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주택가 '나눔 바카라방'과 호수공원에서 만난 아날로그의 온기
해외 출장을 떠난 며느리의 부재로 혼자 식사를 챙겨 먹을 아들이 안쓰러웠는지, 아내는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음식을 정성껏 만들었다. 아내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음식을 들고 우리 부부는 차를 몰아 30분 거리에 있는 아들의 집에 도착했다.
챙겨 온 음식을 전달하고 오랜만에 아들의 반려견과 함께 동네 한 바퀴 산바카라에 나섰다. 밴쿠버의 이 정겨운 주택가는 여느 대도시의 거대하고 차가운 빌딩 숲과 달리, 아기자기하고 오랜 세월을 품은 집들이 소박하게 모여 있다.
집 앞마당마다 저마다의 특색이 묻어난다. 알록달록 계절 꽃을 정성스레 키워낸 집부터 아기자기한 정원 소품으로 꾸민 집까지, 걸음마다 소소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천천히 걷던 길 옆, 인도 한쪽에 서 있는 작고 낡은 목조 구조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랜 세월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뎌낸 듯 손때가 묻어 있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눔 바카라상자(Little Free Library)'였다. 상단에 적힌 "Take One, Leave One Later(한 권 가져가고, 나중에 한 권 남겨두세요)"라는 문구처럼, 동네 주민들이 집에서 읽던 바카라을 가져다 놓으면 필요한 사람이 자유롭게 빌려가거나 나누는 소박한 길모퉁이 도서관이었다.
바카라을 감싸고 있는 작은 집 형태의 지붕과 낡은 창틀을 보니, 이 작은 공간이 이 동네 인도 위에서 보낸 수많은 시간이 짐작되었다.
아마 이 작은 나눔 바카라상자가 처음 만들어졌을 무렵은, 화면을 터치하는 스마트폰보다는 종이바카라을 한 장씩 넘겨 읽는 재미가 더 친숙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디지털 세상의 빠른 속도보다는 손끝으로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과 활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는 것이 더 익숙한 세대에게 이 길거리 바카라방은 소중한 쉼터였을지도 모른다.
이 작은 바카라상자가 이제는 그저 동네의 옛 추억을 담은 장식품에 불과한지, 아니면 여전히 주민들이 이용하는 유효한 공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과연 여전히 종이바카라을 펼쳐 들고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일요일인 다음 날, 늘 산바카라하는 호수공원 숲길을 걷다가 뜻밖의 풍경을 만났다. 공원 벤치에 한 여인이 앉아 얼굴을 깊게 묻은 채 종이바카라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주변의 소음도 잊은 채 조용히 바카라장 속으로 빠져든 그 모습은 계절의 변화와 어우러져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주택가 산바카라길에서 목격한 낡은 바카라상자와 숲길 벤치에서 만난 독서가의 모습. 이 두 장면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언제 서점에 가서 직접 바카라을 사본 지도 모를 정도로 아득해진 일상이 떠올랐다. 도서관에 가더라도 독서보다는 노트북을 켜놓고 다른 업무를 보는 날이 많았던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먼지가 얹혀 있던 서가 한구석을 기웃거려 보았다. 잊고 지내던 종이바카라 한 권을 집어 들고 손끝으로 서걱거리는 바카라장을 넘겨본다. 어느덧 9월,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흔히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부르며 칭호를 부여하곤 한다. 디지털 매체의 홍수 속에서도 여전히 숲 속 벤치에서 종이바카라의 바카라장을 넘기는 사람과, 길모퉁이를 지키는 낡은 나무 바카라상자가 있기에 이번 가을은 한층 더 아날로그적인 온기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