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부탁이라고

그는 고양이로소이다 19편

by사랑의 생존자


“벌써 끝났습니까?”


문밖에서 기다리던 성철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직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아, 네. 잘 해결했습니다.”


미숙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상황 파악이 되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다온 양을 건드릴 일은 없을 거예요.”


성철이 잠시 빤히 바라보자, 미숙이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뭐, 직업적 능력을 조금 사적으로 활용했달까요?”


성철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상담실 유리 너머를 흘끗 바라봤다. 치호의 어머니가 잔뜩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제야 성철은 다시 미숙을 향해 제대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미숙의 시선이 복도 끝으로 향하더니, 흥미로운 듯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저 여학생이 강다온 양인가요?”


성철이 뒤를 돌아보니 다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뒤로 남학생 두 명도 함께였다.


“네. 제 딸입니다.”


그리곤 성철이 뒤쪽의 두 학생을 번갈아 살폈다.


“하루군은 둘 중에….”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흠. 저기 키 크고 잘생긴 학생이군요.”

“…그걸 헷갈리시면 곤란하죠.”


미숙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마침 학생부 교사도 다가왔다. 얼굴에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 남아 있었다.


“이야기는 잘 끝나셨나요?”

“네, 선생님. 좋게 잘 이야기했습니다.”


미숙이 웃으며 대답했다. 교사가 무언가 더 물으려던 순간 상담실 문이 열렸다.


“아, 치호 어머님! 이야기가 잘되셨다고….”

“네. 뭐.”


지나치게 짧은 대답에 교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미숙이 가볍게 끼어들었다.


“치호군이 하루와 다온 양에게 사과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고는 마지막 말을 유난히 또박또박 덧붙였다.


“진심 어린 사과를.”

“네?”


교사의 눈이 커졌다. 며칠 전 고소니 뭐니 교무실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사람이었다. 믿기지 않는 듯 곧바로 치호 어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치호의 어머니는 미숙을 한 번 흘끗 보고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뭐, 애들이 커가면서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니까요. 이왕이면 원만하게 끝내는 게 좋죠.”


교사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아, 이렇게 잘 해결돼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사이 다온과 하루, 치호도 가까이 와 있었다. 교사는 세 아이를 돌아봤다.


“치호야, 사과할 부분은 제대로 사과하고. 다온이랑 하루도 고생 많았다.”


다온과 하루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호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가자.”

“아니, 내가 뭔 사과를….”


치호가 낮은 목소리로 신경질적으로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짜증스러운 한숨만 내쉬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뭐야, 진짜.”


치호가 얼굴을 구긴 채 그 뒤를 쫓아가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어느새 성철이 치호 앞을 막아섰다.


“네가 치호구나?”


치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성철의 덩치와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 그런데요?”


성철은 사람 좋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나 다온이 아빠다. 우리 딸이랑 앞으로 학교생활 사이좋게 잘 지내주렴.”


그러고는 허리를 살짝 숙여 치호에게만 들릴 만큼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치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땐 아저씨를 자주 보게 될 거다. 아주 아주 자주.”


씩 웃는 성철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알겠지?”

“….”

“대답이 없네.”


성철의 큼직한 손이 치호의 어깨 위에 툭 얹어졌다. 묵직한 손길에 치호의 어깨가 움찔했다.


“…네.”

“그래. 착하네.”


치호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 쪽으로 내뺐다.


“아빠.”


어느 새 옆으로 다가온 다온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성철을 바라봤다.


“쟤한테 뭐라고 한 거야?”

“뭐 별말 안 했어.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사이좋게?”

“같은 학교니까 사이좋게 지내야지.”


성철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다온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작게 저었다. 성철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감히 우리 딸을 건드려.


웃는 얼굴 위로 아주 잠깐 사나운 기색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곧이어 성철의 시선이 옆에 조용히 서 있던 하루에게로 향했다.


“아, 그리고.”


성철이 하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차하루군?”


하루가 고개를 들어 마주 봤다. 190센티미터를 훌쩍 넘는 성철과 마주 섰음에도 시선의 높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성철의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살짝 들썩였다. 훤칠한 키에 마른 듯 탄탄한 체격. 평소 운동을 꽤나 해온 태가 났다. 무엇보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 잘생긴 녀석이었다.


이 녀석이 우리 다온이를 구해줬다 이거지. 성철의 입가에 금세 웃음이 번지며 커다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고맙다.”


하루가 그 손을 맞잡았다.


“우리 딸 도와줘서.”

“…아니요.”


담백하고 짧은 대답이었지만, 성철은 오히려 그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 듯 하루의 손을 힘껏 위아래로 흔들었다.


“거참, 녀석 참 든든하게도 생겼네.”

“아, 아빠!”


다온이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끼어들었다.


“이제 그만 좀 하고 얼른 가자.”

“왜? 아빠 아직 하루군이랑 얘기 좀 더 나누고 싶은데.”

“뭔 이야기를 해. 얼른 가자니까!”


다온이 성철의 팔뚝을 낚아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성철은 딸에게 이끌려 멀어지면서도 마지막까지 하루를 향해 커다랗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보자고, 하루군!”

“아빠, 진짜 쫌!”


다온의 목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졌다. 하루는 성철과 맞잡았던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악수를 얼마나 힘껏 했는지 손가락 마디가 아직도 얼얼했다. 옆에 있던 미숙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괜찮아?”

“…뭐가요?”


하루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내렸다. 미숙이 결국 작게 웃었다.


“…저 방과 후에 농구 연습 있어서 가볼게요.”

“응. 그래.”


미숙이 손을 흔들었다.


“이따 집에서 보자.”


하루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숙에게 며칠 전 저녁이 떠올랐다.




“저기, 어머니….”

“…응?”


미숙의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하루가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 지도 제법 됐지만, 아직은 들을 때마다 조금 생소했다. 하루가 전학을 간 지 며칠쯤 지나서였다. 평생 ‘저기요’라고 부를 줄 알았던 아이가 아무 예고도 없이 자신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미숙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고마울 뿐.


“왜?”

“부탁이 있어요.”


미숙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루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건 처음이었다. 남편에게도 좀처럼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아이라고 들었다. 미숙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부탁도 다 하고. 별일이네.”


하루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미숙이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


“뭔데?”


몇 번이나 입을 열려다 만 하루가 천천히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준영을 괴롭히던 치호. 그걸 막으려다 위험해진 다온. 그리고 자신까지 몸싸움에 끼어들게 된 일. 미숙은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양치호라….”


이야기를 다 들은 미숙이 혀를 찼다.


“아주 양아치 같은 애네.”


그러고는 하루를 빤히 바라봤다.


“그런데 네가 몸싸움까지 했다니 의외다.”


하루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미숙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 여자애 때문에 그렇게까지 한 거야?”

“….”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미숙의 눈빛에 슬며시 흥미가 어렸다.


“…능력 있는 변호사라면서요.”

“뭐?”

“저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는데….”


하루가 잠시 말을 멈췄다.


“걔는 또 건드릴 수도 있잖아요.”


미숙이 아무 말 없이 하루를 바라봤다.


“양치호가 강다온을 다시는 못 건드리게 해주세요.”


하루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게 제 부탁이에요.”


미숙은 하루를 가만히 바라봤다. 더 묻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삼켰다. 대신 고개만 두 번 끄덕였다.


“알겠어.”


그리고 조금 웃었다.


“누구 부탁이라고.”




미숙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성철과 함께 걸어가는 다온을 다시 바라봤다.


작은 얼굴에 하얀 피부, 새까만 머리카락. 아담하고 가늘가늘한 체구였지만 멀리서도 표정이 참 풍부한 아이였다.


흐흠. 저 애가 강다온이라 이거지.


미숙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때 가방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미숙은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여보. 오늘 하루 일은 학교에서 잘 끝냈어?]

“응. 잘 해결됐어.”

[다행이네. 근데 우리 하루가 웬일로 싸움을 했대?]


미숙이 복도 끝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당신 아들이 글쎄.”


일부러 뜸을 들였다.


“여자 때문에 싸웠다네.”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예뻐?]

“뭐?”


미숙이 피식 웃었다.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흠….”


미숙은 잠시 다온이 사라진 운동장 쪽을 바라봤다.


“왜 있잖아. 여자애들은 ‘쟤가 그렇게 예쁜가?’ 싶은데, 남자애들은 예쁘다고 하는 스타일.”

[예쁘다는 소리를 길게도 하네.]


전화기 너머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한 건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통화를 끝낸 미숙은 화면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예린아.”


입가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네 아들이 좀 수상하다.”


휴대폰을 가방에 넣으려던 손이 잠깐 멈췄다.


댁의 아드님.


문득 조금 전 성철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느 날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을 어머니 부르던 하루의 목소리도. 미숙은 한동안 가방 안을 내려다보다 작게 웃었다.


“…그러네.”

이번에는 장난기 없는 목소리였다.

“이제 내 아들이기도 하지.”


또각또각.

미숙은 하이힐 소리를 남기며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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