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빈 낭독 #Mon cadeau #Elsa Lunghini
"팀장님, 이거..."
막내 여직원 J가 할 말 가득 상기된 얼굴로 방으로 들어옵니다.
"주말에 집에 다녀왔는데, 부모님이 팀장님 갖다 드리라고 챙겨주셨어요."
받아보니 쇼핑백 안에 복숭아가 들어있습니다.
J의 고향은 충청도, 사정이 있어서 4년제 대학교 졸업을 마치지 못하고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취업하고 자리를 잡고 싶었는데 계약직으로 이곳저곳 전전하다 보니 3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원래도 수줍음이 많은데 그 시간들이 J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습니다.
회사 생활은 했지만 신입 시절에 익혀야 할 것들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경력 3년이 거짓은 아니지만, 업무 능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J는 중요한 한 가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괜찮은' 직원을 뽑아라. '괜찮음'은 결코 가르칠 수 없으니.
사우스웨스트 항공의 성공 스토리에 나오는 이 문장은, 물건은 고쳐쓸 수 있어도 사람은 고쳐쓸 수 없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J는 '매우 괜찮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알려주면 진지하고 성실하게 배워나갔습니다. 변명도 핑계도 없었습니다. 제대로 일을 배울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J가 앞으로 지속하게 될 슬롯생활에서 기본을 잘 갖춘 사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해주고 싶었습니다. 잃어버린 3년을 압축한 하드 트레이닝이 이루어졌습니다. 실수가 반복되면 자바카라하고 주눅 드는 습관부터 버리게 했습니다.
필요한 실수는 일찌감치 많이 하고 제대로 배우는 게 좋은 거다, 그러니 지금 힘들어도 견뎌라, 그렇다고 실수가 자랑은 아니니 다른 사람 앞에서는 주의하라, 내 앞에서만 해라, 나한테 혼나는 건 괜찮잖아?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웃는 J를 채용하기 전, 그 자리를 스쳐간 인물들의 긴 스토리를 생각하면 본바탕이 좋은 J가 잘 배워서 적응해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J가 입사한 지 몇 주 지나 설날을 맞이했습니다. J는 회사에서 보내는 택배 선물에 고향집 주소를 적었습니다. 그동안 회사 다니면서 명절 선물을 제대로 받아봤으려나 싶었어요.
서울 간 딸내미가 집에 올 때마다 변변치 않은 소식에 잔뜩 풀이 죽어있으니 집에서도 많이 속상하셨을 겁니다. 새로 온라인 게임을 구했다는데 기쁘고 반가운 만큼 염려도 적지 않았을 듯해요. 회사와 겹치지 않게 선물을 두 개 사서 들려 보냈습니다. 버스 타고 내려가는 동안 큰 짐이겠지만 뿌듯한 불편함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어요.
저의 지난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대학 시절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몇 군데 했었는데, 한 곳이 잊히지 않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협력 업체와 거래처에서 부서로 선물이 많이 들어왔어요. 저는 공식적인 명단에서는 투명 인간이었죠. 알바도 매일 얼굴 보고 같이 밥 먹는 사이니까 우리 사람이라며 챙겨주시는 손길에 며칠 동안 양손 가득 명절 선물 세트를 이고 지고 메고 퇴근했습니다. 다른 부서 팀장님이 지나가던 저를 불러 세우고는, 거기, OO팀 알바 맞지? 이거 가져가, 하고 건네 주시면 그 감동을 어쩌란 말입니까.
집안 분위기 어두운 거는 말할 것도 없고, 복학은 언제 하게 될지 불안하고 앞날이 까마득한데, 따뜻하게 챙겨주시는 분들 덕분에 마음 한 켠이 춥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J에게서 그때의 제가 보였어요.
연휴를 보내고 오더니 J가 땅콩을 이만큼 가져왔습니다. 집에서 키운 건데 곧 정월대보름이니 부모님께서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챙겨주셨답니다. 명치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때부터 J와 저의 마니또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침 회의를 마치고 오면 바카라상에 놓인 결재판에 사탕, 초콜릿, 비타민 같은 작은 간식이나 귀여운 메모가 꽂혀 있습니다. 퇴근 시간에 같이 나가거나, 둘이 있게 되면 저는 J의 손을 무겁게 해주는 것으로 예쁜 마음에 보답했습니다.
6월의 어느 월요일 아침, J가 출근하자마자 부지런히 저에게 오더니 주말에 집에 다녀왔다면서 묵직한 무언가를 건넵니다.
얇은 크라프트지 쇼핑백 안에는 제 두 손을 모아 동그랗게 만든 것보다 큼직한 복숭아가 다섯 개 들어있습니다. 백화점 식품관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잡고, 럭셔리한 패키지에 담겨, 드라이아이스 스모그의 멋진 연출과 함께 귀하게 모셔야 할 자태입니다. 그런데 멍든 자국이 군데군데 보입니다. 코끝이 시큰해졌습니다.
충청도 고향집에서 서울의 작은 방까지 먼 여정, 오늘 아침 북적이는 지하철의 고단한 출근길이, 꼬깃해진 쇼핑백과 멍든 복숭아에서 그대로 전해집니다. 집에 가자마자 더 무르기 전에 모두 껍질을 제거하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담았더니 그릇에 가득합니다. 향기롭고 풍부한 과즙에 과육은 말도 못 하게 부드럽습니다. 저 깊은 산속에서 신선들이 구름 타고 즐길 맛입니다.
J에게 인사를 전했습니다. 복숭아 정말 맛있다, 먹어본 중에 최고다,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마음을 생각하면 아껴먹어야 하는데 너무 맛있어서 이틀 동안 다 먹었다고 하자 반가운 얼굴로 말합니다.
"집에 아직 있는데, 더 갖다 드릴까요?"
집에서 챙겨주신 건데 J가 많이 먹어야지, 했더니 자기는 해마다 먹는 거라 괜찮답니다. 마다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비록 가진 게 많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게 있고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존재감, 그 마음을 잘 아니까요. 그리고 그 복숭아는 정말 맛있었어요. 부모님께서 판매하시면 넉넉하게 사서 여러 집에 선물하고 싶었는데 그만한 규모는 아니라 친척, 이웃들과 나눠 먹는 정도랍니다. 그게 저에게까지 왔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그럼 가져와서 회사에서 같이 나눠 먹자고 했습니다.
다음날 J는 역시나 고된 시간이 그대로 묻어나는 복숭아 세 개를 챙겨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받은 것과 다른 모양입니다. 크기가 훨씬 작습니다. 노점에서 무심하게 쌓아놓고, 손을 몇 번 타든 말든 그저 오늘 내로 떨이하면 되는 복숭아를 닮았습니다. J의 복숭아에 또 찡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내주는 마음, 부모님을 닮아 J의 심성이 그렇게 고왔나 봅니다.
이후 J는 2년 조금 넘게 다녔고, 이제야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며 늦었지만 공부를 하고 싶다면서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J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인데 표정이 밝습니다. 화사한 에너지도 느껴집니다.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 있는 아우라, 제가 가장 가르쳐 주고 싶던 모습이었습니다.
6월이 되었으니 제철을 맞아 다양한 복숭아들이 나오겠지요. 맛과 향기를 생각하면 백도에 먼저 손이 가는데 다루기가 여간 까다롭지가 않습니다. 천도복숭아나 딱딱이는 고르기도 부담 없고, 씻기도 편하고, 아삭거리는 식감과 상큼한 맛이 매력입니다. 유럽에서 건너온 납작복숭아의 맛도 궁금합니다.
올해는 복숭아 농사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고향집 과수원에 풍성하고 아름답게 열린 복숭아처럼 J가 곱고 향기로운 삶을 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Et qu'il me donne si possible
l'envie de vivre encore plus fort
dans la grisaille des villes"
"그리고 가능하다면 저에게 힘을 주세요
살고자 하는 더욱 강한 욕망을요
이 회색빛 도시에서조차"
https://www.youtube.com/watch?v=2IhQj4G009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