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행복한가?
소설이나 영화에는 SF 장르로 분류되는 작품들이 있다. SF는 Science Fiction의 약자이며, 우리말로 번역하면 '공상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인터스텔라>, <쥐라기 공원>, <터미네이터>, <아바타>, <마션>, <삼체>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런 SF 작품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소프트 SF'이고, 다른 하나는 '하드 SF'이다. 이 둘의 차이는 상상의 세계가 얼마나 철저한 과학적 배경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갈린다.
예를 들어 <슈퍼맨>이나 <스타워즈> 같은 작품은 분명히 우주적 배경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은 '사이언스 판타지(Science Fantasy)'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넓은 의미에서는 분명히 SF에 속한다. 반면에 <마션>이나 <인터스텔라>, 그리고 최근 화제가 되었던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정통 '하드 SF'물로 분류된다. 물론 모든 설정이 실제 과학 근거를 완벽히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극을 이끄는 주요 개념만큼은 우주적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같은 SF물로 묶이긴 해도 소프트 SF와 하드 SF는 성격이 판이하다. 하나는 과학적 근거 없이 '그냥 그렇다'고 상정한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과학적 타당성을 근거로 삼는다. 그래서 두 장르는 완벽히 대척점에 서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이 두 영역의 작품을 모두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거미에 물린 사람의 손에서 거미줄이 나가고, 가슴에 소형 원자로를 단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이야기와 화성에 홀로 남겨진 사람이 감자를 키우며 살아가는 이야기, 단 하루만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거대한 중력의 영향으로 서로 수십 년의 시간 차가 생겨버린 이야기 모두를 우리는 마음에 들어 한다. 이 말을 그냥 들으면 "당연한 것 아닌가? 단지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을 뿐이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토록 비현실적인 작품과 그토록 현실적인 고증의 작품 모두를 좋아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다 보면 인간이 가진 꽤나 특이한 특징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인간 자체가 '매우 비합리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합리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작품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게 현실적 고증을 해놓은 작품 모두를 즐길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 누구도 "넌 너무 비합리적이야"라는 평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문제는 합리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과 실제로 합리적으로 살 수 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이며, 나아가 합리적으로만 사는 것이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삶인가 하는 점이다.
조금만 돌아봐도 소프트 SF 장르에 속하며 세계적으로 메가 히트를 친 작품들은 차고 넘친다. <E.T.>, <터미네이터>, <쥐라기 공원>, <스타워즈>, <매트릭스> 등 손에 다 꼽기 힘들 정도다. 반면 과학적 현실을 엄격히 반영한 하드 SF 분야에서 대중적으로 유명한 작품은 손에 꼽힌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아는 작품은 <인터스텔라>, <마션>, <삼체> 정도일 것이다.
즉, 우리는 평소에 비현실적인 것, 다시 말해 비합리적인 것들을 은연중에 더 좋아한다. 다들 합리적으로 살아가길 원하고 비합리적인 삶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이, 왜 취향에 있어서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걸까? 이를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인간에게 숨겨진 깊고 중요한 비밀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행복'에 관한 아주 오래된 속성이다.
인간의 행복에는 크게 두 가지 속성이 있다.
첫째는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고 싶은 행복'이다. 하룻밤 사이에 전 세계를 돌며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존재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행복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과학적 근거도 없다. 어떻게 착한 아이를 구분하는지, 어떤 원리로 순록이 끄는 마차가 하늘을 나는지, 그 마차가 무슨 기술을 쓰기에 초속 1,500km로 달릴 수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믿음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믿는 것이 행복하므로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어른이 되면 이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른들조차 '기계가 인간의 몸에서 전기를 뽑아내기 위해 가상 세계를 만들었다(매트릭스)'는 황당한 가정은 쉽게 받아들이고 즐긴다.
둘째는 '합리적인 근거에서 오는 행복'이다. 이는 실제로 우리 눈앞에서 정확히 작동하고 있는 기계나 전자제품에서 온다. 사실 그런 제품들 역시 한때는 비현실적인 환상 속에서나 나오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문명이 발전한 지금은 실제로 우리 눈앞에 존재하며, 우리가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이처럼 어떤 비현실적인 상상이 우리를 감성적으로 행복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실제 생활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현실적인 물건들이 우리를 이성적으로 행복하게 해주기도 한다. 이 둘은 아주 자연스럽게 인간 행복의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다.
만약 한쪽 축이 고장 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상상만 무성하고 그것이 절대로 현실이 될 수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상상을 즐길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거미에 물린 사람이 거미줄을 발사한다는 상상을 보면서도 '어쩌면 먼 미래엔 저런 유전자 공학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최소한의 개연성을 담보로 믿는다. 그렇기에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이 온몸이 갑자기 무기로 변하거나, 아무 계기도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영화는 대중의 외면을 받는다. 외계인이 와서 무언가를 주입했거나, 알고 보니 자신이 지구인이 아니었다는 최소한의 설정적 설명은 있어야 지켜보는 재미가 생긴다.
반대로 현실만 존재하고 어떤 상상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그랬다면 인류는 결코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껏 '화성인이 존재한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상상도 많았지만, 우리는 그 상상력 덕분에 원동력을 얻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상상이 언젠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현실과 상상을 조화롭게 버무려 가며 행복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 중 우리를 더 본질적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상상력에 기댄 비합리성일까, 아니면 현실에 기반한 합리성일까? 당연히 현실에 기반한 합리성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인간을 강력하게 매료시키는 행복의 대부분은 '비합리성에 기댄 상상력'에서 나온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영화들 중에서 소프트 SF 분야에 훨씬 더 많은 작품이 포진해 있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확실한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작품보다, 조금 황당하더라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을 훨씬 더 선호한다.
이유를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하다. 합리성에 근거한 제품들은 우리의 '힘듦'이나 '귀찮음'을 해결해 준다. 지게차나 냉장고 같은 제품들이 해내는 역할이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노동을 획기적으로 줄여주지만, 전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창조해 내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인간이 하던 일을 훨씬 더 싸고 편하게 해 줄 뿐이다.
반면에 비합리성에 근거한 상상들은, 그것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를 '두려움'에서 잠시 멀어지게 해 준다. 다른 외계 행성에서 어린 시절 지구로 보내져, 우리와 똑같은 외모로 살아가지만 신에 가까운 능력으로 인간을 돕는 존재(슈퍼맨)의 이야기는 비록 스크린 속에만 존재할지언정 우리에게 든든한 안도감을 준다. 특히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 시절일수록 더욱 이런 이야기에 열광한다. 어리다는 것은 세상을 잘 모른다는 뜻이고, 아는 것이 적을수록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두려움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경험은 아이들에게 거대한 행복으로 이어진다.
이성적으로 따지면 우리는 당연히 현실적인 것에만 집중해야 할 것 같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 현실적인 것에서 오는 행복은 주로 힘듦을 줄여주는 '편리함의 행복'이지만, 상상에서 오는 행복은 두려움을 줄여주는 '안도감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편리함은 아주 빠르게 적응된다. 금세 익숙해지고, 결국엔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당연해지는 과정을 통해 초기의 행복감은 소멸한다. 집에 처음 냉장고를 들여놓았을 때는 너무나 기쁘지만, 그 기분이 몇 달씩 유지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냉장고가 고장 났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극심한 불편함과 짜증뿐이다. 우리는 냉장고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신선한 행복을 다시는 경험하지 못한다.
반면에 두려움은 매번 새롭다. 어제 밤길이 안전했다고 해서 오늘 밤길이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즐겁고 신나는 놀이공원이라도 기구 하나가 고장 나 사람이 다치는 순간, 그 공간은 순식간에 공포의 공간으로 변한다. 그래서 두려움이 줄어드는 안도감의 행복은 매일 새롭게 초기화된다. 이러한 속성의 차이가 우리가 어떤 행복을 더 갈구하게 만드는지를 결정한다.
우리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더라도 두려움을 유예해 주는 상상을 통해 행복을 유지한다. 비합리적이고 근거가 없더라도, 안도감이라는 행복은 매일 자연스럽게 마치 처음처럼 리셋되기 때문이다. 이는 질리지 않고 매일 먹는 밥과 같은 행복이다. 좋아하던 전자기기는 새로 살 때마다 감흥이 떨어지지만, 좋아하는 음식은 먹을 때마다 똑같이 기분이 좋다.
이러한 인간 고유의 특징은 향후 다가올 인공지능 시대에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대체해 줄 수 있으며, 반대로 무엇이 인간만의 고유 영역으로 남을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언젠가 인간의 지능을 훌쩍 뛰어넘을 인공지능과 인간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 답이 바로 '비합리성'이다. 조금 더 세련되게 표현하면 '상상력'이다.
인간이 상상력에 기반한 비합리적 삶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젠가 죽기 때문에 늘 무의식적인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그 두려움이 역설적으로 비현실적인 것들을 상상하고 선호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현실의 명제가 너무나 명확하기에, 우리는 최대한 비현실 속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을 사는 존재를 상상하고, 총에 맞아도 끄떡없는 초인을 만들어 낸다. 비록 그런 존재들은 스크린 속에만 있지만, 단순히 '그럴 수 있다'는 상상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잠시 죽음과 소멸의 두려움에서 한 걸음 물러설 수 있다.
인공지능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정보로서 학습할 수는 있겠지만, 유한성에서 오는 실존적 '두려움'을 스스로 체각할 수는 없다. 따라서 기계의 존재는 지적으로는 극도로 우수할지언정, 인간의 상상력을 근본적으로 따라잡을 수 없다. 상상력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결핍을 유예하려는 방어 기제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시대가 본격화될수록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영역의 행복은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고도의 편리한 세상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젠가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을 영원히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아무리 편리해지더라도 인간은 금세 익숙해지고 감흥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달에 가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처음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리겠지만, 그것이 집 앞 버스를 타는 것만큼 익숙해진다면 굳이 대단한 감동을 느끼며 달에 가려하지 않을 것이다. 뚜렷한 목적이 있지 않은 한 말이다.
결국 미래의 우리는 더욱더 치열하게 상상해야 한다. 문명이 발전하고 과거의 상상들이 하나둘 현실화될수록, 우리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더 깊은 상상 속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과적으로 미래에는 비합리적인 상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일수록 훨씬 더 행복한 삶을 누리는 시대가 올 것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인류는 그 누구보다 합리적인 삶을 추구하며 문명을 공고히 해왔는데, 그래서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발명품인 인공지능을 만들어 냈는데, 이제는 기계에게 그 합리성을 양도하고 최대한 비합리적인 상상력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다움의 목표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미 흐름은 바뀌었고, 합리성이 인간만의 독점적 가치로 인정받을 시기는 그리 오래 남지 않아 보인다. 사실 인공지능 때문만도 아니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시장에서는 생존에 꼭 필요한 생필품보다, 단순히 정서적 재미와 안도감을 주는 콘텐츠들이 훨씬 더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소비되고 있었다. 그것의 속도가 좀 더 빠르게 바뀐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