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 1장. 왜, 지금 정의선인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출발선에 서 있는 사람을 상상해보자.
태어나는 순간 대한민국 경제의 거대한 영토가 발아래 놓여 있고, 아산 정주영의 손자이자 정몽구 명예회장의 장남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는 삶. 평생 돈 걱정 없이 원하는 것을 누리고,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조건. 사람들은 흔히 그런 출발선을 바라보며 부러움 섞인 시선을 던진다.
“저 정도 조건을 쥐고 태어났다면, 인생에서 실패하는 게 더 어렵지 않겠는가?”
하지만 경영의 냉혹한 세계에서 질문을 뒤집어보자.
모두가 올려다보는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도대체 자신만의 다음 등반 코스는 어디에 있는가?
남들보다 훨씬 앞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세상의 너그러운 박수를 보장하지 않는다. 조금만 잘해도 ‘선대 덕분’이라는 평가가 따라붙고, 삐끗하면 ‘물려받은 기업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가혹한 비판이 쏟아진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왕관을 쓴 자에게, 애초에 ‘본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할아버지 정주영은 거북선 지폐 한 장으로 현대라는 기적을 창조했고, 아버지 정몽구는 타협 없는 품질로 현대차를 세계의 반열에 올렸다. 두 거인이 이미 한국 산업사에 가장 거대한 두 개의 봉우리를 완성해 놓았다면, 3세대 계승자는 어디까지 올라가야 비로소 온전한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
어린 시절의 정의선이 자신의 가문과 그 이름의 무게를 처음 온전히 인식했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남들이 쉽게 가질 수 없는 조건을 갖추고 출발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산업사를 대표하는 두 성공 모델과 끊임없이 비교되어야 하는 부담도 있었을지 모른다.
이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국 산업사에 거대한 이름을 남겼다면, 그는 자신의 시대에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현대차그룹의 중요한 현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정의선 회장이 원로 경영인에게 “할아버지였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라는 취지의 질문을 던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 질문은 정의선이라는 경영자가 놓인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앞에는 조부인 아산 정주영 창업주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부친인 정몽구 명예회장이라는 강력한 경영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한국 산업사와 현대차그룹의 역사에서 쉽게 넘어서기 힘든 거대한 산과도 같은 존재다.
정의선은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복초등학교와 압구정중학교, 휘문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서 공부했고,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밟았다. 국내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해외에서 수학하며 기업과 시장을 보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기회를 얻었다. 그의 성장 과정에서 눈여겨볼 점은 단순히 어느 학교를 거쳤는가가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가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국내외에서 공부하며 다양한 경영 환경을 접했고, 훗날 글로벌 기업을 이끌기 위한 시야를 넓혀갔다. 이후 실제 경영 현장에 들어선 뒤에는 기존의 방식만을 정답으로 삼기보다 새로운 시장과 인재,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경영 방식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더 어려운 문제는 따로 있다. 정주영 창업주라면 어떻게 판단했을지를 묻는 것과, 정주영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인공지능과 로보틱스의 시대에 자신이 무엇을 결단해야 하는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질문이라는 점이다.
정주영은 자본도 기술도 충분하지 않았던 시대에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문을 열었다. 안 되는 이유를 찾기보다 어떻게든 가능하게 만들 방법을 먼저 고민했다. 널리 알려진 “해봤어?”라는 한마디는 그러한 불굴의 도전과 과감한 실행력을 상징한다. 정몽구는 그 기반을 세계적인 자동차그룹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품질과 제조 경쟁력에 모든 것을 걸었다. 자동차 한 대의 사소한 결함이 브랜드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린다는 절박함으로 품질을 개선했고, 현대차와 기아가 글로벌 시장에서 유수의 브랜드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단단한 기초 체력을 완성했다.
정주영이 도전과 실행을 남겼고, 정몽구가 품질과 글로벌화를 남겼다면, 과연 정의선은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이 바카라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정의선이 그룹 경영의 중심에 섰을 때 현대차그룹은 이미 세계적인 자동차그룹으로 우뚝 서 있었다. 세계 주요 거점에 생산기지가 포진해 있었고, 현대차와 기아는 글로벌 시장에서 강한 브랜드 기반을 구축해왔으며, 반세기 동안 축적된 제조 노하우와 글로벌 공급망도 갖추고 있었다. 최근 수년간 글로벌 완성차 판매에서도 3위권 규모를 유지해왔다.
겉으로만 보면 단단한 기반을 물려받은 후계자의 순탄한 출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기업을 일구는 일도 어렵지만, 이미 거대하게 성공한 기업을 새로운 시대로 옮겨놓는 일 역시 그에 못지않게 어려운 과제다. 성공한 조직에는 자본과 기술만 쌓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로 이 방식으로 승리해왔다”는 강한 성공의 확신도 함께 축적된다. 그 방식이 수십 년 동안 눈부신 성과를 만들어냈을수록 조직은 기존의 성공 공식에 더 강하게 의존하기 쉽다. 문제는 세상의 환경이 완전히 바뀐 뒤에도 그 믿음이 쉽게 깨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나 역시 삼성에서 30년 동안 다양한 조직과 인재를 지켜보며 비슷한 장면을 여러 번 경험했다. 조직이 큰 성공을 거둘수록 사람들은 그 성공을 만들어낸 방식에 강한 믿음을 갖게 된다. 실제로 잘해왔기 때문에 그 믿음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문제는 환경이 바뀐 뒤에도 과거의 성공 방식을 그대로 붙들고 있을 때 생긴다. 새로운 방식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고, 기존 방식은 이미 수많은 성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변화를 선택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그래서 기업에서 진짜 어려운 결정은 실패한 것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아직 잘되고 있는 것을 언제 바꾸기 시작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실패보다 과거의 성공이 훨씬 더 위험하다.
과거에 회사를 번영으로 이끌었던 바로 그 성공 방식이 미래의 변화를 가로막는 단단한 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고전 『주역』은 세상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순환하고 변화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하나의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쉼 없는 변화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태어난다는 통찰이다. 기업의 생로병사도 다르지 않다.
오늘의 성공 공식이 내일의 시장에서도 그대로 통할 것인가?
오히려 한 시대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던 방식일수록,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정의선이 넘어서야 했던 대상은 글로벌 경쟁사들만이 아니었다. 현대차그룹을 정상으로 이끌었던 과거의 성공 방식 가운데 무엇을 끝까지 지키고, 무엇을 새로운 시대의 방식으로 재해석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일 자체가 가장 어려운 경영 과제였다.
그렇다고 정의선이 선대의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복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과거 공개 인터뷰에서 학창 시절 조부 정주영으로부터 “시류를 잘 읽어야 한다”는 취지의 가르침을 깊이 새겼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 말을 단순히 유행을 뒤쫓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변화의 물줄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예민하게 살피고, 환경이 바뀌면 스스로도 과감하게 달라질 준비를 하라는 가르침으로 보아야 한다.
정의선의 초기 경영 행보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기아의 경영을 맡았던 시절, 그는 디자인을 단순한 외형이 아닌 브랜드 정체성을 결정짓는 핵심 경쟁축으로 끌어올렸다. 외부의 세계적인 전문성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선택도 주저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피터 슈라이어의 영입이다. 이는 외부의 전문성을 적극적으로 수혈해 기아의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고 브랜드 위상을 끌어올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정의선식 경영의 뚜렷한 특징 하나가 드러난다. 모든 해답을 리더 혼자 독점하려 애쓰기보다, 조직의 부족한 역량을 메워줄 최고 수준의 전문가를 찾아내고 그들의 전문성을 존중하며 명확한 역할과 권한을 맡기는 방식이다. 정주영의 “해봤어?”가 불가능해 보이는 벽에 온몸으로 부딪히는 저돌적인 돌파를 상징한다면, 정의선의 경영에서는 전문가들의 분석을 경청하고 실현 가능성을 확인한 뒤 실행에 옮기는 방식이 돋보인다. 공개된 그의 리더십 일화에서 “그럼 해보죠”라는 담백한 결정이 회자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도전의 정신은 계승하되,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은 달라진 것이다.
진정한 계승은 선대의 방식을 그대로 복사하는 일이 아니다. 선대가 지키고자 했던 본원적 가치를 자기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다시 구현해내는 일이다.
새만금에서 마주한 할아버지의 이름
그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 2026년 2월 새만금에서 있었다. 전북 군산 새만금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새만금 로봇·수소·AI시티 투자협약식’ 자리였다. 현대차그룹의 대규모 미래 투자 계획이 발표되던 가운데, 축사에 나선 이재명 대통령은 정의선 회장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와 국민이 함께 키워낸 현대차그룹이 새만금에 대대적 투자를 시작한다. 정주영 회장님께서도 자랑스러워 하실 것.”
이 대통령이 실제 행사에서 한 발언이다. 당시 현대차그룹은 새만금에 AI 데이터센터와 로봇 제조 공장 등 첨단 산업 인프라를 구축하는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공식 행사장에서 대통령의 입을 통해 할아버지의 이름이 나온 순간이었다.
나는 그 장면이 꽤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아무리 세계적인 자동차그룹을 이끄는 회장이라도, 할아버지의 이름 앞에서는 잠시 손자로 돌아갈 수 있구나.
정의선에게 정주영은 역사바카라 속에 남아 있는 ‘현대의 창업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의선은 고등학교 시절 약 3년 동안 청운동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이른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고 공개적으로 회고한 바 있다. 그 식탁은 단순히 끼니를 함께하는 자리가 아니라, 시류를 읽는 눈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배우는 밥상머리 교육의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기업인 정주영 이전에, 정의선에게는 같은 집에서 아침 식탁을 마주하며 삶과 경영의 태도를 배웠던 할아버지였던 셈이다.
그렇기에 대통령의 입에서 정주영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정의선 회장의 표정이 잠시 달라지는 모습은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그 짧은 순간에 정확히 어떤 감정이 오갔는지는 당사자만이 알 것이다. 다만 할아버지를 향한 존경과 자부심, 그리고 이제는 직접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떠올리는 손자의 마음이 함께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장면의 무대가 새만금이었다는 점이다. 정주영의 시대는 대한민국이 산업의 물리적 기반을 빠르게 넓혀가던 시대였다. 도로와 조선소를 만들고,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고, 해외 건설시장으로 나아가며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던 사업에 도전했다. 정의선이 마주한 시대의 과제는 다르다. 이제 경쟁의 중심에는 AI와 로봇, 소프트웨어와 수소, 데이터와 미래 모빌리티가 들어오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새만금에 AI 데이터센터와 로봇 제조 기반, 수소·에너지 인프라 등을 구축하는 약 9조 원 규모의 투자를 단계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새만금은 정주영이 간척사업을 벌였던 서산과는 다른 곳이다. 그러나 그날의 장면이 주는 상징성은 분명했다. 선대가 자신의 시대에 새로운 산업의 길을 열었다면, 이제 손자 세대는 전혀 다른 기술과 환경 속에서 또 다른 길을 만들어야 한다. 세대는 달라졌지만 경영자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닮아 있다.
이미 닦여 있는 길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길을 스스로 만들 것인가?
나는 이 장면을 보며 계승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선대의 업적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대가 남긴 정신과 자산 가운데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분별하고, 그것을 자기 시대의 강점으로 어떻게 다시 만들어낼 것인가이다. 정주영이 자신의 시대에 아무도 가보지 않은 사업의 길을 열었다면, 정의선은 지금 AI와 로봇, 미래 모빌리티라는 또 다른 길을 열어가려 하고 있다.
어쩌면 그날 잠시 달라진 정의선 회장의 표정에는 할아버지를 떠올린 손자의 마음과 함께, 이제 자신이 다음 시대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3세대 경영자의 바카라임감이 겹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지점에서 승계는 비로소 경영이 된다.
정의선이 그룹의 지휘봉을 넘겨받아가던 시기, 글로벌 자동차 산업에서는 바로 그러한 근본적인 재해석을 요구하는 대격변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완성차 기업의 경쟁력은 엔진과 변속기, 차체 강성과 조립 정밀도를 얼마나 완벽하게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더 강력한 엔진을 설계하고 생산라인의 효율을 극대화하며, 부품의 불량률을 제로에 가깝게 줄이는 것이 승리의 공식이었다.
그런데 경쟁의 룰 자체가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동화와 배터리 기술이 급속도로 성숙했고, 소프트웨어가 차량의 주행 성능과 탑승자의 디지털 경험을 좌우하는 비중이 크게 커졌다. 자동차는 더 이상 단순한 기계장치로만 정의하기 어려운 이동형 컴퓨터로 변모하고 있다. 차량은 클라우드 네트워크와 연결되고, 출고된 이후에도 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OTA)를 통해 기능이 개선되며, 인공지능은 운전자와 차량의 상호작용 방식을 바꾸고 있다.
경쟁자들도 달라졌다. 토요타, 폭스바겐, GM 같은 전통적인 자동차 기업들만 주시하면 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테슬라는 자동차 산업에서 소프트웨어와 데이터의 중요성을 크게 부각시켰고, 거대한 내수시장과 강력한 배터리 공급망을 등에 업은 중국 전기차 기업들은 가격 경쟁력과 빠른 기술 개발 속도로 글로벌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반도체와 운영체제, 생성형 AI와 클라우드 인프라를 장악한 글로벌 기술기업들 역시 모빌리티 생태계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하드웨어 제조사와 소프트웨어 테크 기업 사이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텔의 전설적인 경영자 앤디 그로브(Andy Grove)는 산업의 기본 규칙과 경쟁 구도가 통째로 뒤바뀌는 이러한 결정적 국면을 ‘전략적 변곡점(Strategic Inflection Poin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전략적 변곡점이 위험한 이유는 위기가 처음에는 위기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데 있다. 공장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자동차는 계속 팔리며, 매출과 이익도 양호하게 나타날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브랜드 자산도 굳건해 보인다. 그렇다면 거대한 조직 내부에서 “지금도 이렇게 돈을 잘 벌고 있는데, 왜 굳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멀쩡한 회사를 뒤흔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한번 당신이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보자. 회사는 세계 시장에서 자동차를 아주 잘 팔고 있다. 공장은 쉼 없이 돌아가고 있고, 수많은 협력업체와 직원들의 삶이 이 회사에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 수익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전기차와 소프트웨어, 자율주행과 로봇에 수조 원의 자본을 먼저 투자하라는 보고서가 바카라상 위에 올라온다. 지금의 성공을 지키는 것이 훨씬 안전해 보인다. 그러나 몇 년 뒤 산업의 중심이 완전히 바뀐다면, 그때 움직여서는 너무 늦을 수도 있다.
당신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기술과 고객의 눈높이, 새로운 경쟁자의 위협이 임계점을 넘어가는 순간 과거의 성공 방정식은 미래의 변화를 가로막는 족쇄로 바뀔 수 있다. 문제는 그 변화가 만천하에 명백하게 드러난 뒤에 급하게 따라가면, 이미 주도권을 상당 부분 빼앗긴 뒤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의선 시대의 현대차그룹이 경영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차그룹은 경영난에 빠져 법정관리를 받던 부실기업이 아니다. 현금 창출력과 글로벌 생산 및 판매망을 갖춘 세계적인 완성차그룹이다. 따라서 잘 작동하고 있는 거대 조직을 향해 변화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기존 경쟁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미래 역량을 강화하는 일은 위기에 빠진 기업을 구조조정하는 것과는 또 다른 고난도의 리더십을 요구한다.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는 여전히 현대차그룹의 중요한 수익 기반이자 핵심 사업이다. 오랜 시간 쌓아온 엔지니어링 역량과 글로벌 공급망 역시 하루아침에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의 경쟁축은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전동화와 SDV, 자율주행은 물론이고 이제는 피지컬 AI와 로보틱스까지 새로운 경쟁 영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따라서 정의선에게 주어진 과제는 단순히 “현대차가 지금 자동차를 잘 팔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데 그칠 수 없다.
“지금의 현대차를 성공으로 이끈 자산 가운데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무엇을 과감히 바꾸어야 하는가? 그리고 다음 시대를 위해 무엇을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가?”
바로 이 질문의 교차로에서 정의선 시대의 수많은 전략적 결단이 시작된다.
현대차그룹은 전용 전기차 플랫폼 E-GMP에 선제적으로 투자했고, 그룹의 전 조직을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변화를 추진해왔다.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하며 미래 로보틱스 역량을 확보했고, 자율주행과 AI 영역에서는 글로벌 기술기업들과 협력의 폭을 넓혀왔다. 수소 에너지 역시 장기적인 미래 모빌리티와 에너지 전략의 한 축으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이 가상 세계를 넘어 자동차와 로봇, 공장이라는 물리적 실체와 융합하는 ‘피지컬 AI(Physical AI)’를 중요한 미래 승부처로 제시하고 있다.
이 모든 퍼즐을 단편적으로 바라보면 전기차 투자, 소프트웨어 개발, 로봇 인수, AI 제휴의 나열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조망하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기술 생태계가 드러난다. 자동차 안에서 소프트웨어가 작동하고 그 위에 인공지능이 결합된다. 지능화된 AI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로봇의 두뇌로도 확장될 수 있다. 로봇은 다시 스마트 팩토리에서 자동차의 생산과 물류를 지원하고, 제조 현장에서 얻은 데이터는 AI와 로봇의 학습과 검증에 활용될 수 있다. 자동차와 로봇, 소프트웨어와 공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기술 순환 구조를 만들어갈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비즈니스의 가장 불편한 본질적 의문을 던져야 한다.
만약 정의선이 너무 일찍,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미래를 먼저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어 미래에 반드시 거대한 시장이 열릴 기술을 정확히 알아봤다고 해보자. 문제는 그 시장이 3년 뒤에 열릴지, 10년 뒤에 열릴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데 있다. 너무 늦게 뛰어들면 주도권을 빼앗긴다. 반대로 너무 일찍 뛰어들면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릴 때까지 막대한 투자비와 적자를 홀로 견뎌내야 한다. 방향을 맞히고도 타이밍 때문에 실패할 수 있는 것이 경영의 냉엄한 현실이다.
미래의 방향을 남보다 먼저 읽는 것과, 그 미래에 자본을 너무 일찍 쏟아붓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리스크다.
가령 경영회의가 끝나갈 무렵 두 장의 보고서가 당신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보자. 한쪽에는 지금 가장 잘 팔리는 자동차의 생산성과 수익성을 더 높이자는 계획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아직 돈이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자율주행차와 소프트웨어, AI와 로보틱스에 막대한 자본을 먼저 투자하자는 제안이 있다. 어느 쪽도 틀렸다고 단정할 수 없다. 더 어려운 것은 둘 다 옳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최고경영자가 해야 할 일은 정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아직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먼저 바카라임질 선택을 하는 일이다.
회사의 자본과 인재는 무한하지 않다. 가령 오늘 1조 원을 한쪽에 쓰면 다른 곳에는 그만큼 쓰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 최고경영자의 전략이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인 동시에, 무엇을 당장은 하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의선 회장이 마주한 시험의 본질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라는 현실의 수익 기반을 지키면서 동시에 전기차와 SDV, AI와 로보틱스라는 미래의 경쟁력을 만들어내야 한다. 기존 공장의 생산성을 높이면서도 새로운 스마트 제조 패러다임을 함께 구축해야 한다. 현대차와 기아의 볼륨 경쟁력을 지켜내는 동시에 제네시스라는 프리미엄 브랜드의 위상도 더 높여야 한다.
오늘의 곳간을 지키면서 내일의 씨앗을 뿌리는 일.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만, 수십만 명의 임직원과 전 세계 공급망이 연결된 거대 조직에서 이를 동시에 실행하는 것은 고도의 균형 감각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왜, 지금 정의선인가? 그가 모든 문제의 완벽한 정답을 손에 쥔 완성형 리더이기 때문인가? 오히려 그 반대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시대, 아직 명확한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대전환의 한가운데에서 길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질서는 근본부터 재편되고 있으며, 전통 제조업과 첨단 기술산업 사이의 경계도 빠르게 흐려지고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조차 소프트웨어와 AI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앞에서 자신들의 경쟁력을 다시 증명해야 한다. 정의선은 바로 그 거대한 전환의 한가운데에서 현대차그룹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그의 전략적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한 기업인의 행보를 넘어 우리 시대의 기업들이 마주한 본질적인 질문들과 만나게 된다. 성공한 조직은 어떻게 스스로의 관성을 깨뜨려야 하는가? 선대가 물려준 거대한 유산 가운데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과감히 바꾸어야 하는가? 안개가 자욱한 불확실성 속에서 자원과 자본을 어디에 먼저 투자해야 하는가?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없을 때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연대해야 하는가? 최고의 글로벌 인재를 어떻게 발탁하고 그들에게 어디까지 권한을 맡겨야 하는가? 그리고 기술이 아무리 빠르게 진화하더라도 경영자가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이 바카라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현실적이고 치열한 해답을 찾아가는 탐색의 과정이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정말 거대한 기업을 물려받는 것은 축복이기만 할까? 물론 남들이 갖기 어려운 자본과 인재, 브랜드와 기회를 처음부터 손에 쥔다. 그러나 동시에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기업의 역사와 수많은 직원의 미래, 그리고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선택의 바카라임도 함께 넘겨받는다. 물려받은 것이 클수록 지켜야 할 것도 많고, 바꾸어야 할 것을 결정하는 부담도 커진다.
정의선에게는 정주영 창업주가 남긴 개척정신이 있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남긴 품질과 제조 경쟁력이라는 단단한 기반도 있다. 그러나 그 유산들이 정의선의 시대를 저절로 열어주지는 않는다.
선대 유산은 출발점일 뿐 결코 도착점이 될 수 없다.
정주영이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새로운 산업의 길을 열고, 정몽구가 품질과 제조 경쟁력으로 세계 시장을 개척했다면, 이제 정의선은 전동화와 자율주행차, 소프트웨어와 인공지능, 로봇이 자동차의 미래를 바꾸는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기 앞에 서 있다.
세 사람의 시대는 달랐고 마주한 문제도 달랐다. 그러나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 앞에서 지도에 없는 새로운 길을 찾아내야 한다는 경영자의 본질적 과제만큼은 닮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정의선은 선대가 일군 거대한 영토를 수성하는 데 안주하는 상속인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 유산을 디딤돌 삼아 새로운 시대의 경쟁력을 창조해내는 야성적 개척자가 될 것인가? 그 답은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라 앞으로 현대차그룹이 증명해낼 실제 성과와 선택에 달려 있다.
정의선의 도전은 현대차그룹의 미래를 넘어, 대한민국 제조업이 다음 시대에도 세계의 중심에서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험대다.
정의선 회장의 진짜 도전과 증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결정적인 승부는 바로 지금부터다.
바카라 제목 :『정의선의 도전 리더십과 성공 전략』
대한민국 3세대 경영자 시리즈 제1권
서문. 승계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라
1장. 왜, 지금 정의선인가?
2장. 현대차를 만든 두 거인, 정주영과 정몽구
에피소드 1. 뚝심에서 혁신으로
(중략)
4장. 기아에서 시작된 정의선의 첫 번째 승부
에피소드 2. “그럼, 해보죠”
(중략)
9장. 왜 정의선은 로봇에 베팅했는가?
10장. 정의선의 다음 승부수, Physical AI
에피소드 7. 정의선의 글로벌 AI 동맹
(중략)
14장. 정의선의 경영 철학
15장. 사람을 얻는 정의선의 인사 철학
에피소드 11.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정의선
(중략)
19장. 정의선의 3대 도전 과제와 돌파 전략
20장. 현대차여, 창도전진(創道前進)하라
21장. 정의선에게 배우는 10가지 성공 전략
성공전략 01. 초심을 기억하라
성공전략 05. 최고의 사람을 데려와 맡겨라
(중략)
성공전략 10. 자신의 시대를 만들어라
정의선 회장님께 드리는 감사의 말씀
저자소개
김용년 (Kim Yongnyeon)
삼성에서 30년간 기업 경영과 글로벌 인재 육성의 현장을 경험한 경영 저술가이자 작가. 삼성물산에서 인사, 전략, 해외 사업을 담당했고, 삼성장학회에서 20년간 글로벌 장학사업을 총괄하는 임원으로 일하며 하버드, MIT, 스탠퍼드, 옥스퍼드 등 세계 유수 대학의 우수 인재 1,000명 이상의 선발과 성장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공학·자연과학 분야 연구 논문을 읽고 석·박사 연구자들과 교류하며 사람의 역량과 첨단 기술이 결합해 혁신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 기술 자체를 해설하기보다, 리더가 어떤 인재를 선택하고 어떤 조직을 만들며 어떤 미래에 자원을 배분하는지를 경영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국내외에서 20권의 바카라을 출간하며 저술 활동을 이어왔다. 대표작으로 『성장을 위한 마음 편지』, 『노력형 천재들의 공부법』이 있으며 아마존(Amazon)을 통해 영문 도서를 출간했다. 현재 동서양 고전의 지혜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주요 기업들의 변화와 도전을 독립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에서 조명하는 『대한민국 3세대 경영자 시리즈』를 기획해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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