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이라고 하면 고딕체밖에 모르는뎁슈
1. 고딕 소설(Gothic Fiction), 그거슨 대체 무엇인가
'고딕'이라고 하면 흔히 뾰족한 성당이나 검은 옷을 입은 서브컬처(고스로리라고 들어는 봤니)를 떠올리기 쉽지만, 문학에서의 고딕 소설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탄생한 '장르 문학의 조상님'이다.
쉽게 말해 '안개 낀 고성(Castle - 고성방가 할 때 그 고성 아님), 저주받은 혈통, 비밀 통로,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공포'를 찹찹 버무린 소설이다. 호러, 판타지, 스릴러가 모두 여기서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딕 소설은 1760년대부터 19세기말까지 무려 100년 넘게 유럽을 지배했다. 왜 유럽 사람들은 100년이 넘게 고딕 소설에 미쳐 있었을까?
이성보다는 본능: 당시 유럽은 '이성(Reason)과 논리'를 강조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사람은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고, 밝은 곳에 있으면 어두운 걸 궁금해하는 법이다. 사람들은 퍽퍽한 논리 대신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공포'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의 불안감: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니까 사람들은 오히려 낡고 오래된 것, 과거의 전설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 아무리 발버둥 치며 살아도 집 한 채 마련하기 힘들고, 아무리 벌어 봐야 까마득히 앞선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금수저 못 따라가는 이 더러운 세상 대신,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모두 기억한 채로 과거나 소설 속, 게임 속으로 들어가서 남들은 모르는데 나만 다 아는 지식으로 꿀 빠는 회빙환이 지금 인기를 얻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딕 소설의 유행도 당시 시대의 특성과 연결 지어 설명 가능하다(그리고 지금으로부터 50년, 100년 후에 2020년대의 문학 시류 분석할 때 이 회빙환 얘기는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시기: 1764년(호러스 월폴의 《오트란토 성》 - 최초로 '고딕 스토리(A Gothic Story)'라는 부제를 붙였는데 나중에 이 단어 자체가 장르 이름이 됨) ~ 1790년대 초
특징: 고딕 소설의 '공식'이 만들어진 시기. 낡은 성, 지하실, 가문 세습의 저주 같은 장치들이 등장했다.
대표 작가: 앤 래드클리프(Ann Radcliffe, 1764–1823)가 '설명 가능한 초자연(Explained Supernatural)'이라는 기법으로 대중화를 이끌었다(지금으로 치면 스티븐 킹이나 J.K.롤링급 인기).
영화 《비커밍 제인》에서는 제인 오스틴이 작가지망생이자 팬으로서 래드클리프 여사를 방문하는 내용도 나온다. 하지만 이 만남은 영화적 픽션이며 실제로 제인 오스틴이 고딕 소설을 정말 많이 읽긴 했지만 《노생거 사원 (Northanger Abbey)》에서는 오히려 고딕 소설을 풍자하는 모습을 보인다. 고딕 소설 처돌이인 여주인공 캐서린 몰란드가 래드클리프의 《우돌포의 수수께끼 (The Mysteries of Udolpho)》를 무서워서 불도 못 끄고 밤새 읽을 정도로 고딕 소설에 과몰입한 나머지 방문한 집에서도 비밀 통로가 있고 그 집 어머니가 갇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뻘짓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시기: 1800년대 초 ~ 1840년대
특징: 단순히 무서운 걸 넘어서 인간의 내면이나 슬롯적 공포를 다루기 시작
대표 작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처럼 '과학이 만든 괴물'이나, 에드거 앨런 포처럼 '미쳐가는 인간의 심리'가 중심이 된다.
시기: 1880년대 ~ 1900년대 초 (세기말)
특징: 공포가 먼 나라 성이 아니라, 안개 낀 런던이나 평범한 집 안으로 들어온다.
대표 작품: 《드라큘라》, 《지킬 박사와 하이드》등. 인간의 이중성이나 퇴보에 대한 불안을 다룬다.
최근 학계(New Gothic Studies)에서는 이걸 더 세분화해서 '여성 고딕(Female Gothic)'이라는 분류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가부장적인 슬롯나 집안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여성이 느끼는 공포와 탈출 욕구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번에 번역 연재할 글인 《도서관 창문 (The Library Window)》의 저자인 마거릿 올리펀트는 후기 고딕의 정점이자 19세기 고딕 문학의 독보적인 철인이었다. 올리펀트의 삶은 고딕 소설보다 더 처절했는데 남편과 아이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비극 속에서도 남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평생 120권이 넘는 바카라을 써 내려갔다.
올리펀트는 ‘공포의 무대'를 먼 나라의 고성에서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익숙한 공간'으로 끌어왔다. 그녀의 유령들은 피를 흘리며 복수하는 괴물이 아니다. 내가 늘 앉아 있던 거실 창가, 조용한 도서관, 평범한 이웃집 문 뒤에서 아주 조용하고 기묘하게 나타난다. "혹시 방금 저기 누가 있었나?" 하는 미묘한 의심을 증폭시켜 독자를 서서히 미치게 만드는 심리적 고딕(Psychological Gothic)의 대가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대에는 월터 스코트나 찰스 디킨스에 비견될 만큼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빅토리아 여왕이 그녀의 바카라을 즐겨 읽었을 정도였고, 비평가들은 그녀의 유령 소설들을 두고 "영문학 역사상 가장 우아하고 설득력 있는 초자연적 이야기"라고 극찬했다.
《헤스터 (Hester)》: 여성의 자립과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수작.
《칼링포드 연대기 (Chronicles of Carlingford)》: 영국 소도시의 삶을 예리하게 풍자한 시리즈.
《도서관 창문 (The Library Window)》 (1896): 올리펀트 여사 사후에 더욱 빛을 발한 작품으로, '빅토리아 시대 3대 유령 소설' 중 하나로 꼽힌다.
안타깝게도 마거릿 올리펀트는 국내에 단 한 권도 정식 번역된 적이 없다. 그리고 공포, 스릴러는 무서워서 못 읽는 나도 고딕 소설 따위를 번역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 언니가 글을 잘 써서 읽다 보면 홀린 듯이 시발 그래서 그게 뭔데! 하게 되는 맛이 있다. 그중 하나인 《도서관 창문》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자면:
배경: 세인트 룰스(St Rules) - 스코틀랜드의 대학도시 세인트 앤드루스(St Andrews - 윌리엄 왕세자와 케이트 미들턴도 여기 대학 나옴)를 모델로 하는 가상의 도시
주인공: 고모 집에 놀러 와 있는 소녀
사건: 길 건너 도서관 창문이, 좀 이상하다.
창문이 창문이지 머 어떻게 이상한데?
→ 다음 글에서, 소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