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의미 없이 농담처럼 던진 말에 남편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진다. 하하. 웃으며 농담처럼 대답했지만,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속으로 살짝 놀랐지만, 티 내지 않으며 금세 웃음기 사라진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무던해 보이는 두 사람이 만나 무난하게 결혼했으니, 사는 동안 별 탈 없을 줄 알았다. 결혼 전 사계절을 함께 겪어본 사람인데, 내가 알지 못한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처음 싸웠던 순간의 장면을 잊지 못한다. 결혼 후 시댁에서 7년을 살면서 한 번도 큰소리 내는 일이 없었으니, 분가 후에도 그렇게 잘 살 줄 알았다. 무슨 일로 싸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마침 주방에 있었고 김치통에서 김치를 꺼내고 있었다. 말싸움 끝에 화가 난 남편은 얼굴이 붉그락푸르락하더니 김치통에 화풀이를 해댔다.
난 처음 겪는 일이라 충격적인 사건이었음에도 남편은 그때의 일을 기억조차 못하더라. 아무튼, 김치통에 가지런히 담겨있던 배추김치는 싱크대와 주방 바닥으로 나뉘어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빨갛게 물들여진 주방을 뒤로하고 남편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쏟아진 김치를 한참 동안 쳐다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던 거 같다. 이 상황을 그대로 둘 것인지, 일단 치우고 나서 얘기를 할 것인지, 아마 그런저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말끔히 치웠지만, 그 사건이 있고 난 후에는 절대로 마주 보고 싸우지 않게 되었다. 일단 한 번은 참고, 그런 상황을 피하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조곤조곤 따지기도 하고, 설명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하고. 싸우지 않는 부부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싸우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갔다. 직접적으로 부딪히지 말자는 계기가 된 것이다.
연애할 때는 다 좋았던 시절이라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겠지. 시부모와 함께 살 때는 어른들이 계시니 또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겠지. 그러다가 분가하고 나니, 잘 보일 시기도 아니고 눈치 볼 사람도 없으니, 어쩌면 과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편에게 그런 순간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그 후에도 몇 번 더 욱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상하고 말다툼이 생길 때마다 나는 한 번 참고,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부딪히지 않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갔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런 불편한 상황이나 감정을 느꼈던 시간이 언제였는지 꽤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듯하다. 이런, 언제부터였지? 그러고 보니, 남편은 언제부터인가 모든 것을 좋은 게 좋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래도 응, 저래도 응. 만사 오케이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당신만 한 사람이 없더라.”
남편의 대답은 이랬다.
나이 들고 주변을 둘러보니, 당신만 한 사람이 없어. 생각할수록 대단해. 예전에는 내가 그걸 모르고 살았더라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과 30년을 넘게 살았다. 가장 가까이에서 30년을 살았는데도, 정작 그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몰랐던 모양이다. 익숙한 일상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다가 주변 사람들을 보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나 보다.
요즘 남편은, 나의 모든 것을 지지하는 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고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대단해!라고 추켜 세워준다. 또 배우고 싶은 것을 망설임 없이 시도해 보는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내며 응원한다. 이런 남편을 보며 나도 다른 사람과 살고 있는 거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부부는 전생에 원수였다고 한다. 정말 그런 인연이라면, 이번 생에서는 꽤 잘 해낸 셈이다. 삐걱거리기도 했고, 돌아서기도 했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순간도 많았다. 그래도 30년을 함께 걸어왔다. 앞으로는 미처 알지 못한 또 다른 좋은 점을 좀 더 일찍 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남은 인생도 지금처럼 당신도, 나도, 그 마음 변치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