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도 주눅도 없이, 경험을 쌓으며 내 가치를 올려나가는 법
예술 대학을 졸업하고 야생의 시장에 첫발을 디딜 때, 수많은 전공자가 깊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명문대를 졸업한 이들은 "내가 그래도 이 학교를 나왔는데"라는 자의식에 갇혀 자신의 가치를 시장이 알아서 대우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지방대를 나온 이들은 괜한 열등감에 주눅 들어 시작조차 주저하곤 한다.
나 역시 서울대를 졸업하고 서초동의 한 작은 학원에서 1:1 레슨을 맡으며 처음으로 정기적인 수입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명문대를 나왔다고 해서 시장이 나에게 레슨비를 더 얹어주거나 특별 대우를 해주지는 않았다. 필드의 첫 진입로에서 매겨지는 페이는 출신 학교와 상관없이 비슷했다.
시장의 고객은 당신의 졸업장보다 "지금 당장 내 요청을 깔끔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가"에만 관심을 둔다. 학창 시절의 간판은 시장으로 들어오는 문을 아주 살짝 넓혀줄 뿐, 통장에 들어오는 액수를 결정지어 주지 못한다. 학벌에 대한 뜬구름 잡는 자만심도, 무의미한 주눅 듦도 모두 털어내자. 모든 예술가는 필드에 나오는 순간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다.
골방에 앉아 자신의 출신과 프로필을 자랑하며 고상한 일거리만 기다리는 졸업생보다, 필드에 나와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직접 경험해 내는 예술가가 훨씬 빠르고 단단하게 자립한다. 야생에서 내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막연한 자의식이 아니라, 실체 있는 실력과 실제로 일을 실행해 낸 실전 경험의 숫자다.
내 전공인 피아노 시장만 보더라도 그렇다. 처음 필드에 나오면 나를 증명할 입소문이나 포트폴리오가 없기에, 작고 소소한 반주부터 시작해 수많은 합을 맞춰보며 현장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 작은 거래와 실전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실력이 증명되기 시작하면, 결국 시장에서 진짜 실력 있는 반주자를 찾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내 페이와 단가를 올릴 수 있게 된다.
작은 협업이든 소소한 작업이든, 필드에서 직접 구르며 만들어낸 경험들이 쌓여 비로소 나만의 진짜 포트폴리오가 된다. 학벌이라는 허상을 내려놓고 실행력을 무기로 실전 경험을 쌓아 올리는 플레이어가 결국 그 필드에서 제 자리를 찾고 단단한 수입을 만들어낸다.
현장 경험을 늘리며 필드에서 자리를 잡아갈 때 가장 경계해야 할 불청객이 있다. 바로 "좋은 게 좋은 거다", "아는 처지에 서로 돕고 살아야지"라며 다가오는 온정주의와 열정페이다. 나 역시 친척의 부탁으로 사촌의 딸을 맡아 가르친 적이 있다. 하지만 친인척 관계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정당한 레슨비를 받지 못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님으로서의 전문성과 존중을 받기는커녕 관계마저 애매하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몇 달 만에 내가 먼저 정리해야 했다.
지인의 부탁이나 친분이라는 핑계로 내 노동력과 기술을 헐값, 혹은 무료로 넘겨주는 일은 결코 선의가 아니다. 온정주의에 휘둘려 지인 할인을 무조건 받아주는 순간, 프로로서의 전문적 존중은 사라지고 언제든 싸게 부르기 좋은 만만한 지인으로 남기 쉽다. 내 기술과 시간에 명확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야박한 것이 아니라, 프로로서 자신을 지키는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헐값에 내 가치를 넘기는 행위는 나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동종 업계 전체의 정당한 대가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경험이 쌓이고 포트폴리오가 단단해졌음에도 초보 시절의 단가에 자신을 묶어두는 것 역시 겸손이 아닌 지독한 자기기만이다. 실전 경험이 축적되고 내 서비스나 작업의 퀄리티가 입증되었다면, 거기에 맞춰 당당하게 내 단가를 올려받아야 한다. 내 가치를 높이면 자연스럽게 나를 헐값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걸러지고, 내 전문성을 인정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우량한 고객과 파트너가 곁에 남게 된다.
예술가의 자립은 누군가의 선의나 온정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내 기술의 가격표를 정당하게 매기고, 경험이 쌓일수록 그 가치를 당당하게 올려 받아내는 자립의 스케일업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예술로 삶을 유지하는 진짜 밥벌이가 완성된다.
나는 여전히 학벌이나 간판 뒤에 숨어 자만하거나 주눅 들어 있지 않은가?
나는 입으로만 예술을 말하는가, 실제로 필드에서 발로 뛰며 실전 경험을 만들어내는 플레이어인가?
아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내 시간과 노동을 헐값에 넘겨주고 있지 않은가?
쌓인 경험만큼 내 기술과 작업의 가치를 당당하게 올려 받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