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줄 알았던 시간도 나를 데려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력서 파일을 열었다. 화면에는 몇 년 전까지 익숙하게 적었던 회사 이름과 경력들이 차례로 놓여 있었다. 맡았던 업무, 참여했던 프로젝트, 꽤 오래 일한 시간까지 분명 적을 것은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의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경력란은 길었는데 마음은 자꾸 작아졌다. 내가 해온 일보다 지금 부족한 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기소개서 첫 문장 앞에서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쓰지 못한 채 화면만 바라봤다. 예전에는 내 일을 설명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무엇을 해왔는지 알고 있었고, 앞으로 무엇을 할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을 설명하는 일이 낯설어졌다. 지금의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해야 하는지조차 잘 모르겠는 날이 생겼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그 생각을 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자리에서 오래 경력을 쌓은 사람, 자신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낸 사람, 새로운 일을 시작해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
누군가는 승진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누군가는 바카라을 냈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그들의 소식을 보면 진심으로 축하하면서도 마음 한쪽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조급함이 남았다.
나는 왜 아직 여기일까. 남들이 어디까지 갔는지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자꾸 내가 얼마나 늦었는지를 계산했다. 내 나이를 생각했고, 지나간 시간을 떠올렸고, 지금 다시 시작하면 얼마나 오래 걸릴지를 먼저 걱정했다.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보다 먼저 드는 생각도 늘 비슷했다. 지금 시작해도 될까. 조금만 더 젊었으면 좋았을 텐데. 예전에 하던 일을 계속했더라면 지금은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꽤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늦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누가 나에게 늦었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몇 살까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표가 하나 있었다. 이 나이에는 이 정도의 자리가 있어야 하고, 이쯤에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어야 하고, 이제는 새로 시작하기보다 이미 가진 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있다고 느끼면 마음이 급해졌다. 늦었다는 생각은 단순히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나는 그 말을 내 능력과 가치에까지 붙이고 있었다.
경력은 오래됐는데 왜 나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일까. 예전에는 잘했던 일도 새로운 환경 앞에서는 자신이 없어졌다. 새로운 분야를 바라볼 때면 내가 가진 것보다 없는 것이 더 크게 보였다.
그래서 지원 버튼을 누르기 전에는 늘 한 번쯤 망설였다. 괜히 지원했다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내 경력이 애매해 보이면 어떡하지.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어쩌면 나는 실패 자체보다 실패한 나를 다시 마주하는 일이 더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다시 시작했다가 잘되지 않으면, 내가 정말 늦었다는 사실이 확인될 것만 같았다.
그날도 지원서를 한참 쓰다가 노트북을 덮었다. 잠깐 쉬려고 휴대폰을 들었다가 또 다른 사람들의 소식을 보게 되었다. 누군가는 새 회사에 출근했고, 누군가는 강의를 시작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바카라을 들고 웃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 사진들을 보며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한 가지 생각이 오래 남았다. 저 사람들도 처음에는 시작점에 있었겠지.
나는 늘 누군가의 완성된 장면만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처음 시작할 때 얼마나 불안했는지,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 잘되지 않아 속상했던 날이 몇 번이었는지는 볼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의 결과와 내 시작을 나란히 놓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시작이 초라해 보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보여줄 것이 많지 않고,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곳이 시작점이니까.
그런데 나는 오랫동안 시작점에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이 나이에는 더 이상 처음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능숙하고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인생에는 시작점이 한 번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할 때도 처음이었고, 첫 회사에 들어갈 때도 처음이었다. 새로운 업무를 맡을 때도, 낯선 사람들과 일할 때도 늘 처음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다시 처음이었다. 마흔이 되면 삶에 조금은 익숙해질 줄 알았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알게 되고, 실패에도 덜 흔들리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조금은 선명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처음 만나는 것이 많아졌다. 처음 겪는 변화가 있었고, 처음 내려놓는 것이 있었고, 처음 시작하는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전에는 몰랐던 나 자신을 처음 만나는 순간도 많아졌다.
생각해보면 삶은 나이가 들수록 처음과 멀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처음을 계속 통과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시작점이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다시 어디론가 갈 수 있는 자리처럼 느껴졌다. 시작점은 부족함의 증거가 아니라,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표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아까 멈춰두었던 자기소개서 화면이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커서는 여전히 첫 문장 앞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천천히 한 줄을 썼다. 그리고 그다음 줄을 썼다. 아주 대단한 문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조금 전까지 멈춰 있던 나는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 지원서를 끝까지 완성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다시 고쳤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기억한다.
늦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멈춰 있다고 생각했던 시간에도 사실은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일을 찾아보고, 글을 쓰고, 다시 나를 설명할 말을 찾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어서 멈춘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이 시작이 어디로 이어질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내가 결국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 그래도 그날은 처음으로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조금 늦어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내가 가야 할 계절이 아직 남아 있다면, 지금 다시 시작점에 서 있는 이 순간도 결국 그 계절로 가는 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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