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의 얼굴이 간신히 끌고가는 마블의 복잡함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는 톰 홀랜드가 연기한 스파이더맨 시리즈 최신작으로, 전편에서 터무니없는 난리통을 겪은 끝에 세상에서 자신의 기억이 사라진 피터 파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슈퍼히어로로서의 아버지인 토니 스타크도 없고, 보호자인 메이 큰엄마도 없고, 친구도 내가 다가가 볼 수 있을뿐 나는 낯선사람에 불과한 사고무친의 인생이죠. 스파이더맨은 불행해야 재미있다지만 너무한 상황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이렇게 스파이더맨을 몰아세운 설정에 불만이 많습니다. 악당의 계략에 빠져서가 아니라 악당이 정체를 폭로한 상황을 해결하려던 마법사가 삐끗해서 이렇게 되었다니. 재난의 원인을 캐릭터의 실수에 두는 건 좋은 방법이지만, 토니 스타크가 울트론을 만든 것처럼 이상과 현실이 어긋났다거나 수단에 문제가 있었다는 게 아니라 ‘마법 쓰다 헷갈려서’는 그닥 납득할 수 있는 포석 같지 않았습니다. ‘마법 실수로 일어난 우당탕탕 대소동은 만화나 드라마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에 들어가는 외전격 이야기죠. 캐릭터 하나가 슬롯적으로 사망하는 지옥문을 여는 계기가 아니라.
아무튼 피터는 여전히 스파이더맨으로 활약하면서 친구들 곁을 은근히 맴돌게 됩니다. 그러다 초능력자 혹은 초자연적 존재가 ‘대미지 컨트롤’을 공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참고로 대미지 컨트롤은 어벤저스1로 벌어진 난리통을 수습하고 노획물을 연구하는 기업인데, 스파이더맨 1도 이 기업이 문제의 발단이었던 걸 보면 곱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대미지 컨트롤을 공격한 것은 전차였는데, 안에서 나온 것은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일반인이었습니다. 그 안에 있던 ‘무엇’이 빠져나간 것이죠. 그 존재는 여러 사람을 건너뛰어가며 피터를 도발하고, 피터의 몸도 빼앗으려다 실패합니다.
그와중에 피터는 용기를 내서 MJ를 만나러 가지만 그녀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고, 피터는 지독한 심리적 타격에 시달린 끝에 거미의 힘이 한층 더 각성하여 초감각이 예민해지고 천연 거미줄을 쏠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컨트롤이 어려워져 유전자 억제 장치를 개발하여 억누르게 되죠. 어른이 되는 일의 어려움이랄까요, 성체가 되는 일의 어려움이랄까요.
이어서 초자연적 악은 피터를 도발하고, 피터는 MJ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 과정에서 정체를 드러내고 MJ와 키스를 해보고 그녀가 기억을 되찾은 줄 알지만, 사실은 이미 적이 MJ 머릿속에 들어가 조롱한 것이었습니다. 피터는 결국 유일하게 믿을 만한 애매한 아군인 프랭크의 아지트에 그녀를 맡기죠. 프랭크는 보통 인간이면서 무자비한 방식으로 악과 싸우는 퍼니셔인데, 언제 어떻게 친해진 것인지 알려주는 단서는 퍼니셔가 목숨을 빚졌네 어쩌네 하는 어중간한 대사뿐입니다. 중요 인물을 추가하는 방법으로는 상당히 나쁜 방식이더군요.
그뒤 그 초자연적 힘을 쓰는 적이 바로 ‘진 그레이’라는 걸 알아냅니다. 진 그레이는 분명 엑스맨 시리즈에서 모든 것을 초월하는 힘을 가져서 시리즈 자체를 망친 캐릭터인데 스파이더맨에 왔군요. 너무 무섭습니다. 그래도 여기선 아직 징검다리 건너듯 사람 몸을 건너건너 지배하는 정도인 모양입니다.
진 그레이는 어째선지 또다시 대미지컨트롤을 공격하는데, 이번에는 그 수단으로 헐크를 선택합니다. 헐크는 어벤저스 1편부터 그러더니 또 난리를 일으키는 지독한 골칫거리 아군 취급이더군요. 전에는 배너가 헐크와 접점을 잘 찾아서 이성이 있는 헐크로 사는 것처럼 보여주더니 내팽개치고 원점으로 되돌리다니, 마블에서 손꼽히게 강한 캐릭터를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재난 취급하는 건 너무하지 싶습니다.
이 난리통을 막기 위해 프랭크까지 참전하지만 도리어 조종당하기도 하고 개판이 되나, 스파이더맨이 자기를 위해 개발한 유전자 억제 칩을 진에게 심어서 상황은 일단락됩니다. 진 그레이는 잡혀가고, 피터는 공교로운 실수로 MJ에게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MJ는 당연하게도 알지도 못하는 피터의 마음을 받아주지는 못하지만 네드를 다시 소개하는 등 조금씩 친해질 기미를 보이는데…… 대화중에 대미지컨트롤의 바카라임자인 메츠거가 거짓말로 뭔가를 숨기려 했다는 걸 깨닫고 다시 그를 찾아갑니다.
한편 메츠거는 진을 생체실험에 씁니다. 사실 그는 진의 언니를 잡아다 실험했고, 진은 언니를 찾으려 했던 것이죠. 그녀는 실험 과정에서 언니가 죽었다는 걸 깨닫고 초능력을 대폭발시키고, 일대의 사람이 모두 정지해버립니다.
그리하여 피터는 진을 막기 위해 진이 조종하는 닌자풍 암살조직 더 핸드와 싸우지만 당연히 역부족입니다. 결국 그는 각성한 거미의 힘을 깨워 더 핸드를 물리치고 진을 말립니다. 물론 정신 조종계 능력자와 물리배틀 능력자가 치고박는 전개는 될 수 없는 터라 진이 피터의 마음에 들어가 마음속 메이 큰엄마의 위로를 받고, 피터가 아군이 되어주겠다는 말에 마음을 돌리나…… 이때 마침 프랭크가 진을 저격하는 바람에 피터가 대신 총을 맞고 쓰러집니다. 피터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진을 구해준 것이죠. 당연히 진은 초능력으로 피터를 죽지 않게 응급처치하고, 프랭크는 피터를 병원에 데려가 살리고, 이후 피터는 무사히 살아나 뉴욕 시민들의 응원에 보람을 느끼며 삶의 2막에 돌입한다는 것이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의 내용입니다.
(여전히 마블은 도무지 한 작품만 집중하게 놔두지 않는다)
이번 작품은 그동안 아이언맨의 사이드킥처럼 다뤄진 스파이더맨이 이제 확실히 개별 시리즈의 면모를 띠기 시작했고 연기도 액션도 훌륭해서 대단히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저도 매우 재미있더군요. 다만 만족스럽지는 않은 기분이었습니다. 훌륭하지만 ‘조립식’ 영화의 단점이 영 거슬렸달까요.
일단 줄거리에서도 적었듯이 이놈의 마블 유니버스가 버리지 못하는 고질병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프랭크가 주용한 조력자로 나오지만 어쩌다 나왔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아는 사람은 알 테니까 그냥 그런줄 알고 나중에 뒷이야기 나올 걸 기대하란 식입니다. 주요 대결 상대였던 진 그레이도 나온다는 걸 모르고 보는 동안은 이 강력한 정신계 능력자를 어떻게 상대할까 흥미로웠는데, 정체가 나오고 나니 기대감이 증발했습니다. 엑스맨에서 나온 진 그레이는 특화된 능력을 가진 게 아니라 거의 뭐든 하는 우주적 초능력자라 이야기가 아무렇게나 흘러갈 수 있었기 때문이죠. 기대감의 자리를 채운 것은 어릴 때 친구들이 쓰던 릴레이 소설처럼 맥락이고 뭐고 아무렇게나 튈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습니다. 이것도 작품 외적인 요소인데, 이런 요소에 휘둘리는게 도통 달갑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적과 싸우는 흐름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추락했습니다. 시작은 이리저리 빙의하는 적이 나와서 영화 '다크엔젤‘이 떠올랐죠. 다크엔젤은 덴젤 워싱턴의 1998년작인데, 이 사람 저 사람으로 옮겨다니는 악마를 퇴치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으로 '빙의’의 연출이 거의 스파이더맨과 같습니다. 그래서 스릴러 성격의 두뇌싸움이 거미줄 싸움으로 이어질 걸 기대하게 되었죠. 중간에 적을 고립시키는 장면이 나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진의 능력 때문에 별 쓸모없는 짓이 되었고, 중반에는 상대할 방법이 '무력화‘말고 없다는 걸 이미 뻔히 아는 헐크와의 싸움이 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액션으로는 더 핸드가 보스전이 되고 말았는데, 닌자 팀이 상대인 것치곤 ‘샹치’에서 볼 수 있었던 홍콩 스타일 무술 전투가 나오는 듯 안 나오는 듯 미적지근했습니다. 이만한 조건이면 ‘진짜 잘싸운다’ 싶어 입이 벌어져야 하는데...... 화려하게 그물을 난사하는 장면이 멋있었다는 인상만 남더군요.
그 뒤로 나온 진 그레이 설득은 ‘진짜 적’이 아니라는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넌더리나는 연출이었습니다. 이런 장면이 정석적이니 사용되는 것까진 어쩔 수 없지만 초반에 품은 기대와 정반대로 진행된대다 참신한 면도 없어 완전히 맥이 빠져버리더군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썬더볼츠에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상대를 정체 불명의 심상 공간에서 진솔한 대화로(넌 혼자가 아니야) 위로하는 장면이 나와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스파이더맨에서 또 보게 될 줄이야....... 물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도 나만큼은 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원한 적 없는 능력을 갖게 된 끝에 모든 걸 상실한 피터가 줄 수 있는 위로인 게 맞지만, 스파이더맨을 보러 왔는데 ‘굿 윌 헌팅’을 보게 된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 진심어린 입맞춤이 사랑을 되살린다는 뻔한 전개가 되나 싶었던 것을 뒤엎고 빌런의 입으로 조롱하는 건 설마 싶은 두려움에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그것까지 뻔한 연출이었다면 정말 충격받았겠죠. 대신에 네드는 몸에 익은대로 손인사를 주고받으며 마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듯한 뉘앙스와 감동을 주었으나…… 이것도 어느쪽으로든 해석할 수 있으니 다음을 기대하라는 듯한 느낌이 탐탁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이 이것으로 끝났다면 여운과 해석의 여지가 남아 좋았겠습니다만, 속편이 또 올거라는 걸 아니까 이건 쿠키처럼 속편 티저로 전락한 느낌을 주는 거죠. 여담으로 그놈의 쿠키는 위트도 뭣도 아닌 영문모를 장면이라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액션에 대해서도 잠시 짚었지만, 정말 감탄한 장면은 더 핸드를 정리하는 마지막 순간뿐이었습니다. 그밖에는 강력해보이거나 영리해보이거나 위트있어 보이는 장면이 기억에 남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운 앵글은 돋보였으나 그때문인지 게임 화면처럼 보이는 면이 있었습니다. ‘저걸 어떻게 상대하나’ 싶은 맞수가 없었던 탓도 있겠죠. 물리적으로 헐크가 강하다지만 걸핏하면 끌려나오는 아군이라 스파이더맨 손가락 하나쯤 부러뜨릴 거란 위기감조차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이 모든 단점에도 영화가 매력적이었던 것은, 주연 톰 홀랜드의 연기 덕이었습니다. 원래도 연기 잘 하는 배우였지만 이번에는 그 절절함이 더욱 돋보였습니다. 비통함과 고독감, 그리고 애잔한 희망이 눈빛과 얼굴에 전부 담겨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도연 같은 배우는 각본이 어떻든 영화에 진짜 인간의 삶을 담는다고 하는데, 톰 홀랜드도 그 경지가 되었구나 싶습니다.
아무튼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는 재미있게 볼 만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마블 유니버스의 한 조각이라 어쩔 수 없이 망가진 면이 너무 많았다고 느꼈습니다. 그 자체로 완성적이면 좋겠는데 다른 작품과 자꾸 연결시키니 여기저기 이빨이 빠져 있는 것이죠. 앞으로는 진 그레이를 필두로 엑스맨과 연결시킨다고도 하고 죽은 토니 스타크의 얼굴로 둠스데이가 나온다고도 하는데 기대가 되긴커녕 나날이 불안할뿐입니다. 마블은 고전적 의미의 ‘시네마’를 만들 수 없게 된 걸까요?
*추신
저도 번역과 수필로 참여한 과학소설작가연대*일본SF작가협회의 문집이 펀딩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s://www.aladin.co.kr/m/bookfund/view.aspx?pid=2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