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 시작되는구나.

그는 고양이로소이다 9편

by사랑의 생존자


“오랜만에 다온이 얼굴도 보고, 이렇게 밥까지 같이 먹으니까 너무 좋은데?”


재하가 국을 한 숟갈 뜨며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다온도 따라 웃었다. 뭐가 됐든 고3이라 바쁠 텐데, 자기 때문에 시간을 내준 선배가 그저 고마웠다. 그때 근처 테이블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냐, 저 조합은? 사귀나?”

“몰라. 근데 둘 다 키 크고 선남선녀라 은근 잘 어울린다.”

“서도경이랑 차하루, 우리 학교 아이돌들이잖아.”


다온은 숟가락을 든 채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테이블 건너편. 도경과 하루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아이돌들이라…. 평소답지 않게 둘 다 소리까지 내며 웃고 있었다. 조금 어색해 보이기는 했지만, 다온의 눈에는 제법 즐거워 보였다. 꼭 둘만 아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도경이 차하루 마음에 안 들어 하지 않았나. 아니. 그보다— 다온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역시, 차하루 잘 웃는 애였다니까. 수미는 쟤가 뭐가 시크하다는 거야.


그러다 괜히 도경 쪽을 한 번 더 힐끗 봤다. 도경은 어릴 때부터 어디서나 눈에 띄는 친구였다. 늘씬하고 훤칠한 키에 시원시원하게 예쁜 이목구비, 남의 시선 따위 개의치 않는 당당한 성격까지. 그리고 그 옆에는 차하루가 있었다. 키 큰 도경 옆에서도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무심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도경 못지않게 시선을 끄는 녀석.


그러고 보니 둘이 꽤 잘 어울렸다. 그런데 왜 기분이 조금…. 다온은 말없이 숟가락 끝으로 식판 위의 밥알만 괜히 꾹꾹 눌러댔다.


“뭐가 그렇게 속상하시나, 우리 후배님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다온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턱을 괸 채 이쪽을 바라보는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


“아, 선배. 그게 아니고….”


다온은 황급히 급식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굴리다 반찬 칸에 놓인 김치를 발견하고는 얼른 입을 열었다.


“김, 김치! 김치가 좀 부족한 것 같아서요. 더 갖고 올걸.”

“김치?”


재하는 미심쩍은 얼굴로 다온을 잠깐 바라봤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다온의 시선이 향해 있던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몇 테이블 건너편의 도경과 하루. 그 둘을 힐끗거리며 수군대는 주변 학생들. 그리고 애꿎은 밥알만 숟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있는 다온. 아하. 재하가 턱을 괸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상황 파악 끝.


그건 그렇고, 서도경이 저렇게 영혼 없이 웃는 것도 처음 보네. 저건 아무리 봐도 지독한 동족혐오의 현장인데.


재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제 급식판에서 김치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온의 반찬 칸에 툭 내려놓았다.


“자. 내 거 먹어. 젓가락 안 댔으니까 안심하고.”

“아, 감사합니다.”

“다온이가 드디어….”


재하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청춘이 시작되는구나.”

“네?”


다온이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 반응에 재하는 참지 못하고 짧게 웃었다.


강다온.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후배였다. 잘 웃고, 사람 좋아하고, 가끔 엉뚱하고. 마냥 밝고 해맑은 녀석인데도 가끔은 웃는 얼굴이 이상하게 쓸쓸해 보일 때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저 녀석이 아무 걱정 없이 웃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놓였다.


“다온아.”

“네?”

“나는 뭐든 응원한다.”

“…뭘요?”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온이 묻자 재하가 씨익 웃었다.


“뭐든.”


다온은 잠시 재하를 빤히 바라보다, 결국 같이 피식 웃었다. 이 선배는 옛날부터 그랬다.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장난만 치는 것 같은데 남의 기분을 귀신같이 알아채곤 했다.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할지, 딱 필요한 순간에 사람 마음을 슬그머니 풀어주는 이상한 재주가 있었다. 그때 재하가 손을 길게 뻗었다.


“거기 뭐 묻었다.”

“어디요?”


재하의 긴 손가락이 다온의 어깨를 살짝 스쳤다. 툭. 작은 먼지 하나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됐다.”


재하는 손을 거두려다 문득 멈췄다.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어깨에 남은 먼지를 털어주듯 한 번 더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제가 할게요.”


다온이 웃으며 그 손을 살짝 밀어냈다. 재하는 순순히 손을 거두어들이며, 몇 테이블 건너편을 흘끗 봤다.


차하루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조금 전까지 다온의 어깨 위에 있던 자신의 손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재하는 입꼬리를 꾹 누르며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생각보다 솔직한 타입이네.


“큭.”


갑자기 혼자 고개를 숙이고 웃는 재하를 보며 다온이 미간을 다시 찌푸렸다. 음. 좋은 선배긴 한데…. 도경 말대로 또라이— 아니. 가끔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니까. 다온은 몰래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선배, 이제 갈까요?”

“어? 아, 그래.”


재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판을 들기 전, 건너편을 한 번 더 흘끗 봤다. 하루는 이미 식판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재하의 입꼬리가 다시 슬쩍 올라갔다.





점심시간이 끝나갈수록 동아리실 창문 너머로 들리던 운동장의 소음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부원들이 모두 돌아온 것을 확인한 도경이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손뼉을 딱 쳤다.


“자,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김수미 정보통에 의하면—”


말끝을 길게 끌며 괜히 뜸을 들였다.


“저희 작전, 꽤 성공적인 것 같습니다.”


도경은 벽시계를 흘끗 확인했다. 아직 점심시간이 십오 분 정도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지금부터 자유시간! 저는 방송부에 가야 하므로 이만!”


혼자 거창하게 마무리한 도경은 정말 바람처럼 동아리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 남은 세 사람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아.”


재하가 느릿하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슬슬 가봐야겠네. 명색이 고3 수험생이라.”


가방을 챙겨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가던 재하가 두어 걸음 못 가 멈춰 섰다. 그러고는 슥 몸을 돌렸다.


“아, 다온아.”

“네?”

“우리 다온이.”


다온의 어깨가 움찔했다. 평소보다 지나치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무엇보다 앞에 붙은 ‘우리’라는 친근한 호칭은 재하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왜 그러세요?”


다온이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자, 재하가 싱긋 웃어 보였다. 옆에 앉아 있던 하루의 시선이 조용히 올라왔다.


“내가 그동안 너무 뜸했지? 앞으로 자주 올게.”

“네? 아니에요. 바쁘실 텐데.”

“아니야. 자주 오도록 노력할게.”

“아니, 진짜 그럴 필요까지는….”

“쉬는 시간마다 와야지.”


재하는 ‘쉬는 시간마다’에 유난히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고는 슬쩍 하루 쪽을 바라봤다. 다온은 영문도 모른 채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선배 편하실 때 오세요.”


재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루가 앉아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하루의 옆을 지나치는 찰나, 하루에게만 들릴 만큼 목소리를 낮췄다.


“점심시간은 양보할게.”


하루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재하는 재빨리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돌아서서는 태연하게 손까지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후배님들—”


드르륵. 문이 닫히고 하루와 다온만 남은 동아리실이 한층 조용해졌다. 하루는 재하가 사라진 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쪽 눈썹 끝이 조금 올라가 있었다. 다온은 그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저거, 차하루가 뭔가 마음에 안 들 때 나오는 버릇인데.


…선배가 기분 상하게 했나?

다온이 걱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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