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한번에 부탁 한번.

그는 고양이로소이다 10편

by사랑의 생존자


다온이 눈치를 살피는 사이, 하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동아리실 구석의 냉장고로 걸어가 캔 하나를 꺼냈다.


치익. 캔 따는 소리가 조용한 동아리실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탄산수를 몇 모금 마신 하루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털썩 앉았다. 표정은 어느새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조금 졸린 듯, 조금 멍한 듯한 얼굴. 올라가 있던 눈썹도 다시 제자리였다.


…내가 잘못 봤나? 다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하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다온이 무슨 말이냐는 듯 하루를 바라봤다.


“신발장 말이야.”

“아.”


하루는 잠시 손에 든 캔을 내려다봤다.


“나 때문에 네가 곤란해진 것 같아서.”


평소보다 말이 조금 느렸다. 하루가 손가락으로 캔 표면을 괜히 한 번 문지르더니 낮게 덧붙였다.


“…진짜 미안.”


다온은 곧바로 두 손을 휘휘 저었다.


“에이, 네 잘못 하나도 없는데 뭘! 오히려 난 좀 재밌었어.”


그러고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약간… 드라마 속 여주인공 된 기분이었달까?”

“드라마?”

“응. 잘생긴 남자 주인공 때문에 온갖 고난을 겪는 주인공 있잖아.”


하루가 한동안 다온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생각의 보법이 확실히 다르네, 강다온은.”


하루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결국 남자 주인공이랑 연결되는 거야?”

“…음.”


다온이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글쎄. 그게 사실 멜로가 아니고 추리물일 수도 있어서.”


하루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평소의 무심한 얼굴이 한결 느슨해져 있었다. 다온은 잠시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따라 올라갔다. 이상하지. 차하루가 저렇게 웃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웃음이 잦아들고 둘 사이에 다시 조용한 시간이 찾아왔다. 열린 창문 너머로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소리와 아이들의 함성이 희미하게 바람을 타고 흘러들었다. 하루는 평소처럼 다온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었다. 창가를 바라보는 얼굴이 나른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검푸른 앞머리가 이마 위에서 조금씩 흔들렸다. 다온은 습관처럼 가방에서 소설바카라을 꺼내려다 문득 손을 멈췄다.


“아, 맞다.”


다온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하루를 빤히 바라보았다.


“차하루. 네가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이 하나 있긴 하다.”


턱을 괴고 있던 하루가 고개를 돌렸다.


“뭔데.”


다온은 잠깐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 당당하게 외쳤다.


“네가 지나치게 잘생겼다는 사실!”

“….”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 썰렁한 침묵에 다온이 먼저 민망해졌다.


“아, 아니, 장난이야. 네가 인기가 너무 많아서 내가 오해를 받았다, 뭐 그런 뜻이지….”

“어… 뭐.”


하루는 애매하게 대답하더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손을 들어 목 뒤를 천천히 긁적였다. 다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 끝이 조금 붉었다.


뭐지, 저거?

설마.

…부끄러운 건가?


저렇게 생겨놓고, 겨우 잘생겼다는 말 한마디에 부끄러워한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은 더 들을 텐데. 의외이기도 하고 조금 우습기도 해서 다온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꼭 참았다. ‘부끄러울 때는 목 뒤를 긁적인다.’ 이것도 이따가 수첩에 적어놔야지.


다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소설바카라을 펼쳤다. 그런데 몇 줄 읽기도 전에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하루가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하루가 대답 대신 어깨만 한번 으쓱해 보였다. 다온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바카라으로 시선을 내렸다. 바로 그때 하루가 입을 열었다.


“저기.”

“응?”

“땡이가 누구야?”

“어?”


순간 다온의 손에서 소설바카라이 미끄러졌다. 툭. 바닥에 떨어진 바카라이 펼쳐진 채 엎어졌다.


“땡이를 네가 어떻게….”


하루는 바닥에 떨어진 바카라을 한번 내려다본 뒤 다시 다온을 봤다.


“편의점에서.”

“….”

“네가 나한테 땡이라고 했잖아.”

“…아.”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걸 들었구나. 다온의 머릿속에 그날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파라솔 아래 잠들어 있던 차하루. 햇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보이던 머리카락.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도망쳤던 것까지. 다온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음…땡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용히 입을 뗐다.


“내가 키우던 고양이야.”

“고양이?”

“응.”


다온은 바닥에 떨어진 바카라을 주워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아빠가 보호센터에서 데려온 애였는데… 작년 봄에 떠났어.”


하루는 더 묻지 않았다. 다온은 무릎 위에 놓인 바카라 모서리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땡이. 처음 집에 왔을 때는 갈비뼈가 보일 만큼 작고 야윈 고양이였다. 뚱뚱해질 때까지 오래오래 곁에 있으라고, ‘뚱땡이’에서 뒷글자만 따서 땡이라고 이름 붙였다. 아빠에게도, 낯선 사람에게도 쉽게 곁을 주지 않던 녀석이 이상하게 다온에게만은 처음부터 몸을 붙여왔다. 말없이 옆에 붙어 있던 조그만 몸. 보드라운 검은 털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 그것만으로 조금 괜찮아지는 날들이 있었다. 그런 땡이가 갑자기 떠났다. 아픈 줄도 모르고 지냈는데, 병원에서는 심장병이라고 했다. 조금만 더 안아줄걸. 조금만 더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바카라 모서리를 쓸던 손이 멈췄다. 다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는 하루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검고 푸르스름한 머리카락. 조금 졸린 듯한 얼굴. 말이 없어도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은 사람. …땡이도 그랬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곁에 있기만 해도 괜찮아지는 기분.


“키우던 고양이였구나.”


한동안 말이 없던 다온을 보며 하루가 낮게 되뇌었다. 그 순간이었다. 툭. 손등 위로 뜨거운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다온은 멍하니 제 손등을 내려다봤다.


…어? 급하게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하지만 이미 눈가가 뜨거워진 뒤였다. 맞은편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괜찮아?”


하루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다온은 손등으로 급하게 눈가를 훔쳤다.


“아, 뭐야. 나 왜 이러지.”


웃어 보이려 했는데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하루는 아무 말 없이 동아리실 한쪽으로 걸어가더니 휴지 몇 장을 뽑아 내밀었다. 다온은 잠깐 휴지를 바라보다 얼른 받아 들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다온은 휴지로 눈가를 꾹 누르고 숨을 한번 골랐다.


“사실 차하루 네가 땡이를 좀 닮았거든.”

“고양이랑 내가?”

“응.”


다온이 손가락으로 하루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머리카락 색이 똑같아. 검고… 햇빛 받으면 약간 푸르스름한 거.”


말하고 나니 조금 민망했다. 다온은 괜히 휴지를 접었다 폈다 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편의점에서 진짜 놀랐어. 미친 사람 같았겠지만… 나도 모르게 머리에 손이 갔지 뭐야.”


하루는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었다. 다온은 슬쩍 하루의 반응을 살폈다. 화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잠시 뒤 하루가 다시 자리에 앉아 턱을 괴었다.


“그래서?”

“응?”

“땡이랑 닮아서 나보고 동아리 들어오라고 한 거야?”

“응.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친해지면?”

“응?”


하루가 조금 더 몸을 돌려 다온을 바라보았다.


“나랑 친해지고 나면 뭐 하려고 그랬는데?”


다온은 입을 다물었다. 이것까지 말해야 하나. 도경이가 그거 말하면 변태라고 도망갈 거랬는데. 휴지를 만지작거리던 손끝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까지 말해놓고 숨기는 것도 이상했다. 결국 다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은!”


생각보다 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 너 머리를 좀 쓰다듬어 보고 싶어서!”


말이 떨어지자마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온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 이상하지? 변태 같지? 사실 그게 목적이었어. 미안….”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졌다.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다온은 눈치만 살피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루는 여전히 턱을 괴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과 표정이 달랐다.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 채 다온을 보고 있었다.…쟤, 웃는 건가?


“난 또 뭐라고.”


하루가 낮게 중얼거렸다. 목소리 끝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그게 뭐 별거라고.”

“응?”

“머리 만지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다온이 멍하니 바라보자 하루는 턱을 괴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러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상체를 조금 숙였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다온 앞으로 가까워졌다.


“머리 정도야.”


다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루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쓰다듬어 봐.”


다온의 시선이 그대로 멈췄다.

…지금?

진짜 만져도 된다는 거야?


머뭇거리고 있자 하루가 고개를 아주 조금 까딱였다.

얼른 하라는 듯.


다온은 무릎 위에 올려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심장이 괜히 빨리 뛰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끝이 하루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사락.

부드러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망설였으면서, 막상 닿고 나니 손을 떼기가 아쉬웠다. 다온은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얹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내렸다. 익숙한 감촉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보드랍고 검은 털. 손바닥 아래 가만히 머리를 맡기던 작은 녀석이 문득 떠올랐다.


가슴 한쪽이 간질거리듯 풀어졌다. 다온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오른쪽 뺨에 보조개가 깊게 패였다. 곁눈질하던 하루의 시선이 문득 그곳에 머물렀다. 다온의 오른쪽 뺨. 하루는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카라상 위에 팔을 포개고 엎드렸다.


“난 좀 잘게.”


그제야 다온은 화들짝 손을 거뒀다. 손끝에 아직 부드러운 감촉이 남아 있었다. 다온은 엎드린 하루를 잠시 바라보다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

“이번엔 공짜지만.”


하루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웅얼거리듯 덧붙였다.


“응?”


하루가 엎드린 채 고개만 살짝 돌렸다.


“다음엔 아니다. 기브앤 테이크.”


다온이 눈을 깜빡였다.


“머리 한 번에 부탁 하나.”


잠시 멍하니 있던 다온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땡이 이야기를 꺼낼 때만 해도 변태라고 욕먹고 절교당할 각오까지 했는데, 이 정도면 뭐.


“뭐든. 뭐든 들어주지!”


다온이 자신 있게 대답하며 환하게 웃었다. 하루는 말없이 그런 다온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주변 소리가 한 겹 멀어진 것처럼 아득해졌다. 이상하게 숨이 얕아지고, 손끝부터 몽글몽글한 온기가 번져왔다. 하루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자니 왠지 견디기가 어려웠다.


결국 다온은 먼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괜히 손가락 끝만 꼼지락거렸다. 딩동댕동— 때마침 예비종이 동아리실 안에 울렸다.


“…나 먼저 가볼게.”

“어? 어… 응.”


하루가 몸을 일으켜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가방을 챙겼다.


“잘 가!”


다온이 뒤늦게 손을 흔들자 하루는 문 앞에서 한 번 돌아봤다. 짧게 고개를 까딱하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다온은 방금 하루의 머리를 만졌던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을 살짝 오므려봤다. 아직도 손끝에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헤헤….”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네. 그때, 벌컥 문이 다시 열렸다.


“강다온! 교실 가자!”


도경이 숨을 몰아쉬며 들어오다가 우뚝 멈췄다. 그리고 다온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뭐야.”

“응? 뭐가?”

“너 왜 그렇게 실실 웃고 있어?”

“내가? 전혀 아닌데!”


다온은 괜히 찔린 사람처럼 황급히 가방을 챙겼다. 도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상한데. 방금 복도에서 마주친 차하루는 귀가 시뻘게져서 가더니. 얘는 또 왜 이래. 도경은 가방에 바카라을 쑤셔 넣는 다온을 한동안 바라봤다.


“야, 강다온.”

“응?”

“너네 설마….”


다온의 어깨가 움찔했다.


“뭐, 뭐가?”


도경이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나 몰래 맛있는 거 먹었냐?”

“…응?”


다온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잔뜩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이 스르르 빠졌다.


“아니야. 그런 거.”


그러더니 황급히 가방을 둘러멨다.


“종 쳤어! 다음 시간 체육이야. 나 먼저 간다!”

“야, 강다온!”


다온은 대답도 하지 않고 동아리실을 빠져나갔다. 도경은 닫힌 문을 한동안 바라봤다.


“저것들 뭐 있네, 있어….”


혀를 쯧 차는 순간 본종이 울렸다.


“아, 미친.”


도경도 뒤늦게 가방을 낚아채 들고 교실로 뛰어갔다.






이런 온라인카지노북을 실수로 삭제했....ㅜㅜ

나중에 묶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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