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안다는 것

나에 대해서 아는 것

by전찬우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 사람의 이름, 나이, 출신 지역, 사는 곳, 생김새를 아는 것일까? 물론 그것도 아는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정보를 얻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바카라 《어린 왕자》를 통해 "그 애의 목소리는 어떠니? 무슨 놀이를 좋아하니? 나비 수집을 좋아하니?" 같은 질문들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이는 누군가의 외부적 정보가 아니라 내면에 존재하는 고유한 정보를 아는 것이다. 따라서 나이나 연봉을 아는 것보다는 훨씬 더 상대를 깊이 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 즐거워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을 아는 것은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그런데 설명도 뭔가 좀 부족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이 설명이 왜 부족한지 인식하기 힘들다. 생텍쥐페리처럼 그 정도만 아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든다. 도대체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더 이상 뭘 어떻게 더 알아야 한다는 말인가? 혼란스럽다. 혹시 그 사람이 옷 안에 숨기고 있어서 특별한 관계가 되기 전까지는 보기 힘든 몸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뜻인가? 그 말도 어느 정도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것은 결이 좀 다르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들여다보자.


오래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던 《빨간 머리 앤》에서 앤은 자신의 빨간머리를 무척 싫어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같은 반 친구인 길버트가 그녀를 ‘홍당무’라고 놀렸다. 그 순간 앤은 분노가 폭발해 들고 있던 석판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 장면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앤이 ‘화가 났다’고 느낀다. 길버트 역시 그녀가 무척 심하게 화를 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길버트 입장에서는 살짝 억울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앤은 평소 자신이 빨간머리라는 말을 스스로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었지만, 그녀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길버트는 그냥 홍당무라고 부른 것뿐이었다.


앤이 화가 난 것은 맞다. 하지만 그 감정이 정말로 분노 그 자체였을까? 앤이 자신이 빨간머리임을 싫어한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앤은 고아였고, 과거의 경험에서 어디에서도 그녀의 존재를 원하지 않았다. 에번리 마을의 초록 지붕 집에 입양되는 과정조차 실수로 일어난 일이었고, 초반에는 거부되어 다시 고아원으로 되돌아갈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빨간머리에 대한 당시 슬롯의 선입견, 즉 ‘빨간머리는 못된 아이’라는 편견이 겹치면서, 그녀는 자신이 여러 곳에서 거부당한 이유가 빨간머리 때문이라고 여겼다.


결국 앤에게 있어서 ‘빨간머리’라는 표현은 그녀의 가장 깊은 두려움을 건드린 단어였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깊고 어두운 공포 중 하나가 바로 타인의 ‘거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빨간머리는 그저 고유한 외모적 특징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것이 외모적 열등감이 될지언정, 홍당무라고 놀렸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머리를 단단한 석판으로 내리칠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전혀 몰랐던 길버트는 자신도 모르게 앤의 가장 깊은 두려움을 건드려 버린 것이다.


홍당무라는 말에 자극된 앤의 두려움은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분노로 이어져 길버트 석판 저격 사건을 만들어 낸다. 이때 우리가 만약 앤의 분노만을 바라보게 되면 ‘좀 심했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앤의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던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을 볼 수 있다면, 어쩌면 그 반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앤의 이야기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분노는 본질적 감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분노는 두려움이 아주 빠르게 변형된 감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감정 앞에 서면 길버트처럼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것의 본질이 두려움인지 짐작해 내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 누군가 자신에게 화를 내면, 상대방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악감정을 품었다고 여긴다. 둘의 차이는 꽤나 크다.


우리는 이쯤에서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두려움’을 아는 것이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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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것을 파악해 내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뜻밖이다. 상대를 잘 몰라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평소 주의 깊게 관찰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것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서도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두려움을 알기 전에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잘 모른다. 아니, 알긴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두려움은 그저 피하거나 처리할 문제이지 나와 상관없다고 여긴다. 내가 가진 두려움은 마치 외모나 키처럼 이미 고정되어 변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더군다나 생각해 봐야 기분이 좋을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 그 두려움을 마음속 깊은 곳에 보관해 두고, 가능하면 밖으로 나올 일을 최소화하려 한다.


하지만 그 의도가 늘 통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아주 자주 그 의도를 벗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두려움을 느끼고 그것을 변형시켜 외부에 표출한다. 하지만 그 모습은 두려움이 아니다. 분노, 짜증과 같은 변형 후의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화가 났고, 짜증이 났고, 억울했다고 느낀다.


이런 현상은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이다. 그래서 나 자신을 제대로 알기도 쉽지 않고, 당연히 누군가를 제대로 아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다행히 이 현상은 평소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앤의 경우처럼 운 나쁘게 몇 가지 조건이 겹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아주 커다란 원인이 된다. 우리는 대부분 두려움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이 전혀 다른 형태로 변형된 최종 모습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나나 상대에 대한 오해가 일어나고, 그런 오해는 결국 커다란 갈등으로 이어진다.


두려움은 기본적으로 부정적 감정이다. 그래서 대부분 분노, 혐오, 짜증 같은 부정적 감정들로 변형된다. 하지만 늘 그런 식으로 변형되는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두려움이 줄어드는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자주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현상은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켜 전혀 다른 형태의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더군다나 어떤 면에서는 더 심각할 수도 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세상이 무섭게 느껴졌던 사람이 있다. 어느 날 그는 보디빌딩 대회를 보게 되었다. 거대한 근육을 가진 사람들, 건강하고 강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 후 인근 헬스장에 등록해 근육을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몹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고통은 어려서부터 가져왔던 왜소하고 마른 몸 때문에 느꼈던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고통을 참아내며 매일 열심히 운동했고, 거울을 통해 몸의 유의미한 변화를 느끼자 행복했다. 그는 더욱 전문적인 운동을 시작했고 식단까지 조절했다.


몇 년 후 보디빌딩 대회에 나갈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쯤 눈길을 주는 건장한 청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변화는 모태솔로였던 그가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좋았다. 딱 한 가지 문제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에게 운동 시간은 너무 중요해서 데이트 중에도 운동 시간이 되면 헤어져야 했다. 더 큰 문제는 함께 식사할 때였다. 남자는 엄격한 식이요법을 따르느라 일반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고, 어디 가든 자신이 먹을 건강식품을 챙겨 다녔다.


외모도 괜찮고 든든한 남자친구였지만, 함께 맛집을 가는 즐거움을 찾기 힘들었고 영화 한 편 보는 시간조차 내기 어려웠다. 여름휴가조차 헬스장의 여름 특훈에 참가하는 데 대부분을 썼다. 여자친구의 눈에 비친 남자는 마치 운동을 위해 사는 사람 같았다. 자신보다 운동을 더 좋아하는 듯하여 서운했고, 결국 시간이 흘러 이별을 결심했다. 평범한 데이트를 원했던 그녀에게 이 남자와의 만남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대체로 ‘그건 좀 과하다’고 느끼며, 그 과함으로 인한 이별을 당연한 결과로 여긴다. 아무리 건강이 중요해도 그 정도로 집착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남자가 그런 행동을 하는 진짜 원인은 거대한 근육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최종 결과물일 뿐 시작점이 아니다. 남자의 집착은 어린 시절의 ‘약한 몸’이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그가 원래 건장한 몸으로 태어났다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움이 행복과 집착으로 변형된 그 결과물만을 본다.


물론 그 두려움을 안다고 해서 상대의 행동이 모두 정당화되거나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머리를 맞은 길버트도 그렇고, 여자친구도 그렇다. 상대가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든 자신에게 미친 영향이 지나치게 부정적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일지는 또 다른 문제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분노와 집착을 뚫고 그 내면의 두려움을 바라볼 때 비로소 어느 정도까지는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나와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훨씬 더 크게 넓힐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오죽하면 저럴까"라는 말을 쓸 수 있다.


결국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싫어하고 좋아하는지를 아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러한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 즉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두려움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 드러난 행동만 볼뿐, 누군가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는 단순히 타인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 역시 어린 시절부터 내 안에 깊게 자리 잡은 두려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친구의 사소한 한마디에 상처받는 나를 이해할 수 있고, 남달리 운동에 집착하는 나를 이해할 수 있다.


내 안의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말은 쉽지만 꽤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부정적인 감정들은 노력하면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지만, 긍정적인 감정들은 훨씬 더 어렵다. 우리는 보통 불행의 이유는 찾으려 애쓰면서도 왜 행복한지는 굳이 따져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그 행복이 자기 삶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면, 그 안에 숨겨진 진짜 원인인 두려움을 직면하는 일은 자기부정처럼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내 감정이, 누군가의 감정이 흘러온 서사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 과정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다면 나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고, 비로소 타인의 숨겨진 내면까지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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