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호러에 신문물 한 스푼
흙으로 빚은 아이는 대만 호러 영화로, 저로서는 꽤 오랜만에 보는 해외의 동양풍 호러였습니다. 재미있다는 소리를 듣고 본 것도 아니고 감독이나 배우를 알고 본 것도 아니라 기대감이 전혀 없었는데, 전혀 모르고 들어간 식당에서 적당히 색다르고 맛있는 식사를 한 듯한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이하 스포일러)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주인공 쉬추안은 게임 개발사에서 vr게임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게임도 아니고 ‘아미티빌 호러’같은 의문의 살인사건을 알린다는 목적으로 실제 사건 현장을 정밀하게 스캔해서 만든 게임이죠. 가족이 얽힌 살인사건을 게임화한다는 걸 유가족이 동의할 수 있나 싶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장소의 저주가 압도적이라 조사원들이 사고를 당하고, 현장에서 발견한 점토 인형을 집에 가져온 쉬추안은 이상 현상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 이상 현상도 흔히 볼 수 있는 폴터가이스트류면 좋겠는데, 하필이면 임신한 아내가 귀신에 빙의당한 징후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쉬추안은 수소문 끝에 퇴마사를 찾아서 애걸한 끝에 겨우 아내를 보이고, 퇴마사의 활약으로 사건의 발단을 알게 됩니다. 그 인형은 과거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여성이 유산한 아이를 넣어 빚은 물건으로, 강력한 원혼의 매개가 되었던 것이죠. 아내의 몸을 완전히 빼앗기 전에 사건 현장으로 가서 퇴마를 해야 하는데, 이때 일손이 부족합니다. 두 명이 현장을 봐야 하는데 차에서 빙의된 아내의 상태도 지켜 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인공은 차에서 VR 게임을 이용해서 아내와 현장을 동시에 본다는 묘수를 짜내지만, 여차저차한 문제가 터진 끝에 누구 하나는 죽어야 원혼을 쫓을 수 있다는 흔한 상황이 됩니다. 아내를 구할까 아이를 구할까…… 이런 문제는 문제 자체를 우회하는 게 묘수로 이용되곤 하지만 여기선 정석대로 주인공이 희생합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난 뒤에 아내는 아이를 키우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데…… 마치 주인공이 죽지 않은 듯한 분위기가 나는 이유는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VR 공간에서 가상의 쉬추안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죠. 해피엔딩인가 아닌가 근미래를 대하는 가치관을 시험하며 영화는 끝납니다.
대충 적긴 했으나 스토리는 자세히 적어도 엄청나게 참신할 구석이 없었습니다. 게임을 위해 과거 사건 현장을 면밀히 조사하고 VR로 구현한 게 약간의 도움을 줬다는 것 정도가 전체 구조상 색다른 점이었죠. 태아가 들어간 인형이라는 소재도 대단히 충격적이고 잔인하고 음산한 느낌을 줬지만 소재와 설정이라는 정도를 넘지는 않았습니다. 그 기원으로 인해 남다른 전개가 펼쳐졌다면 정말 좋았겠죠.
그렇지만 그저그런 양산형 공포영화로 치부하기엔 그 음산함이 탁월하게 느껴졌습니다. ‘컨저링’같은 서양권 호러 영화가 주는 음산함이 보는 동안 잠깐 무섭고 돌아서면 그만인 것이라면, 이 영화가 주는 음산함은 안개 낀 가을의 찬바람처럼 뼛속까지 스며들어 감기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인물과 배경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도 있겠지만, 소재도 연출도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것들 중에서도 제법 돋보일 만했어요. 특히 빙의로 눈이 바뀌는 연출은 여차하면 저렴한 괴수물로 보일 법한데 생리적으로 공포감을 자극하는 것이었습니다.
(공포의 인형과 VR이라는 소재는 따로놀았다-이해를 돕기 위한 생성형 이미지)
한편으로 퇴마사인 젊은 도사님의 퇴마 연출은 멋있게 힘을 들여 잘 만들었지만 방향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볼거리로 좋았을뿐 음산한 공포와 도통 맞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한자 불꽃이 화면을 수놓는 건 게임이나 액션 영화의 연출법이니까요. 이건 마치 ‘엑소시스트’에서 엑소시즘을 하는데 푸른 성령의 불꽃이 라틴어를 도배하는 듯한 연출이었습니다. 멋진 효과가 잘 보이는 게 꼭 좋은 건 아닌 것이죠. 무서운 것을 다 보여주는 게 미덕이 아니듯 공포에 저항하는 신비도 다 보여주는 게 미덕은 아닌 셈입니다. 이 영화의 원혼이 보여주는 기현상이 건물 전체를 피범벅으로 만들거나 아공간으로 만들거나 부하 괴물들을 소환하는 수준이었다면 어울렸겠습니다만.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를 다른 호러 영화와 차별화하는 지점은 VR이 들어갔다는 점인데, 색다른 한편으로 잘 붙는 감은 없었습니다. 원혼이 가상 세계에도 투사된다거나, 혹은 가상 세계에 저세상의 일부, 과거의 시간이 포착되었다거나 하는 식이면 비중이 좋았을 텐데, 그냥 소품처럼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대신에 엔딩에 가서 묘한 SF적 생각거리를 던져주었죠. 가상현실에 구현된 망자를 종종 만나는 것으로 행복을 채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타인과 이별할 수밖에 없는데, 타인을 사진이나 영상이 아닌, 상호작용 가능한 대상으로 추억하는 것은 이별이 맞을까요 아닐까요? 경험해보지 않아 확답할 수 없으나 추억과 내가 상호작용할 수 있다면 그건 단순 추억이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 나를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아기를 잃은 어머니가 이별을 깨끗이 매듭짓지 못하고 인형을 만든 것이 화근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가상현실로 떠나간 행복을 붙잡는 엔딩은 참신하지만 앞뒤는 그다지 잘 맞지 않는 듯합니다. 오히려 그때문에 더 씁쓸하다면 씁쓸하겠습니다만…….
아무튼 넷플릭스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속편을 암시할랑말랑 끝났다는 것도 좀 괘씸하나, 속편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어쩐지 큰 맥락 없이 나온 퇴마사가 과도하게 화려한 활약을 하는 것도 걱정이지만 공포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공포의 감각’은 썩 좋았으니까요.
*추신
제10회 온라인카지노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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