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테크 무속 융합 하이틴 호러 기리고 후기

-스마트폰은 저주를 싣고

by이건해

기리고는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로, 원한으로 인한 저주가 앱에 깃들어 소원을 이루어주고 소원을 빈 사람을 하루만에 자살시킨다는 소재를 다룬 호러입니다. 하이테크 무속 융합 하이틴호러죠. 한국 학교를 배경으로 한 호러는 전통 장르지만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이 호러의 주요 소재라는 건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귀신이 온갖 전자장비를 능숙하게 교란하고 조작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과도하게 유능한 것 같다고 느끼지만...... 소재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죠.


아무튼 스포일러를 포함한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고등학교 친구 집단에서 형욱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앱인 기리고를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자기도 써봤다가 처참하게 자살합니다. 재미로 앱을 써본 주인공 세아의 남자친구 건우도 소원이 이루어지며 사망 타이머가 발동되고, IT에 해박한 하준이 앱 삭제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도리어 건우는 귀신의 빙의로 부상당합니다. 세아는 건우를 살리기 위해 소원을 빌고, 하준이 그녀를 살리기 위해 무당인 누나 햇살을 찾아갑니다. 햇살은 일단 세아를 죽지 않게 해두지만 저주의 근원을 찾아야 근본적인 해결이 되므로, 주인공 일행은 기리고의 정체와 기원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알고보니 기리고는 죽은 여학생 시원이 만든 것이고, 저주가 시작된 건 친구 혜령과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시원은 무당인 어머니를 수치로 여기고 비밀로 하는데 혜령이 어머니와 가까워지자 신당을 박살내고, 어머니는 이로 인해 신벌인지 악령의 저주인지가 시원을 해치지 못하게 부적을 써서 시원의 소지품에 넣으라고 혜령에게 부탁하지만, 혜령은 이를 들키고 어머니 얘기를 꺼내고 말았습니다. 수치스러운 비밀이 드러나게 된 시원은 배신감에 혜령이 몰래 좋아한 남학생이 있다는 걸 대대적으로 공개하고 그 학생을 시켜 혜령을 모욕하고 폭행합니다. 결국 혜령도 수치심과 배신감을 이기지 못하고 시원의 어머니가 알려준 저주술을 사용하며 시원이 클럽활동으로 만든 앱 기리고를 통해 목숨을 버리며 저주를 쏟아냅니다. 이로 인해 시원은 사망하며, 기리고에 소원으로 저주의 반복을 남깁니다.

그리하여 세아 일행은 혜령의 저주가 시작된 스마트폰을 매개로 생각하고 찾아다니지만, 건우를 좋아하고 세아를 시기했으며, 홧김에 형욱의 죽음을 빌기도 했던 나리가 귀신에 빙의되어 세아를 방해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세아는 나리를 제압하고 혜령의 스마트폰을 확보하지만, 진짜 저주의 매개는 시원의 스마트폰이었기에 사건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나리에 의해 액막이 팔찌까지 파괴되어 세아는 죽음의 위기에 처하고, 무당 햇살은 세아와 함께 시원의 심상 공간에 침투하여 다시 사투를 벌입니다. 끝까지 나리가 방해하지만 세아는 혜령의 도움으로 시원이 마지막으로 저주를 남긴 스마트폰을 찾아내어 파괴하고, 일련의 사건은 일단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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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삼아서라도 소원을 빌 거라면 세계평화처럼 통 큰 것을 빌자... -이해를 돕기 위한 생성형 이미지)


줄거리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사건이 터지고 해결 방법을 찾았다 싶으면 다른 문제가 뒤에 숨어있어 일이 꼬이는 반전의 반복은 상당히 흡인력이 있었습니다. 일이 어떻게 굴러가려나 궁금증이 유지되었습니다. 호러중에 인물이 어찌되든말든 사실 알 바 아닌 작품이 제법 있는데, 기리고는 쫀득한 몰입감이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자초지종을 따라가다 보면 이게 그렇게까지 될 일인가 싶은 부분이 자꾸 튀어나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특히 저주의 시작을 둘러싼 과거 얘기가 그랬는데, 엄마가 무당이라는 치부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는 이유로 절친의 고백 영상을 교내 방송으로 틀어 공개처형한다든가, 그 짝사랑 상대를 협박해서 절친을 두들겨 패는 전개는 원래 원수였나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목숨바쳐 상대를 저주하는 것이나, 저주로 죽으면서 저주가 반복되길 비는 것도 너무 과도해서 정해둔 전개를 끼워맞춘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의 원한은 ‘캐리’처럼 꿈꾸던 순간이 완전히 최악으로 박살나서 아무 희망도 없는 지경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혜령의 상황이 그래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저주로 죽으면서 소원을 빈다면 살려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원수가 영원한 고통에 시달리길 바라지, 누가 저주의 반복 같은 ‘호러 플롯 친화적’인 소원을 비나요?


그래서 저주와 악행이 잘 어울려 납득할 만했던 것은 오히려 나리였습니다. 친구에게 사랑을 빼앗겨 뒤통수를 맞았다는 배신감과 시기, 분노를 느낄만했기 때문이죠. 다만 나리를 비롯해서 캐릭터들 상당수의 감정폭이 상식선의 1.5배쯤 되는 듯해서 저렇게까지 하는 건 과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연애감정과 호감의 표현은 차이가 있어서 일부의 감정은 설정만 남은 허구 같고 일부의 감정은 귀기가 서려 허구 같았습니다. 하이틴 장르니까 애들이 그냥 좋아하겠거니 하기엔 감정의 이유가 더 확실했으면 좋았을 듯했습니다. 8부작이나 되니까요.


8부작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시간을 아주 잘 쓰지는 않은 듯합니다. 한국 드라마답게 굳이 웃으라고 넣은 장면들은 영 김이 샜으므로 그 시간을 다른 데에 썼으면 완성도가 높아졌을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특히 이야기의 완벽한 해결사인 무당 햇살이 활약하는 것까진 그렇다쳐도, 이렇게 위험한 일을 목숨걸고 처리해주는 게 단순히 ‘동생이 얽힌 일이라서’로 보여 생동감이 부족했습니다. 뒷사연은 한트럭 쌓여있는 것같은데 그냥 npc로 소모된 듯했습니다.


이야기의 근간이 되는 과거 이야기를 인물 활약으로 알아내는 전개인 듯하다 그냥 냅다 보여주는 것도 구성상 아쉬웠습니다. 이런 얘기는 목격자 증언으로 알아내거나, 무당이 혼을 불러 듣는데 말이죠. 때문에 자초지종을 관객만 알고 등장인물은 모르는 듯한 상황으로 흘러가서 등장인물들이 과거와 상호작용하는 부분은 빈약하고 치유도 응징도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주요한 연출로 인셉션같은 심상공간과 실제세계의 혼재가 자주 나오는게 재미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과 헷갈릴 만한 심상공간을 구축한다는 건 여러 매체에서 너무 강력한 능력으로 설정되는 터라 귀신이 천년묵은 구미호급 영력을 가졌나 싶어 의아한 면도 있었고, 이러한 연출은 혼란을 유발하는 방법 중에서 너무 현대적인, 소설로 말하자면 일종의 서술트릭이라 공포감이 반감되는 면이 있었습니다. 낡은 저택을 배경으로 한 고딕 추리소설인데 살인 트릭의 핵심이 드론인 것 같은 위화감이랄까요. 아무튼 미러 디멘션이나 드림머신처럼 엄청나게 큰 설정인데 대수롭지 않게 쓰여서 설명이 더 있었으면 좋았을 듯했습니다.


연출적으로 특별히 잔인도가 높다는 점도 돋보였습니다. 몸이 꺾여대고 커터칼이나 맨손으로 목을 그어대고 피가 흩뿌려지고, 몸이 관통되는 모습은 상상을 초월해서 놀라웠습니다. 다만 딱 그 정도 패턴이 전부인데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초반에 보여준 수준을 넘어서진 못해서 나중에는 그냥 그러려니 싶었습니다. 귀신이 품은 원한의 강도를 보면 눈을 뽑거나 손가락을 찢거나 허리를 반대로 접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심심하더군요. 물론 이 심심함은 제가 호러와 고어에 익숙한 탓도 크겠지만, 연출이 공포를 잘 빚어내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공포는 어둠 속에 뭐가 있는듯 없는듯 불안할 때 극대화되는 것인데, 기리고는 잔인한 장면을 서둘러 보여주는 식이어서 잔인하기만 하지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몸을 꺾고 칼질을 하면 뭐 어떻단 말입니까, 그래봐야 죽지도 않을 텐데. 차라리 주인공의 선수생활이 끝날 위기가 찾아오는 게 훨씬 무서웠을 겁니다. 이게 현실인가 아닌가 헷갈리는 시점이 그나마 혼돈과 공포의 맛이 진했는데, 이 상황도 금방 해소해버려 아쉬웠습니다.


끝에 가선 의도한 것인지 인물 감정도 다 해소되지 않고 복선도 새로 깔며 끝나는 게...... 아무래도 영원한 악습으로 보여 개운치 않았습니다. 상황 따라 속편이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이 어중간한 예고는 봐도봐도 지칩니다. 시즌이 끝나면 처리할 건 다 처리해서 개운하게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이것도 넷플릭스라는 첨단 문물을 타고 퍼진 저주겠죠.


아무튼 기리고는 일단 보면 썩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소재도 제법 감각적이고, 잔인하고 무서운 느낌을 주는 오락물로 괜찮은 작품입니다. 저처럼 굳이 이러쿵저러쿵 따지면서 평하는 나쁜 습관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수작으로 꼽을 만합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압축해서 영화로 만드는 게 깔끔하고 개운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추신

제10회 온라인카지노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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