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양이로소이다 11편
“뭐냐, 이 상황은……?”
쉬는 시간. 여느 때처럼 다온과 함께 동아리실에 들어선 도경은 문 앞에서부터 얼굴을 팍 구겼다.
“오, 이거 생각보다 맛있네.”
재하가 방금 딴 탄산수 캔을 한 번 들여다봤다. 냉장고 옆 벽에 기대 있던 하루의 시선이 재하의 손에 들린 캔에 멈췄다.
“…그거 제 건데요.”
“그래?”
재하는 하루와 캔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태연한 얼굴로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우리 하루 후배, 나랑 취향이 딱 맞나 보네.”
하루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 도경이 기가 막힌다는 듯 다온의 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고3이라 바쁘다던 인간은 왜 쉬는 시간마다 내려오는 것이며, 저 녀석은 또 왜 자꾸 얼씬거리는 거야?”
“나도 몰라….”
다온이 난처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재하 선배가 이상한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차하루 역시 요 며칠 이상하긴 매한가지였다. 원래는 점심시간에 내려와 한숨 자고 가는 게 전부였는데, 며칠 전부터는 쉬는 시간에도 심심찮게 동아리실에 모습을 보였다.
“근데 후배님들. 요즘 봉사부 너무 빠진 거 아니야?”
“아, 또 뭐가요.”
재하가 창밖을 내다보며 말하자 도경도 질색하는 얼굴로 따라 고개를 돌렸다. 체육관 뒤편 담장 아래로 잡초가 제멋대로 자라 있었다. 평소 사람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라 군데군데 허벅지 높이까지 풀이 올라와 있었다. 재하가 탄산수 캔 끝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저기, 너무 지저분한데.”
“아니, 사람 다니지도 않는 곳을 누가 본다고 청소를 해요?”
“도경 후배님한테 하라는 건 아니고.”
재하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하지 뭐.”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다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온 후배, 오늘 점심시간에 시간 되지?”
“네? 저는 뭐….”
“그럼 나랑 잡초나 뽑자.”
재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둘이 하면 금방 끝나겠네.”
재하가 ‘둘이’라는 단어에 은근히 힘을 주고는 슬쩍 하루 쪽을 바라봤다. 다온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하루가 먼저 낮게 입을 열었다.
“…제가 할게요.”
다온과 도경의 시선이 동시에 하루에게 향했다. 재하의 눈매가 슬쩍 휘었다.
“우리 하루 후배님이 봉사 정신이 아주 투철하시네.”
하루는 잠깐 재하를 응시하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고3인데 안 바쁜가.”
혼잣말인지 반말인지 모를 말에 재하는 캔을 입가에 댄 채 웃음을 삼켰다. 저 불만 가득한 얼굴하고는. 내가 지 도와주는 것도 모르고.
“좋아. 그럼 오늘 점심에는 차하루, 강다온 후배님이 저쪽 정리하는 걸로.”
“잠깐만요. 왜 갑자기 정해지는 건데요?”
도경이 황당하다는 듯 끼어들었지만, 재하는 이미 빈 캔을 쓰레기통에 쏙 던져 넣은 뒤였다.
“그럼 난 이만.”
할 말만 마친 재하는 미련 없이 동아리실을 빠져나갔다. 하루 역시 가방을 집어 들었다.
“…간다.”
다온 쪽을 한 번 보고 짧게 고개를 까딱한 뒤 문을 나섰다.
“아오, 진짜 저 또라이!”
도경이 창밖을 내다보며 혀를 쯧쯧 찼다.
“하지 마, 강다온. 우리가 진짜 학교 공노비도 아니고.”
“괜찮아. 내가 잡초 뽑기 전문이잖아. 그리고….”
“그리고?”
다온은 입을 다물었다. 차하루가 같이 해준다니까. 문득 어제 하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번에 공짜지만… 다음엔 아니다.'
그러니까…. 다음이 있다는 거잖아.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어제의 그 부드러운 감촉을 한 번 더 느껴볼 기회. 다온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슬며시 풀렸다. 손가락도 괜히 꼼지락거렸다. 도경이 그런 다온을 빤히 바라보다 눈을 찡그렸다.
“…너 또 왜 그렇게 헤실대냐.”
“응?”
“잡초 뽑는 게 그렇게 좋아?”
다온은 잠깐 생각하는 척하다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지도.”
“하여튼 요즘 이상해. 아니, 원래 이상했나?”
다온은 못 들은 척 가방을 챙겼다. 벌써 점심시간이 조금 기다려졌다.
점심시간. 체육관 뒤편 화단에는 허벅지까지 자란 잡초가 담장을 따라 빼곡했다. 다온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맞은편을 슬쩍 봤다. 하루는 아까부터 말없이 잡초만 뽑고 있었다. 툭. 잡초 하나가 뿌리째 뽑혀 나왔다.
“저기, 고마워.”
“뭐가.”
“재하 선배 대신 같이 해줘서.”
“응.”
오늘은 유독 대답이 짧네. 그러고보니 잡초를 뽑는 손길도 평소보다 조금 거칠었다. 기분이 별로인가? 다온은 하루를 슬쩍 훔쳐봤다. 뭐, 기분이야 풀어주면 되는 거고. 저 머리를 한 번 더 만질 수만 있다면야! 다온은 무릎 위에서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차하루, 네가 진짜 큰일 해주고 있는 거야. 도경이는 잡초 뽑는 거 워낙 싫어해서 작년에도 거의 재하 선배랑 나랑 둘이서 다 했거든.”
“…둘이서?”
“응. 거의 둘이서 했지.”
잡초를 억세게 잡아당기던 하루의 손이 딱 멈춰 섰다. 하지만 다온은 아무것도 모른 채 뽑아낸 풀을 옆으로 툭 던져놓을 뿐이었다.
“가끔 속을 알 수 없긴 해도, 재하 선배가 나쁜 사람은 아니야. 이런 궂은일도 나름 잘 도와주고.”
“…유재하.”
“응?”
다온이 고개를 들자, 하루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재하 선배 말고.”
“…?”
“유재하 선배라고 해야 하지 않나.”
다온은 눈을 깜빡였다.
“왜?”
하루는 다시 잡초를 움켜쥐었다.
“선배잖아.”
“응?”
“제대로 불러야지. 그게 예의지.”
“아….”
다온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왜 저러는지 이해는 잘 안 갔지만…. 뭐, 상관없었다. 다온에게는 나름의 인간관계 원칙이 있었다. 친해지고 싶다면 상대가 좋아하는 걸 해주는 것보다,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게 우선이라는 것. 싫다면 안 하면 그만이다.
“알았어. 유재하 선배.”
“…응.”
다온이 군말 없이 바로 호칭을 고치자 하루는 다시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손길이 한결 느긋해져 있었다. 기분이 좀 풀린 건가? 차하루는 호칭에 유독 민감하구나. 이따 수첩에 적어놔야겠다. 하루의 눈치를 살피던 다온이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차하루.”
“응.”
“너는 친한 애들이랑 보통 뭐 하고 놀아?”
하루의 손이 조금 느려졌다.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하루는 잠깐 생각했다.
“농구하거나. 축구하거나.”
뽑은 잡초를 옆으로 던졌다.
“게임도 하고.”
아…. 농구는 살면서 해본 적도 없고, 축구는 월드컵조차 안 보는데. 게임은 아빠가 테트리스 하는 것밖에 본 적이 없었다. …큰일인데. 대체 얘랑은 어떻게 친해진담. 다온은 손에 쥔 잡초를 괜히 이리저리 접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하루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나랑 더 친해지려고?”
“어?”
다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 그게… 같은 부원끼리 친해지면 좋잖아.”
하루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왜? 머리 또 만지고 싶어서?”
“아니……뭐….”
다온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약점 잡았다 이거지? 잠깐 잊고 있었다. 차하루.
얘 은근히 얄미운 성격이었지. 다온은 대꾸도 못하고, 작게 한숨을 쉬며 손에 들고 있던 잡초를 옆으로 툭 던졌다. 그 모습을 본 하루가 작게 웃었다.
“머리 한 번에 부탁 하나.”
“응?”
“기브 앤 테이크라고 했잖아.”
다온의 눈이 바로 반짝였다.
“그래서 부탁이 뭔데?”
하루가 선뜻 대답하지 않자, 다온은 쪼그려 앉은 채 하루 쪽으로 몸을 바싹 밀어붙였다.
“아, 부탁이 뭐냐니까?”
“야, 너….”
“응?”
다온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루의 눈이 잠시 그대로 다온에게 머물렀다.
“너무 가깝지 않냐.”
“….”
그제야 다온도 깨달았다.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다. 고개를 조금만 더 들면 서로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다온은 화들짝 몸을 뒤로 뺐다. 쪼그려 앉은 채 급하게 물러나다 중심을 잃을 뻔해 한 손으로 땅을 짚었다.
“아… 미안.”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다온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숙이고 발치의 풀만 만지작거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하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선불로 해줄게.”
“뭘?”
“머리.”
다온이 고개를 들었다. 하루가 상체를 조금 낮췄다.
“부탁은 나중에 들어줘.”
다온은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하루가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어서 하라는 듯. 다온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꿈틀거렸다. 아니,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내용부터 들어봐야지. 내가 그렇게 쉬운 여자인 줄 알았다면 큰코 다치지….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손이 먼저 올라갔다. 이 기회를 어떻게 놓쳐!
다온은 조심스럽게 하루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한 번. 검푸른 머리카락이 손바닥 아래로 부드럽게 쓸렸다.
다시 손을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가만히 있던 하루가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손이 닿기 편한 쪽으로.
다온의 손길이 잠깐 멈췄다. …뭐야. 입가가 저도 모르게 풀렸다. 두 번. 세 번. 다온이 아쉬운 마음에 한 번 더 손을 올리려 하자, 하루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아.”
다온의 손이 허공에 머쓱하게 남겨졌다.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거둬 등 뒤로 감췄다. 하루의 시선이 그 손을 한 번 따라갔다.
“내 부탁은….”
아, 맞다. 부탁. 다온의 얼굴에 금세 경계심이 떠올랐다. 하루는 옆에 놓인 커다란 봉투를 턱끝으로 가리켰다. 잡초 더미가 가득 찬 봉투라 부피만 컸지 가벼운 쓰레기였다.
“일단 저거 좀 버려줘.”
“…저거?”
다온은 봉투와 하루를 번갈아봤다. 엥. 고작 이거? 긴장감이 순식간에 맥없이 풀려버렸다. 곧 다온은 얼른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아이, 이런 거라면 백 개라도 기꺼이 버려주지!”
하루가 한쪽 어깨에 가방을 툭 걸쳤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근데 너 아까 세 번 만졌잖아.”
“…그래서?”
“이걸로는 한 번이지.”
“뭐?”
다온의 환했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하루가 저보다 한참 작은 다온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부탁 두 번 남았네.”
“뭐?! 야, 그런 치사한 게 어딨어!”
하루는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난 간다.”
“야, 차하루!”
다온의 억울한 외침을 뒤로하고 하루는 계단 쪽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아, 또 뭘 시키려고….”
뒤에서는 커다란 봉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온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계단에 발을 올리던 하루의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 그제야 굳어 있던 입가가 슬며시 풀렸다. 누가 볼세라 손등으로 한 번 문질렀지만,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