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브람스
내가 남기고 가는 것 중에 인쇄되지 않은 것은 태워 주게. 나 스스로 정리하고 있으니 자네가 태울 거리는 얼마 남지 않았을 걸세.
1891년 5월, 바트 이슐에서 브람스가 출판업자 프리츠 짐로크에게 부친 편지에 이 말이 들어 있다. 이 편지는 나중에 이슐 유언장이라고 불리게 된다. 법률가가 작성한 문서가 아니라 거래처에 사적으로 보낸 편지였고, 당시 브람스는 쉰여덟이었으며 병중이 아니었다.
그는 이 편지를 부치고 두 달 뒤에 클라리넷 오중주를 완성한다. 그리고 여섯 해를 더 살았다.
브람스는 평생 자기가 쓴 것을 없애 왔다. 1880년대에도 자기 문서를 무더기로 태웠다. 앞에서 그의 첫 교향곡을 다루면서, 그 첫 문장이 나오기까지 걸린 스물한 해는 기다림의 길이가 아니라 지운 목록의 길이이자 숙련의 시간으로 봤다. 그때까지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악보를 없애고 그 자리에 새 악보를 썼다. 지우는 일과 쓰는 일이 한 묶음이었다. 이슐에서 부친 편지도 없애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전과 다른 것은 뒤에 쓸 악보가 없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비워 낸 자리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지웠다.
끝내겠다는 말은 그 전해에 이미 나왔다. 1890년 여름 이슐에서 현악 오중주 2번을 끝낸 뒤, 그해 말 짐로크에게 자기 음악과 작별해도 좋다는 취지의 문장을 적은 편지를 보냈다. 이제 그만둘 때가 됐다는 것이다. 작품 111은 원래 다섯 번째 교향곡을 위한 스케치에서 출발했다가 현악 오중주로 방향을 튼 곡이었고, 1890년 11월 빈 초연은 성공했다. 마지막 작품으로 삼기에 충분한 성공을 거뒀다.
같은 시기에 그는 만디체프스키에게 큰 규모의 작업을 몇 차례 시도했는데 아무것도 되지 않았고 이제 자기는 그 일을 하기에 너무 늙은 것 같다고 편지를 보냈다. 두 편지를 통해 브람스가 그만두려 한 것의 윤곽이 드러난다. 그는 작곡을 그만두려 한 것이 아니라 교향곡을 쓸 수 없다고 판단했다.
1870년에 북독일연방이 음악 저작물을 포함한 저작권법을 만들었고 이듬해 제국 전체로 확대됐다. 지금은 저작권 보호 기간이 저작자가 죽고 칠십 년이지만 당시에는 삼십 년이었다. 1886년에는 베른 협약이 그 권리를 국경 너머까지 이었다. 같은 시기에 시민 가정에 피아노가 들어갔고 인쇄된 악보가 가정으로 보급되며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과 왈츠가 그 시장에서 팔렸다.
브람스는 1875년에 빈 악우협회 지휘직에서 물러난 뒤로 어떤 기관에도 매여 있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납품해야 할 상대가 없었고, 마감이 걸린 위촉도 없었다. 작품 16번 이후 거의 전부를 짐로크가 출판했다. 브람스가 새로운 작품을 쓰지 않아도 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또한 브람스는 빈의 셋집에서 검소하게 살았고 부양할 가족이 없었다.
하이든이 1761년에 에스테르하지 가문과 맺은 계약에는 요구가 있을 때 작곡한다는 조항과 함께, 쓴 것이 후작의 소유라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무엇을 쓸지 정하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앞에서 다룬 바흐도 라이프치히에서 예배가 돌아오는 주기에 맞춰 음악을 대야 했다. 곡은 자리에 딸린 것이었고, 자리가 요구하는 것이 그대로 곡의 내용이 됐다.
모차르트는 1781년에 잘츠부르크의 자리를 버렸다. 받아 줄 시장이 아직 없었고, 십 년 뒤에 그는 빚을 남기고 죽었다. 베토벤은 1809년에 세 사람의 귀족에게서 연금을 받았는데, 무엇을 써서 바치라는 조건이 아니라 빈에 머물러 달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무엇을 쓸지는 그가 정했다.
그다음 반세기 동안 음악을 둘러싼 것들이 한꺼번에 바뀐다.
공연장이 생겼다. 1870년에 빈에 악우협회 대공연장이 문을 열었고 이듬해 런던에 로열 앨버트 홀이 섰다. 1884년에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가 새 건물로 옮겼고 1891년에는 뉴욕에 카네기 홀이 문을 열었다. 궁정의 방이 아니라 표를 팔아서 관객이 채워졌다. 홀이 커지자 소리도 커져야 했고, 악기와 편성이 그에 맞춰 바뀌었다.
악기가 공장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1853년 한 해에만 슈타인웨이와 베히슈타인과 블뤼트너가 문을 열었다. 손으로 몇 대씩 만들던 악기가 규격을 갖춘 상품이 됐고, 값이 내려가면서 중간 계층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악기가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연주할 악보가 필요했다.
연주회의 구성이 달라졌다. 그전까지 한 저녁의 프로그램은 협주곡 한 악장과 아리아와 독주곡과 관현악 서곡을 섞어 늘어놓는 식이었다. 19세기를 지나며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연주하는 것이 당연해졌고, 죽은 작곡가의 작품만으로 짠 프로그램이 생겼다. 곡이 초연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해마다 되풀이되는 목록에 올랐다.
1810년에 소설가 E. T. A. 호프만이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두고 긴 비평을 썼다. 그는 가사도 무대도 없는 기악곡이야말로 가장 낭만적인 예술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기악곡은 노래나 극에 견주면 아래에 놓이는 것으로 다뤄졌으나 소설가가 쓴 그 글이 순서를 뒤집었다. 악보만 있고 말은 없는 음악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연주자가 대중을 몰고 다니기 시작했다. 파가니니가 그렇게 했고, 리스트는 1840년 무렵부터 혼자 무대에 나와 저녁 한 자리를 채우는 형식을 만들고 그것을 리사이틀이라고 명명했다. 하이네는 1844년 4월 25일 파리 음악계를 다룬 글에서 리스트 공연을 둘러싼 광적인 현상을 두고 "리스트마니아(Lisztomania)"라는 이름을 만들어 냈다. 음악가가 고용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 사람을 모으는 존재가 됐다.
작곡가가 직접 글을 쓰기 시작했다. 슈만은 1834년에 잡지를 만들어 무엇이 좋은 음악인지 직접 논했고, 바그너는 두꺼운 산문집을 냈다. 무엇을 쓸지 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 그렇게 써야 하는지까지 작곡가가 말하게 됐다.
이런 흐름 속에 브람스가 있었다. 그는 이 자리를 스스로 얻어 낸 세대가 아니라 이미 당연해진 뒤에 앉은 세대로, 언제 시작할지와 언제 끊을지를 자기가 정할 수 있게 되었다.
물려받은 자리가 넓어진 만큼 이 세대의 작곡가들은 앞 세대가 하지 않던 시도를 했다. 무엇을 쓸지 정할 수 있게 되자, 음악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부터 다시 물었다.
리스트는 교향시라는 형식을 만들었다. 관현악곡 하나에 시나 그림이나 인물의 이름을 붙이고 그 이야기를 따라 음악이 진행되게 하는 것이다. 1848년부터 십 년 사이에 그런 곡을 열두 편 썼다. 바그너는 음악과 시와 무대를 한 덩어리로 묶는 쪽으로 갔다. 이들이 신독일악파로 불렸고, 자기들이 하는 것을 미래의 음악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핵심은 음악이 자기 바깥의 무엇을 가리켜야 한다는 데 있었다. 곡에 제목이 붙고, 그 제목이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 미리 알려 준다.
신독일악파의 반대편에 선 사람이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다. 1854년에 낸 바카라에서 그는 음악의 내용이란 음이 움직이는 형태 그 자체이며 그 밖의 무엇도 아니라고 했고, 뒷날 빈에서 브람스를 오래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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