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한 매력과 모호한 밋밋함 사이
영화 백룸은 2005년생의 젊은 감독 케인 파슨스가 2022년에 제작해서 유튜브에 공개하기 시작한 백룸 시리즈의 극장판이라 할 만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태생이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인터넷에서 발생한 소재를 바탕으로 하며 비디오 게임 ‘포탈’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기에 서브컬쳐 중의 서브컬처라고 할 만합니다. 일반 장르보다 더 폭이 좁은 문법을 따르므로 ‘대체 뭔 이야기야’라고 생각할 만한 작품이라는 말이죠. 그러나 학교나 백화점처럼 사람이 많던 거대 건축물이 텅 빈 모습을 볼 때의 위화감과 은근한 공포감은 분명 도시 문명 슬롯 구성원 다수에게 통할 만한 것이고, 그런 공간 깊은 곳에 괴물이 살며, 이를 거대 기관에서 연구한다는 괴담은 덧붙여볼 만한 살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도 극장에 걸릴수 있었겠죠.
이야기의 씨앗이 된 유튜브 시리즈 1편은 주인공이 우연히 현대 사무실 공간 같은 느낌의 미궁에 떨어져 헤맨다는 파운드 푸티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영화는 이 파운드 푸티지와 미궁 탐험이라는 알맹이를 둘러싼 액자를 공들여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하 스포일러)
이야기의 첫 번째 주인공은 가구점 사장 클락으로, 심리적, 경제적, 관계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건축가가 되고 싶었지만 실패했고, 공부하는 아내를 지원하며 가구 장사를 하지만 장사도 안되고…… 그러던 차에 술을 마시고 돌아와 아내와 싸우고 쫓겨난 것이죠. 그는 가구점에서 숙식하며 심리상담사 메리에게 상담을 받지만 지지부진합니다. 그 와중에 전기 문제로 지하실을 뒤적이다 벽 너머 신비의 공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공간은 사무실 건물을 길게 확장해놓고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만한 가구나 소품을 무작위로 쌓거나 배치해놓은 듯한 곳으로, 끝없는 미로처럼 보입니다. 클락은 이를 탐험하고 상담가 메리에게 이야기하지만 물론 메리는 믿지 않습니다. 클락은 증거를 가져오겠다며 직원 캣과 바비를 불러 탐험과 촬영을 이어가다가 정체 모를 존재의 공격에 모두가 실종됩니다.
여기서 이야기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 메리가 나섭니다. 제정신이 아닌 듯한 클락의 전화를 받고 그를 찾아간 메리는 백룸으로 들어가고, 곧 클락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 상태로, 메리를 포박하고 백룸의 신비와 자기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떠들어댑니다. 그에 따르면 백룸은 공간으로 구성된 기억이며, 이곳에 존재하는 괴물인간은 먹을 수도 있답니다. 그는 메리에게 심리 치료를 강요하지만 메리는 참다 못해 욕을 하며 본성이라 바뀔 수 없다고 하고, 클락은 이에 오히려 안도하고 뒤이어 등장한, 자기 자신이 심상화된 듯한 괴물에게 바뀔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만 괴물은 클락을 뜯어먹어 살해합니다. 메리는 전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방호복을 입은 조사원들에게 구조된 그녀는 A싱크라는 회사의 백룸 연구 시설에서 조사를 받는데, 조사원은 조사 후 그녀가 어찌될지 구체적인 얘기를 들려주지 않고, 영화는 백룸 안에 생성된 메리의 심상화 괴물을 비춰주며 끝납니다.
(익숙하지만 혼자일리 없는 공간의 기괴한 불안 -이해를 돕기 위한 생성형 이미지)
공포영화는 재미가 없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를 갖고 있다는게 공포영화에 대한 개인적 견해인데, 백룸은 영화관에서 혼자 봤다면 그 시간에 했어야 할 다른 일들이 생각났을 것 같았습니다. 재미가 있긴한데 무겁고 해석이 난해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A24풍의 묵직한 인간 관계, 정서 문제를 깔아두는 부분이 심리적으로 피곤한데다 기대와 달랐고, 게다가 다루는 방식이 그다지 재미있을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인물의 문제를 직접 보여주는 게 아니라 문제로 유발된 피폐한 삶과 심리의 양상만 보여주거나, 기억의 단편만 보여줬기 때문이죠. 클락은 아내와의 관계에 문제를 안고 있고 메리는 어머니와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건 알겠는데 그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장면은 없거나 어림짐작만 할 수 있을 정도만 나오니 인물에 이입이 덜 됩니다. 이입이 덜 되니 직접적 공포의 대상이 튀어나오지 않고 백룸의 맛을 살짝 보여주는 데에 치중한 초반이 지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백룸이라는 소재의 공포는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광대한 건축물 내부 공간에 버려졌다는 사실에서 오는 위화감과 불안감에 근간을 두고 있고, 영화에선 여기에 비상식적으로 뒤섞인 물건들과 뭐가 숨어있을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불길한 상상을 자극하는 맛이 추가되었습니다. 영화 초반에 A싱크사의 조사원이 남긴 영상을 삽입해서 잘 알려줬죠. 그러나 그 덕분에 클락이 가구점에서 문제를 겪다 우연히 혼자 백룸을 탐험하는 부분은 필요 이상으로 긴 느낌이었습니다. 어떻게 되든 말든 알 바 아닌 가구점 아저씨가 큰 상호작용이나 갈등 없이 미로를 헤매는 걸 계속 지켜보는게 지속적으로 재미있을 순 없으니까요.
그래도 다행히도 클락이 직원들을 데리고 탐험을 강행하는 부분은 가장 대중적으로 재미를 주는 부분이었습니다. 직원 바비는 여자친구 캣을 두고 영문 모를 불길한 공간에 진입하고, 뭔가를 보고 도망쳐 나왔다가 끌려갑니다. 그를 구하려던 캣과 클락도 결국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고, 관객은 이 과정의 하이라이트를 VHS의 저화질 화면으로 지켜봅니다. 공간에 대한 추리와 불안감, 그리고 미지의 적에 대한 공포가 현장감과 잘 어우러지는 부분이었죠. 게다가 여기서 희생된 직원들은 다소 껄렁하고 나사가 빠진 느낌을 주긴하지만 어쨌거나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고 돈 좀 더 벌자고 휴일에 일하러 나간 직원들이기에 저러다 큰일나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무나 위험에 처한다고 다 공포가 되는 건 아니라는 교훈을 주는 부분이었죠.
클락과 직원들이 사라진 뒤 클락을 찾으러 가는 메리가 주인공으로 나선 부분부터는 A24의 고유한 맛이 우러났습니다. 이 부분이 가장 개성적인 동시에 대중성과 멀어보였는데, 그 맛은 포박된 메리가 심리 치료를 강요당하는 장면에서 가장 강해졌습니다. 이 공간이 ‘기억’이라는 설명은 대단히 알듯말듯한 느낌이었고, 어쩐지 클락의 하수인이 된 이 세계의 괴물들은 왜 누구는 해치고 누구는 따르는지, 대체 누구의 기억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백룸 자체만큼이나 모호했죠. 물론 ‘여기는 4차원과 연결된 공간이고, 괴물들은 이곳에서 길을 잃고 4차원 에너지에 노출되어 변화한 인간들이다’ 같은 식의 뻔한 설명이 나왔다면 그건 그것대로 실망스러웠겠지만 형이상학적인 설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좋았을 법했습니다.
한편으로 그 뒤에 이어지는 심리 이야기는 막나가는 느낌이 없지 않았습니다. 메리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심리상담가가 하면 안 될 돌직구를 마구 던져대며 ‘넌 맨날 남탓이고 그모양 그꼴에서 변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분노의 설전이 아니라 클락의 수긍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가 괴물화한 자신에게 변할 필요가 없다고 설득을 시도하다 살해당하며 마지막 파트로 넘어가죠.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백룸은 기억의 공간이고 변화하지 않는 자는 기억이 되어야 하니 분신만 남기고 죽어야 마땅한 것일까요? 아니면 클락의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이 탐욕과 분노에 찬 존재였기 때문일까요?
이어지는 메리와 괴물의 추격전은 A싱크라는 허구와 현실의 가교 같은 집단으로 이어지는 과정인 동시에 다시 이 영화를 대중적인 맛으로 포장하는데, 백룸의 불합리한 공간들이 주는 공포와 식인 괴물의 추격이 주는 공포의 맛이 훌륭했습니다. 여기서 정서적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비춰진 메리의 어머니의 손도장 시멘트 덩어리로 괴물에게 타격을 입히는 장면은 살기 위해선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 같기도 하더군요. 다만 당신을 어떡할지는 나도 모른다는 A싱크 연구원의 답변 이후에 메리를 닮은 괴물을 비춰주며 영화가 끝난 것을 생각해보면 인간의 심층 심리는 뒤죽박죽이 된 기억 속에서 트라우마를 안고 영원히 헤맬 수밖에 없다는 게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궁리해서 생각해본들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대단히 강하게 들기도 합니다. 백룸의 공간만큼이나 불분명하고 아리송한 힌트만 조금씩 주어졌기 때문이죠. 그냥 소재 위에 생각나는 대로 그럴듯한 설정을 덧붙여 놓은 것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모호함은 엉성함의 흔적일 수도 있겠죠. 아무튼 도저히 뭔소린지 하나도 못알아먹겠다는 수준까지는 가지 않아 다행이지만, 이 정도로 모호하게만 만들 필요는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공간과 사건은 좀 몰라도 되지만 인물을 모르면 이야기가 되기 어려우니까요. 속편이 나온다는 얘기가 있던데…… 기대가 되기도, 안 되기도 합니다.
*추신
제10회 온라인카지노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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