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옷 고민과 뜻밖의 물물교환
이미 필요한 만큼의 옷이 있지 않나 싶지만, 올여름에는 유독 옷 고민을 많이 했다. 어쩐지 강연과 북토크라는 외부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놓으니 남 앞에 나서서 그럴듯한 얘기를 할 기회가 많은 사람처럼 보이는군. 하지만 실상은 좀처럼 없는 일이 운 좋게 연달아 일어났을 뿐이다.
어쨌거나 대중을 만날 기회라는 게 좀처럼 없다 보니 어느 정도로 옷을 차려 입어야 하나 감이 오지 않았다. 아주 정장으로 빼입으면 별것도 아닌 사람이 굳이 무리해서 꾸며입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티셔츠나 셔츠만 입었다간 자리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무바카라임한 인간으로 보일 것 같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청바지에 무지 반팔 티만 입었어도 상관없었을 것 같으나 해보기 전에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스러웠다.
그래서 늘 그렇듯 중고 장터를 뒤적이고 또 뒤적였다. 옷을 찾는데 왜 중고 장터부터 뒤적인단 말인가? 이유 첫 번째는 신품 옷을 사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원래 중고거래에 익숙하니 익숙한 방식으로 환경에 해를 덜 끼치고 살아보자는 개인적 프로젝트다. 덕분에 신품 옷을 산지 벌써 662일이 되었다. 이유 두 번째는 물론 돈이다. 당장 옷 한 벌 살 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고 상품이라는 이유로 아쉬움을 느끼는 성격이 아니니 당연히 더 저렴한 중고를 알아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검색을 며칠 한 끝에, 여름에 입어도 될만큼 얇고 가볍고 적당히 격식도 있어보이는 블레이저를 구입했다. 그런데 아뿔싸, 도착한 것을 입어보니 사이즈가 커서 소매도 길고 품도 어벙해 보였다. 소매를 걷고 단추를 풀면 그나마 봐줄만 하긴 한데, 쌀쌀하다 싶어 소매를 내릴 때마다 다시 어벙해지는 게 싫어서 한 사이즈 작은 것을 다시 찾아 구입했다.
그렇게 마침내 무엇을 걸칠까 하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줄 알았으나…… 새로 온 블레이저를 보니 아뿔싸, 사이즈는 딱인데 이건 또 안감이 붙은 간절기용이 아닌가. 사진으로는 여름용과 똑같아보였는데 실수였다. 어지간해서는 중고 의류 구매에 실패하지 않는 나로서는 드문 일이다.
그래서 계절에 맞지만 사이즈가 안 맞는 블레이저와 계절에 안 맞지만 사이즈가 맞는 블레이저 두 벌을 가진, 삶의 부조리함을 직접 증명하는 꼬락서니가 되었으니, 둘다 갖고 살 순 없는터라 여름용을 다시 장터에 내놓아 팔았다. 격식을 차리자고 입는 옷을 크게 입을 순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이후로 바로 그 여름용 블레이저를 마음에 드는 값에 다시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매물도 적고 사이즈도 적합한 게 없었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블레이저는 좋든 싫든 입을 일이 생기는 기본적인 옷이니 어지간히 체형이 크게 변하지 않는 이상 굳이 싼값에 처분할 이유가 없다. 생필품이 중고장터에 잘 나오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나는 결국 블레이저를 포기하고 행사에는 두 번 다 셔츠 차림으로 갔다. 고민이 무색하게도 마침 지독한 폭염 기간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편하게 입었으므로 옷깃이 있는 셔츠 차림이면 상당히 격식이 있는 옷차림이었다. 하여간 절대 없으면 안 되는 게 아닌 것은 안 사도 어떻게든 되는 모양이다.
(마음에 드는 옷은 구하기 힘들다. 중고로는 더욱.)
고비 아닌 고비를 넘긴 뒤에는 중고로 속건 티셔츠를 찾는 데에 혈안이 되었다. 지독한 날씨 탓에 옷을 자주 갈아입다 보니 얇고 빨리 마르는 티셔츠가 연일 부족해진 탓이다. 그러나 신품 옷을 사지 않기로 작정한 터라 어떤 티셔츠를 사야하는지 알면서도 한참이나 중고장터를 뒤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쯤되면 대단한 효과도 없으면서 편한 길을 괜히 돌아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신념이 불편을 동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쨌거나 검색 끝에 당근에서 운 좋게 찾고 있던 브랜드의 티셔츠, 심지어 사이즈도 맞는 것을 세트로 발견했다. 그런데 거래를 하려고 보니 당근의 시스템상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었다. 판매자는 네 벌을 한 묶음으로 올리면서 한 벌당 가격을 써놨고, 나는 그중 세 벌만 필요했으며, 거리가 멀어 바로구매(당근의 공식 택배 거래)는 가능한데 채팅 문의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경우 채팅을 하려면 바로구매부터 진행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결국 판매자를 성가시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구매를 누르고 채팅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데 잠시 후 대화를 나눠보니…… 이런 인연이 있나. 얼마 전 내게서 블레이저를 사간 사람이었다. 그는 잘 입고 있다며 흔쾌히 내가 요청하는 대로 거래를 진행해줬고, 나는 다다음날 새것같은 중고 티셔츠를 받아서 입을 수 있었다. 사이즈 맞추기에 실패해서 헛수고가 되어버린 거래가 돌고돌아 시간차 물물교환의 상품이 된 셈이다. 아마 나를 비롯한 세 명의 거래자가 문제 있는 상품을 팔았거나 거래 매너가 좋지 않았다면 이렇게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로 이어지진 않았으리라. 하여간 세상이 좁다고 흔히 말하지만 중고장터의 세상은 한층 더 좁다는 걸 생각해서라도 매너있는 거래를 해야 할 일이다.
*추신
제10회 온라인카지노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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