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가족 여행
쇠도끼 하나를 다시 집어 들며
- 광천선굴에서 시간과 삶을 생각하다
8월 2일.
이제 2박 3일의 여정, 마지막 일정을 시작한다. 10시다. 아침은 출발하면서 근처 한식집에서 먹기로 했다. 가족 가이드 역할을 담당한 딸의 안내로 ‘산채랑황태랑’이라는 식당에 들러 황태와 콩나물 해장국으로 아침을 먹었다. 어젯밤의 피로를 털어내듯 모두 뜨거운 국물로 목을 덥히고 다시 여정에 오른다. 이번 목적지는 광천선굴이다.
광천선굴로 가는 길 하늘은 어제와 별반 다름없이 여전히 푸르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오늘도 폭염 가운데 있음을 알려준다. 입구에 도착하니 역시나 티켓팅을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자, 이제 입장이다. 입구에 지팡이를 한 손에 들고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신선 조형물이 반갑게 인사하며 관광객을 맞이한다.
평창에 가면 사람들은 대개 산을 본다. 푸른 능선을 보고,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보고, 계절에 따라 다양하게 빛깔을 바꾸는 숲을 본다. 나 역시 늘 그랬다. 평창의 산은 언제나 하늘 향해 열려 있었다. 그 산의 표정을 바라보며 길을 달렸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산의 위쪽보다 산 아래쪽이 궁금해진다. 이 궁금증은 산이 무엇을 보여주는가에 천착하고 추구하기보다 산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에 문득 깊은 질문이 품어진다. 그 진한 질문이 우리를 광천선굴로 데려간다.
동굴 입구에 서자 바깥의 빛이 갑자기 낯설어진다. 햇빛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연하게 보인다. 나무는 나무였고, 바위는 바위였으며, 길은 길이었다. 그러나 동굴 안에 들어서는 순간 사물의 이름이 먼저 사라진다. 동굴 속으로 발걸음을 몇 걸음 더 떼자 갑자기 어둠이 시야를 거두어 간다. 순간 자연스럽게 걸음을 늦춘다.
그리고 들었다.
똑.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묘하게 오래도록 크게 울렸다. 바깥에서는 한순간에 사라졌을 소리가 이곳에서는 벽을 만나고 천장을 만나며 한동안 살아 있었다. 동굴은 그동안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 조용히 말해온 탓에 어쩜 우리가 진정한 울림과 말을 듣지 못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광천선굴은 고생대의 석회암 지층 위에 형성된 동굴이다. 수억 년이라는 시간은 인간이 지닌 언어로는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사람은 백 년을 넘기기 어려운 생을 살면서도 늘 ‘오래되었다’ 말을 쉽게 사용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오래’라는 의미는 너무 다른 무게감을 느끼게 된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진다.
똑.
또 한 방울.
똑.
그 작은 물방울이 돌을 만들고 있다. 사람은 도끼로 나무를 자르나 시간은 물방울로 돌을 깎는다. 도끼와 물방울.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사물이 오랜 시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두 물질 다 무언가의 형태를 바꾸는 일을 했다. 다만 도끼는 한순간에 자르고 물방울은 수천 년을 기다린다.
얄팍한 인간은 빠르게 변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연은 전혀 서두르지 않는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멈추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새겨낸다.
종유석을 바라 보고 고개 돌려 석순을 바라본다. 천장에서 내려온 것과 바닥에서 올라온 것이 오랜 세월 서로를 향해 자라난 흔적이 보인다. 완성된 조각품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품인지도 모른다. 현재 지금도 물이 떨어지고 있고, 지금도 시간이 그것들의 모양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그 순간 수백 년 전 이곳 광천선굴을 찾았던 한 사람을 생각했다. 조선시대 강릉부사를 지낸 이익상이다. 그는 이 동굴을 직접 답사하고 그 경험을 글로 남겼다고 한다. 그 사실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수백 년 전 이익상 그 한 사람이 이 어둠을 보았고 오늘의 내가 같은 어둠을 보고 있다. 그의 발자국은 사라졌으나 동굴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익상, 바로 그가 들었던 물방울과 오늘 내가 듣는 물방울 사이에는 수백 년의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그러나 소리는 같다.
똑.
불현듯 ‘문학이란 무엇인가?’ 생각에 이른다. 문학은 이렇게 사라진 사람과 아직 오지 않은 사람 사이에 놓이는 작은 등불인지 모른다. 이익상이 동굴에서 보았던 것을 글로 남겼기에 나는 그가 보았던 어둠을 상상할 수 있다. 사람은 사라지고 글은 남고 그리고 동굴은 더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또 말없이 쉬지 않고 흐른다.
광천선굴의 유래에 신선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넓은 냇가를 앞에 두고 신선이 이곳에서 수양했다는 이야기다. 그 말을 떠올리며 동굴을 다시 면밀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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