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양이로소이다 14편
“넌 뭐야?”
뒤쪽에서 양치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온을 감싸 안고 있던 하루의 손길이 잠깐 멈칫하더니, 다온을 벽 쪽으로 데려가 조심스럽게 앉혔다.
“여기 있어.”
하루가 짧게 말했다.
“이 새끼가 귓구멍 쳐 막혔냐? 너 뭐냐고 묻잖아!”
하루가 대답은커녕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자, 양치호가 씩씩거리며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제야 하루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양치호를 바라보는 눈에는 조금 전 다온을 살피던 온기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순간 운동장 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졌다.
“다온아! 강다온!”
도경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민우도 급하게 따라왔다. 도경은 거의 미끄러지다시피 다온 앞에 멈춰 섰다.
“야.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도경아….”
평소와 다른 다온의 목소리에 도경의 표정이 굳었다. 곧바로 양어깨를 붙잡고 다온의 얼굴을 살폈다. 빨갛게 달아오른 이마. 젖은 눈가. 그리고 까진 팔꿈치까지. 도경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저 후려칠 새끼가…!”
곧장 양치호에게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달려드는 도경을, 뒤따라온 민우가 재빨리 붙잡았다.
“워, 워! 서도경, 일단 진정해!”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학생부 선생님 금방 오시잖아!”
“놔, 내가 저 자식을 그냥—!”
도경이 민우의 팔을 거칠게 털어내려던 순간이었다.
“씨발, 다 비켜!”
양치호가 갑자기 하루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루는 다온이 있는 쪽을 슬쩍 눈으로 확인하더니, 일부러 그 자리에서 몇 걸음 떨어졌다. 양치호의 주먹이 거칠게 날아왔다. 하루는 고개만 슬쩍 비틀어 피했다. 허공을 찌른 양치호의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하루가 뻗어 나온 팔을 밀어내며 어깨를 한 번 밀었다.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중심이 무너진 양치호는 그대로 바닥에 한쪽 무릎을 찧었다.
‘쿵!’
“악!”
외마디 비명소리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남학생들의 입이 일제히 다물어졌다. 양치호가 이를 악물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뭐 해! 저 새끼 안 잡아?!”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 다온에게 달려들었다가 바닥에 내팽개쳐진 두 명은 하루와 눈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187센티미터의 압도적인 체격도 체격이었지만, 그보다 더 사람을 질리게 만든 건 하루의 표정이었다. 화를 내지도,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 서늘한 눈빛에 무리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누구도 지금의 하루를 먼저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야… 그냥 가자.”
“학생부 뜨면 우리도 좆돼.”
“나, 난 간다.”
눈치만 살피던 남학생들이 하나둘 슬금슬금 뒤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 큰소리치던 무리가 순식간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야! 어디 가! 야!”
양치호가 소리쳤지만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혼자 남은 양치호가 씩씩거리며 하루를 노려봤다.
“너 오늘 죽었어.”
양치호가 눈이 벌개진 채, 다시 주먹을 휘둘렀지만 이번에도 하루에게 닿지 않았다. 하루가 팔을 쳐낸 뒤 가슴팍을 밀어내자 양치호가 몇 걸음 크게 비틀거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양치호가 두 손을 바닥에 짚고,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하루가 천천히, 양치호를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걸 지켜보던 민우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저거, 눈이 완전히 돌았네...”
알 수 없는 말에 도경이 민우를 돌아봤다. 민우의 시선을 따라 도경도 그쪽을 바라봤다. 양치호는 이미 바닥에 한쪽 무릎을 짚은 채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양치호 쟤 서 있지도 못하는데 뭐가 돌았다는….”
도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우가 튀어나가듯 하루에게 달려갔다.
“안 돼, 차하루!”
민우가 하루의 팔을 붙잡아 뒤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하루의 시선은 여전히 양치호에게 고정돼 있었다.
“야. 정신 차려.”
민우가 하루의 귓가에 낮게 말하며 다시 팔에 힘을 줬다. 양치호가 바닥에서 그런 둘을 올려다봤다.
“아까부터 대체 뭐냐고, 넌.”
그러고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다온 쪽으로 턱짓했다. 하루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년 따까리야?”
짧은 침묵 후에 하루의 입에서 아주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씨발 새끼.”
민우의 표정이 굳었다. 비상이었다. 차하루가 욕을 한다는 건, 진짜 꼭지가 돌았다는 뜻이었다.
“야, 차하루, 그만해.”
민우가 이번에는 아예 하루의 팔을 양손으로 잡았다.
“…놔.”
“안 놔.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하루가 민우의 손을 떼어내려고 팔에 힘을 주자 민우의 몸까지 그대로 앞으로 끌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경도 그제야 표정이 달라졌다. 양치호가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은 차하루 쪽이 폭주하기 직전이었다.
“도경아.”
벽에 기대 앉아 있던 다온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
“말려야 해.”
“야, 너 지금 몸도 제대로—”
다온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말려야 해. 저러다 차하루도 잘못돼…!”
“야, 강다온!”
민우가 하루의 힘에 밀려 결국 팔을 놓친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루가 다시 양치호를 향해 한 발짝 내딛으려 했다. 다온이 뒤에서 달려들듯 하루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안 돼!”
하루의 몸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등 뒤로 다온의 가쁜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다온은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팔에 꽉 힘을 주었다.
“때리면 안 돼….”
하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온의 손은 여전히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손가락 하나 제어하지 못하던 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루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단단하게 맞물려 있었다.
“너까지 잘못하면 안 돼.”
다온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나 때문에 네가 잘못되는 거 싫어.”
하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허리를 감싼 다온의 두 손이 보였다. 손가락 끝은 아직도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조금 전 다온이 자신의 교복 소매를 겁에 질려 붙잡았을 때와는 달랐다. 이번에는 다온이 하루를 붙잡고 있었다.
한동안 팽팽하게 굳어 있던 하루의 어깨에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바짝 쥐고 있던 주먹도 천천히 풀렸다. 민우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죽여버릴 거야!”
양치호가 악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하루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대로 들이받듯 달려들었다.
‘퍽—!’
주먹이 하루의 오른쪽 뺨에 정확히 꽂혔다. 다온에게 허리를 붙잡힌 채 힘을 풀고 있던 하루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입술 끝이 터지며 붉은 피가 천천히 배어 나왔다.
“차, 차하루!”
놀란 다온이 얼른 팔을 풀었다.
“괜찮아?!”
하루는 말없이 엄지손가락으로 터진 입술 끝을 슥 훑었다. 손끝에 피가 묻어났다. 그걸 잠시 내려다보던 하루가 다시 양치호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다온이 불안한 얼굴로 하루의 옷소매를 다급하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소각장을 뒤흔드는 호통이 터졌다.
“거기서 뭣들 하는 거야!”
모두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소각장 입구에 학생부 선생님이 서 있었다. 그 뒤로 수미가 숨을 헐떡이며 따라왔다.
“헉, 헉….”
수미가 두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겨우 숨을 골랐다. 그러다 소각장 안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눈가가 젖은 채 엉망이 된 다온. 입술 끝에 피가 맺힌 하루. 그 옆에 선 도경과 민우. 그리고 코밑에 피를 묻힌 채 씩씩거리는 양치호까지. 학생부 선생님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수업 시간에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전부 학생부로 따라와. 당장!”
선생님이 홱 돌아서자, 하나둘 쭈뼛거리며 뒤를 따랐다. 도경이 다온의 팔을 잡았다.
“갈 수 있겠어?”
“응.”
다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을 옮기려다 문득 옆을 돌아봤다. 하루의 입술 끝에는 아직 붉은 피가 배어 있었다.
“차하루.”
작은 목소리에 하루가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하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다온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다 시선이 다시 까진 팔꿈치로 내려갔다.
“…너는?”
“나? 난 괜찮아. 근데 너 얼굴이….”
하루는 입술 끝을 엄지로 한 번 훑고는, 손끝에 묻은 피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럼 됐어.”
“잠, 잠깐만!”
하루는 대답 대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다온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입술을 달싹였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