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론

어떻게 해야 관계를 잘 맺을 수 있을까?

by전찬우

인간에게 사람만큼 중요한 존재는 거의 없다. 물론 현대 슬롯에서는 ‘돈’이 관계의 자리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돈은 행복의 영역에서는 관계와 비등할지 몰라도, 불행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관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최첨단 설비를 갖춘 초특급 1인실에 홀로 입원한 사람과, 가족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평범한 다인실에 입원한 사람을 비교해 보자. 두 사람 중 누구의 마음이 더 편안할지는 굳이 재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병의 심각도가 낮다면 고급 병실이 나을지 모르지만, 병이 중해질수록 무게중심은 돈에서 사람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다가 죽음에 임박하면 돈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며, 오직 사람만이 유일한 안식처가 된다.


시대가 변하면 돈과 관계의 유용성 비율도 바뀌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러니 관계를 잘 맺는 일은 삶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만 여기에서 관계를 '잘 맺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수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내가 수학을 잘하는 것이 다르듯, 관계의 중요성을 안다고 해서 누구나 관계에 능숙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방법은 찾아야 한다. 사실 관계를 잘 맺는 방법에는 이미 절대적인 기준이라 부를 만한 완벽한 해법이 존재한다. 심리학과 뇌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발견된 것이 아니라, 까마득한 옛날 두 성현이 이미 제시한 답이다. 부처님의 "자비를 베풀라"와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다. 두 말씀은 사실상 같은 답이다.


이 두 문장이 왜 해법이 될까? 누군가를 끝없는 자비와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원수마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을 아끼고 잘 대해주는 일은 숨 쉬기보다 쉬운 일이다. 이 가르침을 실천할 수만 있다면 관계의 난이도는 극도로 낮아진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다. 여기서 ‘이기적’이라는 말은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생명체가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행하는 모든 판단과 행동을 뜻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제나 자신의 생존과 삶을 지속하기 위해 결정한다.


누군가는 '숭고한 희생'을 반론으로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이득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한정해서 본 착각이다. 이득은 본질적으로 물질과 무관하다. 어떤 물건을 살 때 이득이나 손해를 느끼는 기준은 돈 자체가 아니라 '만족감'이라는 감정이다. 만족감을 느끼면 이득이고, 느끼지 못하면 손해다.


자신을 희생하는 행동 역시, 타인의 눈에는 생명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본인에게는 그것이 더 큰 이득이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다. 어린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어머니의 선택은 단순한 희생이 아니다. 아이가 죽고 나만 살아남는 세상과, 내가 사라지고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 중 후자가 자신에게 더 큰 내적 만족(이득)을 준다고 판단한 것이다.


종교적 신념이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분들의 숭고함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냈다는 강력한 만족감이라는 이득이 작동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여기서 충돌이 발생한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베풀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는 완벽에 가까운 인간관계론이다. 그러나 인간은 철저히 자신만을 위해 행동하는 생물학적 존재다. 그렇다면 두 성현은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한 것일까?


실제로 인류는 오랫동안 도달할 수 없는 경지를 앞에 두고 고민해 왔다. 믿음으로 다가가려 애써보지만, 현실적인 한계 앞에서 수많은 이들이 좌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두 입장은 사실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거기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오해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을 뿐이다. 바로 그분들의 말씀에 '목적어'가 생략되었다는 점이다.


생략된 목적어는 바로 '나를 위해서'다.


즉, 나를 위해서 모든 생명체에게 자비를 베풀고, 나를 위해서 원수를 사랑하며, 나를 위해서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마저 내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어가 생략되면서 사람들은 이를 잘못 판단해 '너를 위해서'라고 오해석을 했다. 타인을 위해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에게 처음부터 도달 불가능한 목표다. 반면 '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내 부모를 죽인 원수라 할지라도, 나의 내면적 평화와 이득을 위해서라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


원래 문장에서 목적어는 의미를 결정짓는 핵심이다. 예를 들어 "나는 연희에게로 간다"라는 문장에서 핵심은 목적어인 '연희'다. 연희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인물이라면 문장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성현의 문장에서 바로 이 핵심 목적어가 빠진 채 전해진 것이다.


이는 일종의 비극이다. '나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실천할 수 있는 경지가, '너를 위해서'가 되는 바람에 생명체로써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 구속이 되어버렸다. 다만 그분들이 실수로 목적어를 빠뜨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분들에게는 이미 나와 너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였기에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image.png


이제 두 분의 말씀을 '나를 위해서'라는 목적어를 넣어 다시 해석해 보자.


누군가를 배려하고 연민하고 사랑하려고 할 때 힘들다면,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 아니기에 하지 않아도 된다. 목적이 오직 나를 위한 것이기에, 만약 원수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냥 죽여서 단죄하는 것이 내 마음을 오히려 편하게 만든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주체가 '나'로 바뀌면 방법은 얼마든지 유연해진다.


물론 나를 위해 무한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이를 실천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러니 이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하면 할수록 좋은, 각자만의 선택일 뿐이다. 그래서 할 수 없다면 포기해도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나는 왜 원수를 사랑할 수 없을까 하는 불필요한 고뇌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판단의 기준은 언제나 '나의 행복'이어야 한다. 남들이 "그건 너를 위한 게 아니다"라고 말할지라도, 스스로 나를 위한 선택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만족감은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 계산되는 현상이므로 외부의 시선으로 적정 가치를 매길 수 없다. 10만 원짜리 호떡을 사 먹고 진심으로 행복하다면, 돈 낭비를 한다고 하는 타인의 비난과 상관없이 그것은 나에게는 가치 있는 소비다.


타인의 시선이나 외부의 도덕적 규범에 나를 맞출 필요는 없다. 오직 '나의 내적 이득'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나를 위해 사는 삶'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해도 괜찮다. '나를 위해서'라는 조건은 오직 나만이 결정할 수 있다. 남들이 뭐라 하든 그것이 진정 나를 위한 선택이라면, 평생 단 한 사람만 사랑하며 살아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전체적인 이야기는 그저 나만의 헛된 착각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진짜로 '너를 위해서' 자비를 베풀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범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이렇게 해석할 수 없다면 그 어떤 노력을 해도 그 목표에 도달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니 한 번쯤 이런 방향으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러면 그나마 조금은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작가의 이전글감정 정당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