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 은수빈 #유쾌한데 눈물나는 #힐링 #뮤지컬 <빨래>
"빨래를 아직 안 봤어요? 참 예뻐요, 노래 몰라요? ..."
봉사 활동하면서 알게 된 친구가 업계에서 오래 지켜봤는데 진국에 볼매라며 언니에게 꼭 소개를 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답니다. 마주칠 때마다 벌써 몇 번째, 이제 그만했으면 싶은데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합니다. 남자가 그렇게 괜찮은데 왜 여태 혼자인가 (괜찮을 리가 없는 거지) 하는 의문은 연말이라 들뜬마음에 묻혔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장소를 정하고 추운 날씨라 편하고 따뜻하게 입고 나갔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일하던 그는 공연 이야기로 시작을 하더니 대학로에서 유명하다는 뮤지컬 이야기를 꺼냅니다. 제목을 듣자 하니 세탁소 배경인가 본데 크게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적당히 매너를 지키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일어나려는데 주말에 시간이 되는지 묻습니다.
"주말에 엄마 생신이라서, 같이 보낼 것 같아요."
그러자 어머니께서 뮤지컬을 좋아하시는지 묻습니다. 그럼요, 좋아하시다마다요.
엄마 친구분 중에 신문사에 다니는 이모에게 초대권이 생기면 두 분이 공연을 보러 가곤 하셨다. 노처녀였던 신문사 이모에게 엄마는 좋은 공연 버디였나 보다. 당시 드라마 '인간시장'에서 '장총찬'으로 스타덤에 오른 박상원을 비롯해 유인촌, 소프라노 이경애가 출연한 뮤지컬 <에비타>, <쉘브루의 우산>에 다녀오신 이야기는 오래도록 들었다. 한 번은 나훈아 디너쇼 초대권이 생겼는데 두 분 다 안 가시고 다른 친구분에게 전해졌다. 호텔 양식 풀코스만 즐기고 와도 좋은 기회였는데 엄마의 취향은 확고했다.
자녀가 어린 시절에 경험해야 할 것으로 엄마의 기준은 바카라과 문화 예술이었다. 근사한 외식이나 레저, 여행은 어차피 누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지만 넉넉하게 살았다고 해서 우선순위가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다.
신문사 이모가 주는 기회도 있었고, 큰돈 들이지 않고도 즐길 거리는 많았다. 하나방소극장의 '바쁘다 바빠'는 가족들의 시끌벅적 코믹한 모습에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품바'는 맨 앞 줄에서 봤는데 배우 아저씨가 강냉이를 먹던 장면에서 나에게 한 줌 나눠 주기도 했다. 아저씨의 소중한 양식을 내가 먹어도 되나 싶어서 꾸벅하고 조심스럽게 받았더니 땀으로 범벅이 된 지친 얼굴로 씩 웃어주었다.
마당세실극장에서 보내주는 초대권으로 아가사 크리스티, 닐 사이먼의 연극을 봤다. 정태춘, 박은옥의 통기타 무대를 어른스럽게 감상하던 어린이였다. <사랑하는 이에게>를 들으면 겨울밤처럼 포근했다.
유럽의 대저택 같은 영국 대사관을 지나 낙엽이 쌓인 덕수궁 돌담길, 정동길을 걸었고 따끈하고 구수한 군밤 내음에 가을을 느끼며 '낭만'이라는 단어를 사전이 아닌 가슴으로 배웠다.
어릴 때 못 가본 여행은 내가 어른이 된 후에 부지런히 모시고 다녔고, 7번 국도도 신나게 달렸다. 어느덧 연세를 생각하니 이제는 먼 길 나서는 것보다 서울에서 호캉스가 편하다. 대극장 뮤지컬, '로라 피지'와 '킹스싱어즈'의 내한 공연을 엄마는 참 좋아하셨다.
카운터 테너의 연말 공연을 보고 나왔을 때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감성 충만한 겨울밤에 그냥 집으로 올 수가 없어 이자카야에 들어가 모듬 어묵탕에 따뜻한 도쿠리 두 병을 마셨다. 행복했다.
'백조의 호수'는 클래식 음악과 예술적인 몸짓 언어가 아름다운 공연이었다. 이 우아한 작품을 감상하면서 말 못 할 속 사정이 있었는데, 그때 족저근막염을 앓던 엄마, 평발이라 발이 쉬이 피로해지는 나는 무대 위의 모든 사람들이 발을 곧추세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발바닥이 아프고 쥐가 날 것 같았다.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 작품은 앞으로 오케스트라로 감상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와서는 쉬엄쉬엄 걷다가 노점에서 저렴하게 산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양손 듬뿍 들고 돌아오는 동네 산바카라이 희수를 바라보시는 엄마와 중년의 딸에게는 행복이다.
토요일 오후 5시의 대학로, 동지가 내일모레라 벌써 어둑어둑합니다. 혜화역을 나오니 화려한 조명의 분식 포장마차가 즐비합니다. 비닐을 들출 때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보이는 뜨거운 순대에 발길이 저절로 이끌립니다. 떡볶이가 맛있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서 이것저것 시키는데 기분이 좋아서 옆 사람들 골든벨이라도 울리고 싶습니다.
생신이니 낙산가든이나 한정식집을 여쭤봤는데 그런 곳은 별로 재미가 없으시답니다. 무거운 상차림보다는 딸과 공연 보러 가는 외출만으로도 좋아하시는 엄마를 모시고 대학로 포장마차의 어리고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분식 한상 차림을 제대로 즐겼습니다.
좁은 계단을 올라 마주한 작은 입구로 들어가니 아담한 무대가 보입니다. 좌석 번호를 보니 가장 뒷줄입니다. 시야도 트여있고, 사방으로 좁은 객석 틈에 갇혀 있는 것보다 훨씬 로열석입니다.
조연 배우가 나와 휴대폰 무음 모드, 사진 촬영 금지 등 공지 사항을 말하는데 벌써부터 느껴지는 재밌는 기운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멘트.
"오늘 오신 관객분들 중에서, OOO님, 어디 계신가요?"
살짝 당황하면서 엄마가 손을 듭니다. 이미 알고 있던 저는 내색하지 않느라 며칠 동안 참 힘들었습니다.
"오늘 따님께서 어머님의 생신을 축하드리고 싶다면서 이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여러분, 다같이 축하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관객들이 고맙게도 환호와 함께 박수를 보내줍니다.
"저희가 갑작스럽게 소식을 들어서 케이크는 준비를 못 했고요, 대신 두 분 드시라고 따뜻한 커피 두 잔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소개팅을 마무리하던 시점, 주말에 애프터를 청하는 질문에 엄마 생신이라고 했더니, 그럼 모녀분이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시라면서 마련해 준 자리였어요. 연말에 갑자기 주말 저녁 공연 좌석 확보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이렇게 유쾌한 깜짝 선물까지, 고마운 배려였어요.
커피 쿠폰이라도 주려는 걸까 궁금해하고 있는데 배우가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꺼냅니다. 겹친 종이컵 두 개에 노란색 믹스 커피 두 봉지가 꽂혀 있습니다. 가까운 앞줄 관객에게 건네며 저기 뒷자리까지 전해 주랍니다. 시험지 전달하듯이 뒤로 넘어오는 동안 재밌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한데 모두 웃으면서 분위기가 좋았고 드디어 우리 손에 도착했을 때 큰 박수와 함께 이벤트는 마무리되었습니다.
뮤지컬 <빨래>는 명품 공연이었어요. 첫 번째 관람에 새겨진 특별한 추억도 한몫했지요.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저는 회전문 관객이 되었습니다.
나영이는 부푼 꿈을 안고 서울로 온 강원도 아가씨입니다. 뮤지컬 <빨래>는 원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졸업 작품이었어요. 당시 이 역할을 맡은 학생의 실제 이름이 나영이라서 배역에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솔롱고는 한국으로 일하러 온 몽골 청년입니다. 불쌍한 캐릭터에 어눌한 대사가 특징인데, 임창정이 이 역할을 한 적이 있답니다. 얼마나 청승맞게 잘했을까요. 대극장 배우 홍광호도 솔롱고를 했던 적이 있어요. 솔롱고가 나영이에게 고백하는 마음을 부른 <참 예뻐요>는 제목만큼 참 예쁜 노래입니다.
주인 할매는 이정은 배우도 몇 년 동안 거쳐간 역할입니다. 성질이 보통 아닌 이 할매가 빨래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에 관객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주인 할매처럼, 저도 여러분도, 얼룩 같은 슬픔일랑 빨아서 헹궈버리고, 먼지 같은 걱정일랑 털어서 날려버리면 좋겠습니다. 나영이처럼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리면 좋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fgLZ6zqz8k&list=PL2GMtjIf0bZCbsemnHNQTTh7s0_02inPj&index=4
https://www.youtube.com/watch?v=fwagn0-WU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