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1) 이상한 사람

그는 고양이로소이다 16편

by사랑의 생존자

“와, 진짜 예린이랑 판박이구나. 게다가….”


오랜만에 듣는 엄마의 이름에 식어가는 스테이크만 바라보던 하루가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의 여자가 하루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너 엄청 잘생겼구나? 난 너 마음에 든다. 무지!”


하루가 별다른 반응 없이 무덤덤한 눈으로 바라보자, 여자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그렇다고 네가 날 마음에 들어 하라는 건 아니고.”

큰 키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말투에도 행동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변호사라고 했던 것 같다. 저 사람이 아빠와 함께 살게 될 사람이구나. 그동안 겪어온 다른 어른들과는 결이 사뭇 달랐다. 뭐랄까. 어딘가 좀 이상한 사람. 그게 하루가 처음 만난 미숙의 첫인상이었다.


하루가 열일곱살이 되던 새해, 그러니까 엄마인 예린이 세상을 떠난지 정확히 5년째 되던 해에, 아빠가 재혼 이야기를 꺼냈다.


경쾌한 팝송이 흐르는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미숙은 다 먹지도 못할 음식들을 하루 앞에 잔뜩 시켜 놓고 자기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아빠와 엄마의 대학 동기였고, 두 사람 모두와 가까웠다고 했다. 졸업 후 미국으로 떠나며 연락이 끊겼다가 지난해 우연히 아빠를 다시 만났다는 이야기였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네 아빠보다 네 엄마를 더 좋아했었어.”


미숙이 물잔을 만지작거리다 혼자 옛날 생각이 난 듯 웃었다.


“예린이가 왜 저 정도밖에 안 되는 남자랑 결혼했나 싶어서 속으로 엄청 욕했지. 도둑놈이라고.”


옆에서 아빠가 목이 탄듯 괜히 물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자, 미숙은 그쪽을 힐끔 돌아보고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였다.


“근데 뭐. 사람 일이란 게 모른다고, 이렇게 돼 버렸네. 거참.”


식어버린 스테이크 접시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던 미숙이 중얼거렸다.


“아무튼 우리가 결혼하려는 건 맞는데….”


미숙이 하루를 똑바로 바라봤다.


“네가 싫다고 하면 안 해. 예린이 아들이잖아. 그 정도 권리는 당연히 있어.”


하루는 아무 말 없이 미숙을 바라봤다. 그동안 엄마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늘 하루의 눈치를 살폈고, ‘이예린’이라는 이름 석 자조차 쉽게 입에 올리지 못했다. 아빠조차 그랬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달랐다. 마치 아직도 엄마가 곁에 있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 이름을 불렀다. 하루는 잠시 테이블을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전 상관없어요.”


아빠가 안도한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미숙은 그런 하루를 한동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잠시 말을 고른 미숙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네 엄마가 되겠다, 뭐 그런 촌스러운 소리는 안 할게. 차하루 인생에 엄마는 예린이 하나라는 거. 그건 건드릴 생각 추호도 없어.”


이어 미숙은 다시 픽 웃으며 검지를 까딱했다.


“그러니까 호칭도 네 마음대로 해. 아줌마, 김미숙 씨, 저기요. 뭐든 괜찮으니까.”


하루가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였다. 역시 이상한 사람.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고마워, 하루야.”


운전대를 잡은 아빠가 말했다.


“좋은 사람이야.”


하루는 대답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봤다. 신호가 바뀔 때마다 형형색색의 간판이 차창 위를 스쳐 지나갔다. 아빠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걸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게 누구든. 아빠의 인생은 아빠의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엄마가 있던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오는 건 싫었다. 아무리 아빠의 인생이라 해도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데 자신을 불쌍하게 보지도, 불편한 존재처럼 대하지도 않는 미숙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엄마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것도 싫지 않았다. 문득 미숙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차하루 인생에 엄마는 예린이 하나라는 거.


차라리 첫눈에 싫었다면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보다 싫지 않았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만약 이 사람에게 마음을 준다면, 그때는 엄마의 자리가 어떻게 되는 걸까. 하루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숙과 살림을 합쳤다. 둘이서만 살 때는 적막하다시피 조용했던 집이, 미숙이 퇴근하고 돌아오는 저녁이면 조금씩 사람 사는 집처럼 변했다. 늦은 밤이면 안방에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예린이는 진짜 웃는 게 예뻤어.”

“그랬지….”

“근데 남자 보는 눈은 없었지.”


아빠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말이 좀 그렇다.”

“왜? 틀린 말 했어?”


곧 아빠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미숙도 따라 웃었다. 이상하게도 미숙이 온 뒤부터 집에서는 오히려 예린 이야기가 더 자주 오갔다. 방문을 살짝 열어 둔 채 문제집을 풀던 하루가 연필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엄마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도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그 사실이 낯설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이 집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미숙의 존재는 더 낯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일상이 점점 편안해지는 자신이 조금 무서웠다. 엄마와 함께했던 시간보다 미숙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면, 엄마의 모습도 조금씩 희미해지는 걸까.


안방에서는 여전히 두 사람의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루는 한동안 그 소리를 듣다가 연필 끝으로 수학 문제집 귀퉁이를 몇 번 두드렸다. 분명 아는 문제였는데,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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