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정당성

그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 줄까?

by전찬우

아주 오래전 영화 <코만도>에서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자신의 딸을 납치한 무리들을 응징하며 되찾아오는 역할을 맡았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당시 그가 딸을 구하는 동안 죽인 악당의 숫자가 아마도 수백 명 이상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딸을 구하는 영웅 아빠의 스토리는 이후로도 꾸준히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작품은 리암 니슨 주연의 <테이큰> 일 것이다. 이때는 어린 딸은 아니었지만, 그는 "난 널 찾아서, 반드시 죽여버릴 것이다"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결국 악당 무리를 모조리 처단하고 딸을 구출한다.


한국 영화에서도 이와 유사한 정서를 공유하는 작품이 있다. 원빈 주연의 <아저씨>다. 비록 혈연관계의 딸은 아닌 옆집 소녀였지만, 가족을 잃고 고립되어 지내던 전직 특수요원 주인공은 소녀를 구하기 위해 거대 범죄 조직을 단신으로 와해시킨다.


이런 류의 복수극 중에 또 하나의 흐름은 바로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존 윅>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개를 죽인 깡패들을 처단하다가 결국 거대 범죄 계의 카르텔과 맞붙으며 대량 살상을 감행한다. 이 대량 살상의 명분이 된 강아지는 사별한 아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이었으며, 홀로 살아가던 그가 다시 손에 피를 묻히게 되는 서사적 계기가 된다.


문명슬롯는 '사적 제재와 살인은 금지된다'는 규범을 교육한다. 그럼에도 대중이 이러한 영화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약한 존재들- 어린 소녀나 힘없는 동물 -을 훼손하는 인간들에 대한 압도적인 무력의 응징은 강렬한 해소감을 준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발생한다. 우리는 '어떤 이유까지'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목숨을 빼앗는 행위를 용인하는가? 법적인 관점이 아닌, 대중이 공유하는 평균적인 '도덕' 혹은 '상식'의 범주에서 묻는 질문이다.


딸, 옆집 소녀, 강아지는 서사적 거리감이 다르다. 원래 딸을 위해 목숨을 거는 전개는 별도의 부연이 필요 없다. 반면 이웃집 소녀를 위해 목숨을 걸려면 둘 사이의 특별한 유대감을 보여주는 장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강아지는 그 장벽이 더 높다. 단순한 유기견을 죽였다는 이유로 수백 명을 사살하는 전개는 대중의 보편적 동조를 얻기 어렵다. 그렇기에 감독은 영화 속에서 '아내가 남긴 마지막 유산'이라는 특수한 서사를 부여한다.


이 명분의 대상을 계속해서 확장해 보면 어떨까? 일 년 동안 정을 주고 키운 토끼라면 어떨까? 그 토끼와 늘 함께 지내던 거북이는? 더 나아가 키우던 풍뎅이나 바퀴벌레를 죽였다는 이유로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장면에도 우리는 여전히 통쾌함을 느낄 수 있을까?



대상을 물질로 바꾸어, 아끼던 스마트폰을 떨어뜨려 고장 냈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폭행하는 장면을 가정해 보자. 만약 스마트폰을 고장 낸 주체가 평범한 학생의 실수였고, 폭력을 휘두르는 자가 평소 학생을 괴롭히던 일진이라면 대중은 이를 불쾌한 폭력으로 규정할 것이다.


이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에서는 반드시 상대방을 교화 불가능한 '절대악'으로 설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손에 죽어간 수많은 추종자나 부하들이 실제로 그렇게 하나같이 절대악인지는 의문이다. 그들 역시 누군가의 가족이거나 평범한 인간일 수 있지만, 영화는 카메라의 시선을 철저히 통제하고 험악한 인상의 인물들을 배치함으로써 그들의 인간성을 지워버린다.


대상을 '반려 바퀴벌레'나 '스마트폰'처럼 지극히 사소한 영역으로 내려갈 때는 그 현상이 훨씬 더 심화되어야 한다. '별 일' 아닌 것으로 사람의 목숨을 뺏으려면 당연히 상대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도 죽일 만큼 비정상적인 인간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복수의 행위가 통쾌한 것이 아니라 잔혹한 폭력이 되고 만다.


사실 어떤 서사를 해서 우리의 감정을 통쾌하게 만들려고 했는지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응징은 언제나 나의 '기분 나쁨'에서 출발한다. 영화 속 주인공도, 이를 소비하는 대중도 사실 딸이나 강아지가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영역이 침범당해 나의 감정이 극심하게 훼손되었고, 이를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압도적인 능력으로 그 감정의 원인을 제거하며 현실의 대중은 이를 보며 대리 만족을 느낀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양주(楊朱)는 '천하를 위해 내 몸의 털 하나라도 뽑지 않겠다'라며 극단적 개인주의와 자기 보존 철학인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했다. 이를 현대의 상황에 맞추어 변형하면 '그 누구라도 내 기분을 아주 조금이라도 상하게 한다면 반드시 응징한다'라는 사고 흐름과 정확히 일치한다.


양주의 사상은 인간이 원래 이타적일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이를 경계하려 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착각이다. 인간은 본래 철저히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위아(爲我)를 별도의 철학으로 분리할 필요조차 없다. 원래 그가 말한 천하를 위한다는 대의명분 또한 결국 나의 생존과 안락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인간인 우리는 언제나 나를 위해서 세상을 위한다. 나를 위해서 남을 돕고 배려한다. 배려받은 타인이 감사해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때 극심한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애초에 상대가 고마워할 것을 기대하며 '나의 좋은 기분'을 위해 행한 투자였기 때문이다. 이때 느끼는 분노는 상대방을 향한 원망뿐 아니라, 투자 가치가 없는 대상을 잘못 선택한 자기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 결합되어 있다.


이는 잘못 매수한 주식의 메커니즘과 같다. 주가는 원래 오르내리지만, 매수자는 오직 '오를 것'이라는 주관적 기대를 품고 진입한다. 그렇기에 하락할 때의 충격과 고통은 객관적 지표보다 훨씬 커진다.


나를 희생해 인류를 구하는 극단적인 이타적 선택조차, 희생하지 않았을 때 겪어야 할 정신적 고통보다 희생을 선택했을 때의 마음이 더 편하기 때문에 내리는 결정이다. 인간은 단 1원도 자신의 기분을 지키거나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쓰려하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결국 양주의 철학이나, 내 감정이 상했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처절한 징벌을 가하는 서사는 동일한 궤적 위에 있다.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유일한 선악의 기준점은 '현재 내가 느끼는 감정'인 것이다. 내 감정이 동조하면 정의고, 내 감정이 거부하면 불의다. 다큐멘터리에서 사자 가족의 굶주림을 먼저 보여주면 사자의 사냥을 응원하고, 사슴 가족의 평화를 먼저 보여주면 사자를 맹수로 비난하는 정서적 맹목성과 같다.


문제는 이 판단의 기준점이 되는 명분의 크기가 '딸'에서 '옆집 소녀', '강아지', 그리고 '반려 바퀴벌레'나 '아이스크림' 같은 사소한 영역으로 축소되어 갈수록 어쩔 수 없이 슬롯적 갈등이 극단화된다는 점이다.


원인은 명확하다. 현대 문명이 과거에 비해 압도적으로 안전해지고 풍요로워졌기 때문이다. 생존 조건이 척박했던 과거에는 타인이 잠재적 경쟁자이자 동시에 필수적인 '생존 보험'이었다. 무리에서 퇴출당하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했기에, 개인은 감정적 불쾌함을 인내하며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기능적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발달한 시스템과 자본은 타인을 참아내야 할 필요성을 소멸시켰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스트레스를 감내하는 것보다, 고립을 선택하는 것이 비용 대비 효용 측면에서 훨씬 이득이 된 것이다. 이제 대중은 사소한 불편도 참지 않는다. 능력이 부족해 겉으로 참을지언정, 내면의 분노는 축적된다. 나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만드는 모든 대상은 제거되거나 징벌받아야 할 존재로 전락한다.


이런 갈등의 가속화는 구조적인 흐름이다. 그래서 앞으로 언젠가는 자신의 반려 바퀴벌레를 죽였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처절하게 처단하는 '사이다 영화'가 등장할 것이다. 그때의 대중은 그 영화의 왜곡된 서사- 나의 사소한 불쾌감이 타인의 생명보다 무겁다는 논리 -에 기꺼이 동조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타인의 존재 가치를 오직 '나의 유용성과 감정의 평안함'으로만 재단하는 시대의 대중에게, 내 세계를 방해한 행인은 이미 인간이 아닌 처단해야 할 '악당'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 좋은 감정을 불러오는 타인은 무한대로 긍정하고, 내 나쁜 감정을 야기시키는 타인은 단 한 점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어둠이 존재하지 않는 빛을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할지조차 모르겠지만, 어둠이 완전히 사라진 후 세상에서 어둠이란 단어는 사라지겠지만 빛이란 단어 역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심지어 그런 세상이 왔을 때조차 지금보다 더 행복할지 여부는 사실 좀 의문이다. 수십 년 전에 비해서 지금이 더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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