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의 도전 리더십과 성공 전략 4

04 - 에피소드 2. “그럼, 해보죠”

by김용년

에피소드 2. “그럼, 해보죠”


많은 리더들이 결단의 순간에 자신의 '감(직관)'을 맹신한다. 경험이 쌓이고 자리가 높아질수록 자신의 판단을 오류 없는 진리로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강한 리더는 직관만 믿지 않고, 데이터와 과학으로 자신의 가설을 검증하려 든다.


2000년대 중반 기아의 지휘봉을 잡았던 정의선 사장이 맞닥뜨린 첫 번째 시험대 역시 바로 이 '직관에 데이터를 더하는 도전'이었다.


2000년대 중반, 기아의 브랜드를 바꾸기 위해 자동차 업계에서는 다소 낯선 실험이 시작됐다.


현대자동차그룹에 편입된 지 수년이 흘렀지만, 기아만의 뚜렷한 정체성은 여전히 약했다. 신차를 내놓아도 시장의 인식은 ‘현대차보다 조금 저렴한 대안’이라는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차 한 대를 더 잘 만드는 문제가 아니었다. 소비자의 머릿속에 기아라는 이름 자체를 새롭게 각인시킬 돌파구가 필요했다. 당시 기아를 이끌던 정의선 사장은 기존 자동차 업계의 관행과는 다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신차 이름을 짓는 데 뇌과학을 접목해보자는 시도였다.


당시 자동차 이름은 주로 최고경영진의 직관과 마케팅 부서의 경험, 해외에서도 쉽게 발음하고 기억할 수 있는지 등을 따져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정의선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고 싶었다. 소비자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이름이 실제로 더 강하게 반응할까? 감각과 경험에만 의존하지 말고 과학적으로 확인해보자는 것이었다.


기아는 약 15개월에 걸쳐 새로운 차명을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KAIST 정재승 교수 연구팀과 함께 약 3개월 동안 국내외 소비자 200명을 대상으로 뇌과학을 활용한 실험을 진행했다. 소비자들이 자동차 이름에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는지 설문으로 조사하고, 시선 추적 장치로 어디에 주목하는지 살펴봤으며,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차명에 대한 뇌의 반응도 측정했다. 이름 하나를 정하기 위해 소비자의 생각과 시선, 뇌의 반응까지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결과가 나타났다. 알파벳 ‘T’에 소비자들이 특히 높은 선호 반응을 보인 것이다. ‘Technology’를 떠올리게 하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도 강하게 나타났다.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기아는 ‘T’를 활용한 알파뉴메릭 차명 체계를 유력한 후보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본궤도에 오르던 무렵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나타났다. 주요 전략 시장 가운데 하나인 중국에서 상표권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공들여 준비한 T 계열을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법적·사업적 부담이 컸다. 차선바카라으로 떠오른 후보가 연구 과정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던 ‘K’였다.


K에는 여러 의미가 겹쳐 있었다. 기아(Kia)의 첫 글자이자 대한민국(Korea)을 상징하는 글자였고, 강함과 힘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스어 ‘Kratos’의 첫 글자라는 설명도 더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K가 처음부터 사내의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국내 소비자들은 오랫동안 단어형 차명에 익숙했다. 그런데 갑자기 알파벳과 숫자를 조합한 이름을 쓰자니 낯설다는 반응이 나왔다. 해외 프리미엄 브랜드를 떠올리게 하는 방식이 과연 기아에 잘 어울릴지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결국 회의의 쟁점은 단순했다. 익숙하고 안전한 이름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데이터가 보여준 새로운 길을 선택할 것인가? 과거의 방식을 지키자는 의견과 새로운 브랜드 체계를 추진하자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 과정에서 정의선은 짧게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K.”


짧은 말이었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세계적인 브랜드의 성공 사례를 보면 단순함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알 수 있다. 나이키는 날렵한 곡선 하나로 역동적인 이미지를 전달하고, 애플은 한입 베어 문 사과 모양만으로 세계인의 기억에 남았다. 복잡한 설명보다 간결하고 뚜렷한 상징이 오래 기억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브랜드의 성공에는 뛰어난 제품과 오랜 신뢰가 뒷받침되어 있었다. 기아의 K시리즈 역시 단 하나의 알파벳과 숫자로 세단의 정체성을 새롭게 표현하려는 도전이었다. 좋은 브랜드는 많은 것을 설명하기보다, 한눈에 알아보고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힘을 갖는다.


2009년 말 출시된 준대형 세단 K7은 시장에서 빠르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피터 슈라이어가 이끈 새로운 디자인 방향과 ‘K7’이라는 간결한 이름이 결합하면서 기아의 세단 이미지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4만 대 이상 판매됐고, 이후 K5와 K3 등으로 K시리즈가 확대되면서 기아의 새로운 세단 브랜드 정체성도 점차 자리 잡아갔다.


그러나 정의선식 리더십의 또 다른 특징은 K시리즈의 성공 이후에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성공 경험은 누구에게나 매력적이다. 한 번 시장에서 성과를 낸 전략은 다른 영역으로까지 확장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기아 내부에서도 비슷한 구상이 검토됐다. 세단에서 K가 성공하자, SUV와 미니밴에도 통일된 알파뉴메릭 체계를 적용해보자는 아이디어였다. 카니발과 스포티지 같은 기존 차명 대신 SUV를 뜻하는 ‘KV’ 계열의 이름을 사용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무진에서 다른 의견이 나왔다. 스포티지와 카니발은 오랜 기간 국내외 시장에서 독자적인 브랜드 자산을 쌓아온 핵심 차명이었다. 세단의 성공 방식을 그대로 확장해 기존 이름을 버리는 것은, 그동안 축적한 고객의 인지도와 브랜드 자산을 오히려 훼손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최고경영자가 직접 제안한 아이디어였지만, 실무진은 기존 차명이 가진 브랜드 자산을 근거로 솔직하게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정의선은 그 논리를 경청한 뒤 자신의 아이디어를 거두어들였다.


“그렇겠네요. 알겠습니다.”


최고경영자가 직접 제안한 아이디어에 실무진이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리더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말하는 일은 어느 조직에서나 쉽지 않다. 조직심리학자 에이미 에드먼슨(Amy Edmondson)이 강조한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은 구성원들이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않고 질문하거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환경을 뜻한다. 이 장면은 실무진이 근거를 들어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최고경영자가 이를 받아들이는 열린 소통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좋은 리더는 자신의 의견을 따르는 사람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판단을 위해 자신과 다른 의견도 기꺼이 듣는 사람이다. 이러한 경청의 자세는 경영진과 전문가뿐 아니라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경험과 목소리를 존중하는 데까지 이어져야 한다. 현장의 목소리가 경영에 반영될 때 기업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K7에서는 내부의 우려를 넘어 새로운 가설을 실행에 옮겼고, KV에서는 더 나은 근거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거두어들였다. 겉으로 보면 상반되어 보이는 이 두 장면은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가 『추측과 반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에서 강조한 생각과 흥미롭게 맞닿아 있다. 인간의 판단은 언제든 틀릴 수 있기 때문에 먼저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현실의 검증과 비판에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포퍼의 핵심 생각이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근거가 나타났을 때 자신의 판단을 다시 검토하고 필요하다면 수정할 수 있는 태도다.


K시리즈의 성공은 정의선에게 분명한 성과와 자신감을 안겨줬다. 하지만 그는 한 번 성공한 방식을 모든 차종에 적용해야 할 정답으로 굳히지는 않았다. 시장과 현장의 반응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면, 성공 경험조차 다시 들여다봤다. 잘된 방법이라고 해서 언제나 옳은 방법은 아니었다. 현장의 논리가 시장의 현실을 더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판단되면 방향을 바꿨다. 자신의 아이디어에 미련을 두기보다 실제 시장이 보내는 신호를 받아들인 것이다.


정의선 회장은 K시리즈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차종마다 다른 고객의 요구와 브랜드 가치를 존중했다. 이것이 성공 경험보다 시장의 현실을 앞세운 그의 경영 방식이었다.


이러한 경영 원칙은 대기업 회장뿐 아니라 중소기업 경영자와 창업가, 팀을 이끄는 관리자에게도 중요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행하기 전에는 목표와 기대 효과를 분명히 하고, 실행한 뒤에는 고객의 반응과 성과를 객관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처음 내린 결정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 아니라, 그 결정이 실제로 고객과 조직에 도움이 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정의선의 “그럼, 해보죠”라는 말은 결코 단순한 돌격의 구호가 아니다. 그 한마디의 앞에는 경청과 검토가 있다. 전문가의 견해를 듣고, 데이터와 현장의 타당성을 면밀히 살펴본 뒤, 시험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실행의 문을 열어주는 결단의 언어다. 그리고 그 결단은 결코 닫혀 있지 않다. 시장의 피드백과 현장의 증거가 예상과 다르게 나타난다면 언제든 다시 검토할 수 있다는 열린 태도도 담고 있다.


회의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만으로 경청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리더의 경청은 전문가의 말을 충분히 들은 뒤, 결국 자신의 바카라임으로 결정을 내리는 데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삼성에서 오랫동안 인재를 선발하고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뛰어난 인재의 아이디어가 실제 도전으로 이어지려면 이를 믿고 실행의 기회를 열어주는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새로운 제안이 타당하다면 과감하게 기회를 주고, 더 나은 근거가 나타나면 자신의 판단도 기꺼이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아산 정주영 창업주의 “이봐, 해봤어?”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불굴의 의지로 돌파구를 찾던 실행의 언어였다면, 정의선의 “그럼, 해보죠”는 정밀한 가설을 세우고 데이터로 검증하되 더 나은 근거 앞에서는 유연하게 방향을 바꿀 줄 아는 성숙한 합리주의의 언어다.


고집은 리더의 권위를 세워주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시장의 현실에 기꺼이 맞출 줄 아는 유연함, 그리고 실무진의 타당한 반대 앞에서 “그렇겠네요”라고 물러설 줄 아는 경청이야말로 조직의 지능을 극대화하는 진짜 힘이다.


결단하되 경청하고, 실행하되 수정할 줄 아는 리더. 이것이 바로 기아의 브랜드 혁신을 이끌고 현대차그룹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여온 정의선식 승부수의 본질이었다.






[목차 안내]


바카라 제목 :『정의선의 도전 리더십과 성공 전략』


대한민국 3세대 경영자 시리즈 제1권


서문. 승계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라

1장. 왜, 지금 정의선인가?

2장. 현대차를 만든 두 거인, 정주영과 정몽구

에피소드 1. 뚝심에서 혁신으로


(중략)


4장. 기아에서 시작된 정의선의 첫 번째 승부

에피소드 2. “그럼, 해보죠”


(중략)


9장. 왜 정의선은 로봇에 베팅했는가?

10장. 정의선의 다음 승부수, Physical AI

에피소드 7. 정의선의 글로벌 AI 동맹


(중략)


14장. 정의선의 경영 철학

15장. 사람을 얻는 정의선의 인사 철학

에피소드 11.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정의선


(중략)


19장. 정의선의 3대 도전 과제와 돌파 전략

20장. 현대차여, 창도전진(創道前進)하라

21장. 정의선에게 배우는 10가지 성공 전략


성공전략 01. 초심을 기억하라

성공전략 05. 최고의 사람을 데려와 맡겨라


(중략)


성공전략 10. 자신의 시대를 만들어라


정의선 회장님께 드리는 감사의 말씀

저자소개






■ 저자 소개


김용년 (Kim Yongnyeon)


삼성에서 30년간 기업 경영과 글로벌 인재 육성의 현장을 경험한 경영 저술가이자 작가. 삼성물산에서 인사, 전략, 해외 사업을 담당했고, 삼성장학회에서 20년간 글로벌 장학사업을 총괄하는 임원으로 일하며 하버드, MIT, 스탠퍼드, 옥스퍼드 등 세계 유수 대학의 우수 인재 1,000명 이상의 선발과 성장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공학·자연과학 분야 연구 논문을 읽고 석·박사 연구자들과 교류하며 사람의 역량과 첨단 기술이 결합해 혁신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 기술 자체를 해설하기보다, 리더가 어떤 인재를 선택하고 어떤 조직을 만들며 어떤 미래에 자원을 배분하는지를 경영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국내외에서 20권의 바카라을 출간하며 저술 활동을 이어왔다. 대표작으로 『성장을 위한 마음 편지』, 『노력형 천재들의 공부법』이 있으며 아마존(Amazon)을 통해 영문 도서를 출간했다. 현재 동서양 고전의 지혜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주요 기업들의 변화와 도전을 독립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에서 조명하는 『대한민국 3세대 경영자 시리즈』를 기획해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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