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놈의 심보는 인공지능도 말리지 않았다
저번주에는 분리배출을 하다 레이저 프린터를 주웠다. 집에 복합기가 있지만 요 근래에 들어서 인쇄가 잘 되지 않아 흑백이라도 인쇄할 수단을 마련해두고 싶었던 탓이다. 참고로 이 복합기와는 악연이 매우 깊어서, 정말이지 이 녀석과 별별 싸움을 다 했다. 스캐너를 재조립하기도 하고 무한잉크 키트도 바꿔보고, 안에 떨어진 부품을 줍느라 기울였다가 기판이 침수되어 녹아버린 전선 피복을 따서 재연결하기도 하고...... 그 난리를 치며 고쳐놓은 프린터 노즐이 굳지 않도록 사흘에 한 번씩 수동으로 인쇄를 한 장씩 하기도 했다. 저번주에는 그러고도 흑색이 나오지 않아 노즐에 알코올도 부어보고 온수도 부어보고 닦고 말리고 그야말로 난리부르스를 추었는데, 결국은 흑색을 살리는데에 실패했다. 예전 프린터에는 흑색 없이도 색 조합으로 흑색을 만드는 기능이 있었으나 이번 녀석은 그런 융통성이 없다.
아무튼 버려진 프린터가 멀쩡할 이유는 없으니 일단 노트북을 연결해 인쇄를 시도했다. 인쇄는 되지만 한쪽에 검은 줄이 많이 나오는 증상이 있었다. 토너를 뽑아 보니 과연 한쪽만 지저분하다. 토너 문제일 가능성이 높고, 결과물을 챗gpt와 제미나이에게 보여주니 이건 90퍼센트 이상 토너 교체로 해결할 수 있단다. 나도 레이저 프린터의 주요 부품은 대부분 토너에 있는 것으로 알았으므로 그 조언을 믿고 재생 토너를 주문했다.
그런데 이틀 뒤, 토너를 받고 드디어 인쇄 시스템이 부분적으로나마 복구되었다고 들떴던 나는 절망하고 말았다. 인쇄는 되는데 인쇄물 전체가 거무죽죽하게 나왔던 것이다. 이거 헛돈 쓴 게 아닐까 하는 공포가 몰려왔으나, 아직 ‘재생 토너 이상’이라는 희망이 남았다. 나는 접점을 닦아보고 다음날 시간을 내서 가방에 프린터를 쑤셔넣고, 자전거를 타고 서비스센터로 갔다. 그와중에 자전거 체인이 빠졌다. 일이 잘 된 역사가 없지만 안되려니 이 모양인가 싶었다. 번호표를 뽑은 다음 맨손으로 체인을 다시 끼우고, 화장실에서 손을 닦고 창구로 갔다.
(그동안 프린터와 벌인 개싸움을 추억하며)
수리기사의 진단 결과는 본체 고장이었다. 고치려면 10만 원은 들 판이니 버리는 게 나을 거라는 말에 나는 그러겠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사는 곧바로 폐기 처리를 하겠다며, 그래도 오랫동안 잘 쓰신 거라고 위로해주었다. 물론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으나, 그래도 기기가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말은 사실이든 아니든 내가 순수하게 100퍼센트 헛수고를 한 것만은 아니라는 느낌을 주었다. 알지도 못하던 동물을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장례치러 보내준 듯한 기분이었다. 물건과의 이별에도 어떤 격식이 있으면 좋은 모양이다.
아무튼간에 결국 나는 다시 먹통이 된 복합기와 남고 말았는데, 청소를 하면 잠깐 되는 듯하다 금방 다시 막히는 증상을 내가 해결할 길은 없을 모양이다. 이 지긋지긋하게 정든 프린터의 장례는 어떻게 치를 것인가, 거짓말쟁이 인공지능들과 함께 오래도록 미뤄온 고민을 다시 해야겠다.
*추신
제10회 온라인카지노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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