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순도

아이의 행복

by전찬우

확실히 어른에 비해 아이들의 감정은 순수하다. 그래서 어른이 된 우리들은 아이들의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다. 매일 매 순간 너무도 많은 것들을 계산하고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어른들은 그런 계산을 하지 않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좀 편안해지는 것이다. 눈치, 배려, 상처, 실수, 착각, 봉변 등등 우리가 어른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신경 써야 하는 것들에 비해 아이들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


그래서 아이들은 순수하다고들 한다. 천사 같다고 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반쯤만 맞는 말이다. 아이들이 순수한 천사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아이들이 어른들에 비해서 딱히 더 착해서가 아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아주 단순히 그들이 '세상 물정을 몰라서'이다. 그러니까 정보와 경험의 부족으로 인해 뭐가 이득이고 뭐가 손해인지 정확히 계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와 어른의 경계는 모호하다. 어느 날 갑자기 극적으로 정보량이 늘고 경험이 쌓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은 매일 커가면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간다. 즉, 어른들의 계산법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또한 같은 나이라고 해도 그 아이의 정서적 상태나 자라난 환경, 그리고 타고난 지적 능력에 따라서 어떤 아이들은 거의 어른과 같은 계산법을 보여주기도 하고, 다른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아이처럼 굴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된 우리들은 계산법이 바뀌면 왜 어린아이들처럼 감정을 경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계산법이 변한다는 것이 우리가 감정을 느끼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사실 이 문제는 꼭 어린아이와 어른 간의 차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 역시 매일 쏟아지는 감정의 홍수 속에서 비슷한 문제를 겪는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의 차이를 한 단어로 정리하면 바로 '순도'이다. 그러니까 아이와 어른이 겪는 감정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순도이며, 어른들 역시 매일 매 순간 서로 순도가 다른 감정들을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순도가 높은 감정을 경험할수록 깔끔하다. 그리고 이 깔끔하다는 말이 가진 의미는 바로 '뒤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순도가 아주 높은 감정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그 감정이 지나간 후에 단지 기억으로만 남길뿐 그것에 대한 어떤 다른 감정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꼭 좋은 감정만 그런 것도 아니다. 슬픔과 같은 감정들도 극단적으로 순수한 상태로 경험하게 되면 그것을 우리는 '카타르시스'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현상은 일종의 정화 작용을 한다.


사실 이 감정의 순도는 행복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다. 단순히 표현해서 좋은 감정들의 순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렇게 밝고 행복해 보이는 것이다. 보는 사람이 즐거울 정도로 그런 모습을 보인다.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주변에 순도가 높은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같이 동화된다. 그래서 반응이 좋은 밝은 성격을 가진 사람과 함께 있으면 즐겁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순하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은 감정의 순도를 높이면 된다. 아이처럼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아니하지 않으려고도 한다. 이유가 뭘까? 감정의 순도가 높으면 행복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할까? 혹시 행복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그 이유는 아이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이의 그 순도 높은 긍정적 감정의 높이만큼이나 길게 늘어진 그림자의 존재를 알고 있기에 그렇다. 아이가 느끼는 감정의 순도는 높지만 그 순도가 유지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가 느끼는 행복의 조건들이 어른이 되어서 보면 참 별것 아니고, 더해서 세상 사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부하는 것이다.


어른들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누군가 선물을 줘도 아이처럼 그렇게 순도 높게 좋아할 수가 없다. 그 선물이 가진 의미를 해석해야 하고, 자신이 과거에 준 선물과 비교해야 하며, 미래에 자신이 어떤 선물로 되갚아야 하는지 예측해 놔야 한다. 선물의 종류, 가격, 필요성 등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왜 선물을 줬는지 정확히 파악해 놔야 나중에 문제가 안 생긴다.


아이들은 '네가 좋아서'라는 한 마디면 끝날 일이 어른들 세계에서는 아주 복잡하게 돌아간다. 설령 같은 말을 해도 그 말 안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심지어 물어볼 수도 없다. 그래서 스스로 혼자 파악해 내야 한다. 머리가 돌아가고 복잡해지면서 선물을 받았을 때 느꼈던 아주 잠시 동안의 순도 높은 감정들은 금세 혼탁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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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른들이 아이 때 가지고 있던 감정의 순도를 잃은 이유는 바로 당장 느껴지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 뭔가를 생각하고 계산해 봐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감정의 순도를 낮추는 가장 흔한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때 감정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판단되는 것'으로 변환된다. 즉, 당장 느껴지는 감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을 한 후 결정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어떤 가방을 선물로 받았을 때 당장 느껴지는 감정은 그 가방의 디자인에 의해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색상, 모양, 기능성, 재질의 느낌 등등이 첫 번째로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감정 상태에 오래 있지 못한다. 왜냐하면 브랜드 로고가 보이고, 제품의 포장지 상태가 보이고, 이 제품이 얼마쯤 될까 가 머릿속에 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비싼 브랜드라고 판단되는 제품을 받게 되면 그 순간부터 제품의 디자인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후엔 그 제품의 브랜드와 가격이 최종 감정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렇게 머릿속에서 결정된 감정은 어쩔 수 없이 오감을 통해 느낀 감정과 충돌이 일어난다. 가방은 너무 예쁘고 좋은데 브랜드가 없거나 가격이 너무 싸면 어떤 감정으로 결정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선물에 좋아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별로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 감정의 순도가 낮아지는 순간이다.


더군다나 머릿속에서 결정된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쉽게 바뀔 수도 있다. 처음 가방을 받았을 땐 한 백만 원 정도 할 것 같아서 기분이 무척 좋았는데, 찾아보니 이월 세일을 해서 50만 원에 팔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기분이 다운되는 것이다. 혹은 옆 사람이 500만 원짜리 가방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자신이 받은 선물은 초라해져서 심지어 가방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상황까지 번지게 된다.


결국 머릿속에 생각이 많고, 많은 것을 판단하면 할수록 감정의 순도는 낮아지고 그로 인해서 행복의 난이도는 그만큼이나 높아지게 된다. 행복의 조건이 많아지니 그것을 채우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수록 더 안 좋은 상황은 '판단의 행복'을 추구해야 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는 조건을 추구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때부터는 내가 온전히 느끼는 오감의 행복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것들은 모두 남들이 말하는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판단은 '비교'를 통해 이뤄진다. 그러니 판단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바로 끝없는 비교를 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변화는 두 가지 문제를 발생시킨다. 첫 번째는 비교 행복은 언제나 패배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위험한 행복이다. 두 번째는 비교 행복은 아무리 해도 감각의 행복이 가진 순도를 따라올 수 없다. 그래서 그 행복은 늘 한정적이다. 즉, 판단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감정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뭔가가 남는다. 결국 감정이 깔끔하지 않다.


깔끔하게 끝나지 않은 감정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끝없이 재평가된다. 느낀 것이 아니라 판단했으니 그 판단의 잣대가 변하게 되면 당연히 과거에 느낀 감정들도 다르게 변환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갔던 놀이공원에 대한 기억은 매우 순도가 높기에 평생 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에게 커피를 사준 일을 '호의'로 잘못 판단한 감정의 기억은 그 사람이 자신에게 곤란한 부탁을 해올 때 그 즉시 '그 커피를 받지 말걸'이라는 후회의 감정으로 변환되며, 그 커피를 받은 자신의 부주의와 어리석음에 대한 짜증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어른이 된 우리는 받는 순간에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이미 판단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받는 순간 그것을 전혀 계산하지 못했기에 과자를 받았을 때 기분이 좋은 것과 곤란한 부탁 사이의 연관관계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니 상대가 준 과자를 맛있게 먹으면서도 '내가 그걸 왜 해줘야 하는데?'라고 대답하고 만다.


판단은 객관성을 가져야 믿을 수 있기에 명확한 증거를 요구한다. 하지만 바람이 상쾌하다든가, 날씨가 좋다든가, 달이 예쁘다든가 하는 것들은 객관적이지 않은 온전히 개인적인 느낌이다. 그러니 판단의 객관적 근거로 쓰일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객관적인 증거를 얻기 위해, 명확히 이득이라고 알려진 '물질적' 이득을 기준으로 정해둔다. 돈이 가장 흔한 예이다. 그래서 돈을 벌었느냐, 돈을 절약했느냐가 아주 중요한 행복의 판단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어떤 물건을 샀을 때 '세일해서 샀다', '가격이 착해서 샀다'가 주로 이유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너무 예뻐서 샀다는 말은 마음속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날 기분이 나쁜 누군가가 '그게 뭐가 예쁘냐'라고 한마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아이처럼 평생 살 수는 없다. 하지만 너무 어른이 되는 것도 내 삶에 그렇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 이득만이 유일한 이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적 이득도 꽤나 중요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 이득이 훨씬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행복은 오직 감정의 영역에서만 존재하며, 그 감정은 온전히 정신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단지 물질적 이득은 좋은 감정을 유발할 '판단'에 많은 영향을 줄 뿐이다.


그러니 만약 오늘 내가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면, 내 삶이 좀 우울하다고 느껴진다면 한 번쯤 골똘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내 감정의 순도는 현재 어느 정도일까? 나는 지금 내 행복을 그저 느끼는 것일까, 끊임없이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오감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일까? 아니면 지속적으로 이득을 추구하며 그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이 고민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 어떤 한 사람의 삶 그 자체를 온전히 바꿀 수도 있다.


세상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정말로 세상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어떤 식으로 마음을 먹으라는 뜻이 아니라, 그냥 다들 한때 그랬듯이 어린 시절에 느꼈던 그 감정의 순도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라는 뜻이다. 사실 그것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불안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어른처럼 살려고 그렇게 애쓰는 것일까? 또한 왜 아이처럼 사는 어른들을 보면 한 마디라도 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는 것일까? 물론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하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냥 딱히 피해 입히지 않고도 충분히 아이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남들이 정해준 것들을 수행하며 행복을 판단하지 말고, 내 감각이 온전히 느끼는 행복으로 조금이라도 되돌아가보는 것이 남은 삶의 행복 난이도를 아주 많이 줄여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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