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지옥을 탈출한 여자
“빛나야. 이혼하니 얼굴이 활짝 폈네.”
대한민국에서 돌싱녀로 살아간다는 건. 문득문득 느껴지는 수치스러움을 견뎌야 하는 일이다. 몇 년 동안은 결혼식도 못 가고. 가족 모임에도 못 가고. 어떤 이유로 이혼했든. 납작 엎드려 나를 숨기고. 조심하고. 내가 유별나서 이혼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거칠거칠한 모래가 목구멍에 걸린 듯한. 그런 껄끄러운 시간을 견뎌야 한다.
“역시 혼자 사는 게 젤 편하지? 결혼하는 순간 이혼이 꿈이 되는 것 같아.”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내게 이혼한 것 부럽다며. 덕담(?)을 건넸다. 인스타그램 속 그 선배는. 귀여운 아이와 함께 사랑이 넘치는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적어도 SNS 속에서는 결혼에 최적화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래도 선배 예쁜 아기 낳고 사는 모습 보면 부럽고 보기 좋아요.”
덕담은 덕담으로 받아쳐야 한다는 생각에. 행복한 그녀의 결혼생활을 부러워했다. 선배는 파스타를 먹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선배는 오랜만에 남이 해준 밥을 먹으니 너무 좋다며. 묘하게 텐션이 점점 높아졌다.
“결혼하고 아기가 생기는 순간 내 인생은 없어지는 거야. 챙겨야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넌 매일 여행가고 필라테스하고. 스스로 돌보는 시간이 많으니까 얼마나 재밌니?”
뭔가 자유분방한 나의 일상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비꼬는 듯한.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아줌마들 특유의 말버릇들.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말투의 문제인가. 아니면 내가 오늘 예민한 걸까.
이혼 후 가스라이팅에 대한 집착이 생겨서인지. 누군가를 통제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있으면 한없이 불편했다.
“진짜 목숨을 잃을 뻔해서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며 후회 없이 살고 있어요.”
죽음을 앞에 둔 순간 난 인생이 별것 없다는 것을 제대로 느꼈다. 경쟁 속에 갇혀 너무 아등바등 살지 말고. 남들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거는 제때제때 해보면서 살자고 다짐했다. 누가 뭐라 하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나만의 길을 가보자.
“너처럼 자유로운 영혼은 결혼 안 하는 게 더 어울리는 것 같긴 해. 결혼하는 순간 통제받고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니까.”
돌싱녀가 되고 나서부터. 분명 상대방의 귀바카라 사유로 이혼한 것인데도. 사람들은 나의 문제점을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돌싱녀도 분명 어떤 문제가 있을 거야. 확신을 가지고 계속 나를 분석하려고 들었다. 마치 내가 결혼과 안 어울리는 사람이라서 이혼한 것처럼. 극단적인 평가를 들을 때마다. 두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딱히 받아칠 말이 없었다.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데. 더 이상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를 어떻게 평가한다고 한들. 과거의 나처럼.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고. 주눅 들지도 않았다. 내 인생을 흔들 만큼 중요한 사람은 몇 명 없으니까.
“다행히 이혼하고 나서 일이 잘 풀려서 즐겁게 생활하고 있어요.”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서. 대충 받아쳤다. 선배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특유의 거슬린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할 말이 있는지 오렌지 에이드를 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물방울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근데 인생을 살아보니까. 든든한 남편이 있고. 나 닮은 아기도 있는 게 진짜 행복이더라. 너처럼 일하고. 바카라 쓰고. 운동하고. 젊을 때는 좋지만 나이 들고 힘없어지면 공허함만 남을 것 같은데...”
사실 인생이라는 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나도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가정과 일상을 원했다. 그걸 원한다고 모두에게 그런 기회가 오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즐기며 사는 것뿐이었다.
절대 타인은 타인의 삶을 온전히 이해 못 한다. 그래서 내가 인간관계에서 꼭 지키는 철칙이 있다. 첫 번째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 두 번째 민감한 부분을 먼저 묻지 말 것. 세 번째 다른 사람 인생에 대해 함부로 조언하지 말 것.
세 가지를 모두 지키려다 보니. 깊은 관계로 이어지는 인연은 몇 명 안 됐다. 그냥 최소한의 예의만 지켜줬으면 하는데. 그런 사람이 별로 없었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특징이. 오지랖이 넓어서 함부로 평가하고 조언하는 경우가 많아서. 매번 버거웠다.
“저는 결혼에 실패했지만 선배는 결혼에 성공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 보기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사실 그녀가 행복한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행복해 보인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최선을 다해. 영혼을 담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을 했다.
“결혼이 성공과 실패가 어디 있니. 각자의 옷에 맞는 삶을 사는 거지.”
선배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움찔했다. 그럼 난 돌싱녀라는 타이틀이. 나에게 맞는 옷일까. 그럼 숨 쉬듯이 무례한 선배는. 행복해 보이는 가장을 지키는 사람이. 맞는 옷일까. 어떤 의도로 저렇게 말하는 걸까.
오고 가는 대화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 마치 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은 말들이 많았다.
식사가 끝나고. 난 계산서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이제 계산만 하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뭐가 됐든. 말하는 것보다. 정적이 훨씬 많았던. 이 식사 자리가 끝난다는 사실이 기뻤다. 계산이 끝나고 나서야 그녀는 내게 다가왔다.
“빛나야. 네가 계산한 거야? 이혼하고 생활 빠듯하지 않아?”
그녀의 걱정 어린 질문에. 최대한 단정한 미소를 짓고. 우린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