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양이로소이다 20편
“미안해. 내 경솔한 행동으로 너에게 피해를 줘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
도경이 다온의 문자를 소리 내 읽다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와. 어떻게 이렇게 영혼이 1도 없을 수 있지?”
“그래도 사과한 게 어디야.”
“그건 그래.”
다온의 말에 도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인지는 몰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내용은 분명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양치호한테 이런 문자를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 양치호가 사과를 하다니.”
도경이 감탄한 듯 고개를 저었다.
“차하루네 엄마가 대체 뭘 한 거야?”
다온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바카라상 위에 팔을 괴었다.
“나도 모르지. 변호사시라던데. 뭔가 법적으로 잘 해결하신 거 아닐까?”
“크….”
도경이 괜히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개간지.”
다온은 피식 웃으며 도경이 들고 있던 휴대폰을 도로 가져왔다. 그러고는 곧바로 화면을 몇 번 넘기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도경은 그런 다온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다온은 평소와 달리 하루 종일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다.
“근데 너 아까부터 뭘 그렇게 봐?”
“아, 이거 그냥….”
다온이 얼버무리기도 전에 도경이 냉큼 휴대폰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남자 옷들이 가득했다. 잠시 의아한 눈으로 화면을 훑던 도경이 이내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너희 아빠 선물이야? 야, 성철 아저씨는 뭘 걸쳐도 멋있을 텐데 뭘 그렇게 고민해?”
그러고는 두 손까지 모으며 눈을 반짝였다. 다온이 질린 듯 그런 도경을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 네 남자 취향은.”
도경은 초등학생 때부터 성철을 이상형으로 꼽아왔다. 큰 키에 우락부락한 체격, 압도적인 덩치에 카리스마까지. 도경의 말을 빌리자면 ‘진짜 남자’라나 뭐라나.
“야, 근데 이거 스타일이 너무 어린데? 우리 성철 아저씨한테는 영….”
도경이 화면을 넘기며 말했다.
“아, 그게….”
다온이 잠깐 머뭇거렸다.
“차하루 주려고.”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도경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춰 섰다.
“이번에 내가 엄청 크게 도움받았잖아. 소각장에도 뛰어와줬고, 그 뒤에도 그렇고….”
다온은 양치호의 사과 문자를 한 번 내려다봤다.
“뭐라도 보답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옷 사주게?”
“응.”
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밥을 살까 했는데….”
잠깐 고민하다 덧붙였다.
“밥 사준다고 해도 걔가 별로 좋아할 것 같지도 않고.”
차하루 그놈은 지금 네가 밥 사준다고 하면 꼭두새벽에도 튀어나올걸.
도경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소각장에서 다온을 바라보던 하루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온한테 단단히 빠졌다 정도까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차하루가 강다온을 남다르게 신경 쓰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문제는 강다온 저 바보만 그걸 모른다는 거지.
이걸 도와줘, 말아? 도경이 속으로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내가 미쳤다고 차하루 연애까지 떠먹여 줘야 해? 본인 연애는 본인이 알아서 해야지.
“…흐흠.”
도경이 괜히 화면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래. 선물이 낫겠다.”
“그치?”
다온의 표정이 금세 밝아지자 묘하게 찔리는 기분에 도경은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다온이 깔끔한 흰색 반팔 티셔츠가 담긴 화면을 내밀었다.
“이거 어때? 평소에 이런 거 자주 입는 것 같던데.”
가슴 한쪽에 브랜드 로고가 작게 박힌 것 말고는 별다른 장식도 없었다. 티셔츠치고는 가격이 조금 있었지만 선물로 주기에는 적당해 보였다. 도경이 화면을 쓱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이걸로 해.”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은 도경의 허락이 떨어지자 다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다 화면을 내려다보던 표정이 문득 난처해졌다.
“도경아.”
“응.”
“근데 사이즈는 뭐 해야 돼?”
“….”
“마른 편이니까 미디엄 정도면 되나?”
도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온을 바라보았다. 그 멀대같이 키가 크고 어깨가 딱 벌어진 녀석한테 미디엄이라니. 아무리 패션에 관심이 없다지만 이건 좀 심했다. 도경은 관자놀이를 한 번 꾹 누르더니 말없이 화면을 툭 눌렀다.
“엑스라지. 105.”
“엑? 그렇게 큰 걸?”
“…언니 말 들어. 절대 안 커.”
도경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사이즈를 선택하고 ‘바로 구매’ 버튼까지 눌렀다. 결제 직전에서야 휴대폰을 다온에게 돌려줬다.
“자, 마무리.”
다온은 잠깐 머뭇거리다 결국 결제를 마쳤다. 그러고는 도경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 역시 서도경.”
“…뭘.”
도경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미디엄 사이즈 티셔츠에 몸을 억지로 구겨 넣은 차하루를 볼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조금 아쉽네. 하여튼 난 너무 착해서 탈이야. 도경이 혼자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도 안 오나….”
다온이 바카라상 구석에 놓인 쇼핑백 끈을 손가락으로 꼼지락거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쇼핑백 안에는 며칠 전에 배송되어 온 티셔츠가 선물용 포장 그대로 담겨 있었다. 원래 점심시간만 되면 자연스럽게 동아리실에 나타나던 차하루가 며칠째 보이지 않았다.
첫날에는 별생각 없었다. 둘째 날에도 일이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사흘째부터는 점심시간 내내 자꾸 문 쪽으로 눈이 갔다. 다온은 턱을 괴고 쇼핑백을 바라봤다. 도움을 받고도 제대로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한 게 마음에 걸렸다.
혹시 인사가 너무 늦어서 기분이 상했나. 아니면 요즘 내가 너무 귀찮게 했나. 생각할수록 마음이 묘하게 무거워졌다. 다온이 바카라상에 엎드리며 푹 한숨을 내쉬자 옆에 있던 도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답답하면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다온이 엎드린 채 고개만 돌렸다.
“어떻게.”
“뭘 어떻게 해. 휴대폰은 그냥 장식품이냐?”
“…번호가 없단 말이야.”
“….”
도경이 한숨을 쉬었다. 점심시간마다 그렇게 붙어 있는 것 같더니 번호도 없다니. 도경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이내 제 휴대폰을 꺼내 빠르게 몇 자를 두드렸다. 잠시 뒤 화면에 뜬 답장을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
“김수미한테 물어봤어.”
“뭘?”
“차하루 요즘 뭐 하냐고.”
“뭐래?”
다온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도경이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다음 주에 학교 간 농구 친선전 있대. 그래서 요즘 점심시간에도 체육관에서 연습한다는데?”
“아.”
다온의 굳어 있던 표정이 금세 풀렸다. 다행이다. 나한테 화난 건 아니구나. 쇼핑백 끈을 만지던 손에서도 힘이 슬쩍 빠졌다.
“그나저나 김수미 얘는 어떻게 남의 점심시간 일정까지 알고 있는 거야….”
도경은 수미의 답장을 다시 읽다가 질린 듯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쇼핑백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야, 그거 줄 거면 빨리 줘.”
“…어떻게?”
“교실로 갖다줘.”
“찾아가기는 좀 민망한데….”
“바로 위층 교실이잖아. 뭘 망설….”
도경이 하루네 반이 있는 위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문득 저번 급식실 일이 떠올랐다. 다온이 차하루와 단둘이 급식을 먹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교가 한바탕 들썩였던 그날. 그리고 엉망이 되어 있던 다온의 신발장까지. 도경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얘 혼자 보내면 또 뭔 일이 날지 모르지.”
작게 중얼거리던 도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내가 같이 가줄게.”
다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 지금?”
“어.”
“지금 당장 가자고?”
도경의 미간이 슬슬 찌푸려졌다.
“마음 바뀌기 전에 따라와. 쉬는 시간 금방 끝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도경이 문으로 향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다온은 황급히 쇼핑백을 챙겼다.
“어? 어! 갈게. 같이 가!”
오랜만에 찾아온 8반 교실 앞. 다른 반이나 다른 학년으로 보이는 여학생들로 복도가 북적였다. 저마다 친구와 수다를 떨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시선은 하나같이 창가 맨 뒷자리로 향해 있었다.
여전히 인기가 많구나. 다온은 서성이는 여학생들을 쓱 훑어보고는 슬쩍 휴대폰 시계를 확인했다. 남은 쉬는 시간은 이제 4분 남짓. 쇼핑백을 꼭 쥔 채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을 빠르게 정리했다.
저번에 소각장에서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 덕분에 양치호한테 사과도 받았어. 별건 아니지만 이건 보답으로 주는 거야. 여기까지 말하고. 웃는 거야. 자연스럽게. 그리고 쿨하게 나오는 거야. 좋아. 완벽해.
“강다온, 뭐 해? 빨리 와.”
“어?”
정신을 차려보니 도경은 이미 8반 뒷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다온도 황급히 뒤따랐다.
“남의 반에서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구나 했더니 서도경이었네.”
바카라상에 걸터앉아 있던 민우가 피식 웃으며 비꼬자 도경이 바로 받아쳤다.
“와, 이민우. 너 차하루 따까리야? 왜 맨날 옆에 있어?”
“따까리?”
민우가 황당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야, 말을 무슨 그렇게 하냐? 따까리가 아니라 짝꿍, 절친 뭐 이런 거 모르냐?”
다온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봤다. 뭐야. 둘이 언제 이렇게 친해졌지? 그보다 차하루는… 다온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가 안쪽으로 향했다. 하루는 바카라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도경도 그 모습을 발견하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얘는 무슨 병 걸린 거 아냐? 맨날 자고 있어.”
“원래 잠이 많아. 어릴 때부터 이랬어.”
“뭐야. 어릴 때부터 같이 다녔어?”
“뭐, 내가 비위가 좋잖아.”
“인정.”
도경이 웬일로 바로 수긍하자 민우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근데 왜? 차하루한테 볼일 있어?”
“아, 그게….”
도경이 대답하려던 순간, 엎드려 있던 하루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어, 마침 일어났네.”
아직 잠이 덜 깬 하루를 보며 민우가 도경 쪽을 턱짓했다.
“너한테 볼일 있대.”
하루가 멍한 얼굴로 도경을 보더니 곧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뭔데?”
도경이 기가 찬 듯 하루를 한 번 보고는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재수 없어. 나도 너한테 볼일 없거든요?”
그러고는 옆에 선 다온의 팔을 툭 쳤다.
“야, 빨리 말해.”
그제야 하루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다온과 눈이 마주치자 하루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
“…강다온?”
“아, 안녕!”
다온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자 하루는 평소처럼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 저기… 그러니까….”
아.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할 말을 완벽하게 외워뒀는데. 막상 차하루 앞에 서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니까 고맙다고. 소각장에서 구해줘서. 양치호한테 사과도 받았다고.
간단하잖아. 다온이 얼른 입을 열었다.
“양치호가 고맙다고….”
“…?”
“아, 아니!”
다온이 스스로 놀라 황급히 손을 저었다.
“양치호가 고맙다는 게 아니라. 그때 네가 와줘서 고마웠다고. 아니, 그러니까….”
하루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다온은 고개를 숙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강다온. 동아리 영입하러 왔을 때 헛소리를 쏟아냈던 기억까지 불쑥 떠올랐다. 왜 이 교실만 오면 이러지. 아니, 나는 얘 앞에서 왜 맨날 이러지. 다온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더 망치기 전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불쑥 내밀었다.
“이거.”
하루의 시선이 쇼핑백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다온에게 돌아왔다.
“이게 뭔데?”
“보답.”
“…보답?”
다온이 조금 민망한 듯 웃었다.
“응. 여러 가지로 도움받았잖아.”
잠깐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엄청 고마웠어. 진짜로. 이건 좀… 약소하지만.”
말하고 나니 괜히 더 민망해졌다. 하루는 그런 다온을 잠깐 바라보다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여는 순간, 딩동댕동.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도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온을 채근했다.
“얼른 가자. 늦었어.”
“아, 응.”
다온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도경을 따라 몇 걸음 가던 다온이 문득 멈췄다. 그러고는 다시 하루 쪽으로 돌아왔다.
“저기, 차하루!”
하루가 고개를 들었다. 다온이 조금 몸을 숙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쁜 거 끝나면 동아리실 놀러 와.”
그러고는 부끄러운 듯 웃자 오른뺨에 보조개가 살짝 패였다.
“아! 강다온! 빨리 오라고!”
“어! 갈게!”
도경의 신경질적인 부름에 다온은 하루를 향해 손을 한 번 흔들고는 급히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루는 다온이 사라진 뒷문 너머를 잠시 바라봤다. 이내 바카라상 위에 놓인 쇼핑백으로 시선을 내리더니 피식 웃었다. 민우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하루가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남아 있던 웃음기가 금세 사라졌다.
“뭐가.”
“너 쟤랑 뭔가 있지?”
“있긴 뭐가 있어.”
하루는 귀찮다는 듯 대꾸하고는 쇼핑백 안을 들여다봤다. 민우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근데….”
다온이 사라진 뒷문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볼수록 귀엽지 않냐?”
쇼핑백 안으로 들어가던 하루의 손이 멈췄다. 민우가 슬쩍 옆을 봤다. 하루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저 표정. 어릴 때부터 기분 나쁠 때 꼭 저러지. 민우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생긴 것도 반반하고. 성격도 괜찮고.”
하루의 눈매가 조금 더 굳었다. 그제야 민우가 씨익 웃었다.
“서도경 말이야.”
“…아.”
굳어 있던 하루의 눈매가 금세 풀렸다.
“어. 서도경.”
강다온 말고. 민우는 그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하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바카라상에 엎드렸다.
민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알기 쉬운 놈.
“지만 모르지….”
“뭐?”
“아, 아무것도.”
민우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