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은 그 자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집에 돌아온 뒤 시작된다. 부탁을 받는 순간에는 늘 비슷하다.
"네."
"괜찮아요."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온다. 그러고 나면 그제야 마음이 바빠진다.
'안 된다고 말해도 괜찮았을까?'
'이번에는 거절해도 되는 일이 아니었을까?'
이미 끝난 대화를 혼자 다시 이어 간다.
거절은 늘 집에 와서 시작된다. 거절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누군가는 상대를 실망시킬까 봐, 또 누군가는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 때문에 쉽게 "아니요."라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거절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거절한 뒤의 마음을 감당하는 일이 더 어렵다. 잠깐 스쳐 지나갈 상대의 표정 하나도 오래 마음에 남는다. 신기한 건, 내 마음은 늘 가장 나중이라는 점이다. 상대의 일정은 먼저 생각하면서도 내 일정은 뒤로 미룬다. 상대의 사정은 이해하면서도 내 사정은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그렇게 하나둘 양보하다 보면 어느새 내 시간도, 내 에너지도 조금씩 줄어든다.
그런데도 그 순간에는 잘 모른다.
일단, 괜찮다고 말했으니까.
예전에는 거절이 관계를 멀어지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관계를 오래 지키는 사람은 모든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도 함께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된 것이다. 모든 부탁을 받아들이는 것이 배려는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지치기 시작하면 관계도 오래 버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연습을 하나 시작한다.
바로 대답하지 않는 것.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짧은 한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생각할 시간이 생긴다. 정말 할 수 있는 일인지. 하고 싶은 일인지. 지금의 나에게 무리가 되지는 않는지. 그제야 내 마음을 묻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나에게 거절은 쉽지 않다.
가끔은 예전처럼 "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기도 한다. 다만 한 가지는 조금 달라졌다.
상대의 마음만큼 내 마음도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거절은 누군가를 밀어내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의 자리를 조금 지켜내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