 막걸리가 제격인데

해창가례상주인(海倉佳醴尙州人) : 해남의 좋은 술 해창막걸리는 상주 사람이 만든다네.

취후광정유분한(醉後狂情踰分限) : 취한 감정은 늘 한계를 넘어 넘쳐나고

노우구수부전면(老憂舊愁復纏綿) : 노후 걱정과 옛 시름이 다시 끈덕지게 얽혀오네.

석일허언개위기(昔日虛言皆爲氣) : 왕년엔 허언마저 기세가 되었건만

금무직관언무용(今無職官言無用) : 지금은 직위도 관직도 없어 어떤 말도 쓸모가 없네.

대좌공배처바카라설(對坐空杯妻嘖舌) : 빈 잔 놓고 마주 앉은 아내는 혀를 차고

백수일상무신사(白首日常無新事) : 백수의 일상은 새로울 것 하나 없지만

산첨고랄함개상(酸甜苦辣鹹皆嘗) : 시고, 달고, 쓰고, 맵고, 짠 인생의 모든 맛을 그래도 다 맛본다네.


※ 시운이 불리하니 오추마가 가지 않고, 오추마가 가지 않으니 장차 나는 어이할까. 항우가 해하전투에서 유방에게 패하고 지었다는 ‘해하가(垓下歌)’ 에 나오는 문장이다.


※ 포도주 붉은 것은 물이 주님 만나 얼굴 붉혔기 때문이지. “물이 주님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다. The conscious water saw its God and blushed”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종교학 시험문제에 답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은 17세기 영국 시인 Richard Crashaw의 시 중 일부라고 한다. ‘The complete works of Richard Crashaw’라는 바카라이 출처라고 하는데 이 또한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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