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양이로소이다 8편
점심시간. 운동장 저편에서 공 튀는 경쾌한 소리와 아이들의 해맑은 함성이 섞여 아득하게 흘러들어 왔다. 그에 비해 동아리실 앞 복도는 한산했다.
“여어!”
문이 열리기도 전에 경쾌한 목소리가 먼저 동아리실 안으로 들어왔다.
“후배님들이 이 몸을 불러주시다니. 감격해서 한걸음에 달려왔다네!”
재하가 한 손을 과장되게 흔들며 들어왔다. 교복 셔츠는 다림질이라도 한 듯 반듯했고, 소매만 팔꿈치 아래까지 단정하게 접혀 올라가 있었다. 아침부터 학교에 있었을 텐데 옷깃 하나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그런 차림새와 달리 말투는 한없이 가벼웠다.
선배 여전하구나. 다온은 오랜만에 보는 능청스러운 모습에 작게 웃었다. 재하는 빈 의자 하나를 발끝으로 끌어당겨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문자 봤죠?”
도경이 묻자 재하는 턱을 괸 채 다온 쪽을 슬쩍 바라봤다. 잠시 뒤 눈매가 장난스럽게 휘었다.
“그러니까….”
재하가 느긋하게 말을 끌었다.
“오늘 나는 다온이랑 단둘이 밥을 먹으면 되는 거지?”
일부러 뜸까지 들인 뒤 덧붙였다.
“그것도 아—주 다정하게.”
도경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아, 저 허우대만 멀쩡한 또라이.
“특별히 다정할 필요까지는 없고요.”
도경이 딱 잘라 말했다.
“그냥 평소처럼만 하세요.”
“그치. 나야 뭐 평소에도 워낙 다정하니까.”
재하는 키득거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들른 동아리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드르륵.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재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느슨했던 그의 눈매에 금세 짙은 흥미가 어렸다.
“오.”
낮은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소문의 그 주인공 등장이네.”
차하루였다.
그런데—
평소와 조금 달랐다.
대충 걷어 올린 셔츠 소매는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고, 앞머리는 바람이라도 세게 맞은 듯 흐트러져 있었다. 무엇보다 문 앞에 멈춰 선 하루의 가슴팍이 평소보다 조금 크게 오르내렸다. 꼭 어디선가 급하게 뛰어온 사람처럼. 늘 나른한 얼굴로 느릿느릿 걸어 다니던 차하루답지 않았다. 다온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이, 하루는 인사도 하지 않고 동아리실 안을 빠르게 훑었다.
그러다 다온을 발견하자 시선이 딱 멈췄다.
얼굴.
팔.
다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발까지.
하루의 시선이 다온을 위아래로 한 번 훑고 나서야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아주 조금 풀렸다. 낮은 숨이 짧게 새어 나왔다.
다온은 잠깐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평소처럼 손을 흔들었다.
“안녕!”
하루는 잠시 다온을 바라봤다. 그리고 늘 그랬듯 눈을 맞추고 고개를 가볍게 까딱했다. 아. 평소의 차하루다. 다온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스르르 번졌다. 재하는 그 짧은 광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소리 없는 휘파람을 불더니, 이번에는 하루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이야. 소문의 차하루? 실물이 더 잘생겼네. 과연 선악과가 될 만해.”
하루의 시선이 잠깐 재하의 얼굴에 머물렀다.
“누구?”
말이 짧았다. 존댓말인지 반말인지조차 애매한 한마디였다. 재하는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한 손을 제 가슴 위에 얹으며 입을 열었다.
“아, 나를 모르다니. 이거 좀 상처인데. 나는—”
“유재하 선배.”
도경이 중간에서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귀찮다는 듯 손가락으로 하루를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는, 아시겠지만 차하루.”
“반가워. 선악과 후배.”
재하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하루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재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재하 역시 생글생글 웃는 얼굴 그대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도경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저기요. 저희 동아리실에 칼이나 총은 없으니까 결투는 다음에 하시고요.”
벽시계를 확인한 도경이 손뼉을 짝 소리 나게 쳤다.
“둘 다 문자 봤으니까 설명은 생략할게요. 자, 오늘 계획 다시 확인!”
도경이 손가락으로 차례차례 사람을 가리켰다.
“나랑 차하루가 밥 먹고.”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손을 돌렸다.
“재하 선배랑 강다온 둘이 밥 먹기. 이왕이면 웃으면서.”
“예썰!”
재하가 장난스럽게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며 경례를 붙였다. 하루는 별말 없이 고개만 한 번 까딱했다.
“좋아.”
도경은 그걸로 됐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 쪽으로 턱을 까딱했다.
“야, 가자.”
하루도 몸을 돌렸다. 두어 걸음쯤 옮겼을 때였다. 발이 문득 멈췄다. 하루가 뒤를 돌아봤다. 시선이 곧장 다온에게 향했다.
“있다가 보자.”
“…응?”
다온의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마주치면 고개 한 번 까딱하는 게 전부였던 애였는데, 말로 건네는 인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온은 눈을 몇 번 멍하니 깜빡이다가, 뒤늦게 얼떨결에 손을 흔들었다.
“어, 어! 잘 가! 이따 봐!”
도경과 하루가 복도로 빠져나가고 문이 천천히 닫혔다. 다온은 닫힌 문을 잠시 바라봤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있다가 보자라니. 또 보는 건가. 우리 땡이…. 아니. 차하루랑. 오른쪽 뺨에 작은 보조개가 패였다. 재하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낮게 웃었다.
“다온아.”
“네?”
재하가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가자.”
“아, 네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선배.”
“뭘.”
재하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 재밌는 일에 빠질 수 없지.”
“네?”
“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가자.”
다온이 제대로 듣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하자 재하는 먼저 문 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복도로 나서는 그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꼭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점심시간의 급식실은 식판 부딪치는 소리와 학생들의 목소리로 정신없이 붐볐다. 그 틈에 도경과 하루가 나란히 배식 줄에 서자 근처에서부터 묘한 웅성거림이 번지기 시작했다.
“뭐야, 차하루 또 급식실 왔어?”
“어? 옆에 서도경 아니야?”
“들었어? 김수미 말로는 둘이 봉사부 행사 때문에 같이 먹는 거래.”
“야, 봉사부 들어갈걸 그랬나?”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도경의 손이 슬쩍 주먹을 쥐었다. 좋았어. 생각보다 잘 먹히고 있군. 역시 김수미. 빠르다, 빨라.
도경은 아무렇지 않은 척 급식판 하나를 챙겨 들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주변에 다 들으라는 듯, 평소보다 한 톤 밝은 목소리를 냈다.
“차하루.”
하루가 고개를 돌렸다. 도경은 활짝 웃으며 급식판을 내밀었다.
“맛있게 먹어.”
“….”
하루는 급식판을 받지도 않고 도경을 빤히 바라봤다. 뭐 하는 거지. 말하지 않아도 눈에 그대로 쓰여 있었다. 도경은 웃는 얼굴 그대로 이를 살짝 악물었다.
“협조해라.”
입술만 미세하게 움직여 낮게 읊조리자, 하루는 잠시 그런 도경을 바라보다 별말 없이 급식판을 받아 들었다.
하루로서는 최대한의 협조였다.
“와, 서도경이랑 차하루 둘이 뭐야?”
“둘이 혹시 사귀나?”
“몰라. 근데 둘 다 길쭉길쭉해서 그런가. 그림은 좋네.”
구석 자리에 앉은 도경은 근처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다 숟가락을 들던 손을 잠시 멈췄다. …아니. 그쪽으로 몰고 가면 안 되는데. 강다온이랑 엮인 소문 없애려다가 새로운 썸을 만들게 생겼다. 그것도 저 재수 없는 놈이랑 내가.
도경은 작게 혀를 차며 맞은편을 바라봤다. 정작 원흉인 차하루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부대찌개를 떠먹고 있었다. 에휴, 내 팔자야. 도경은 국을 한 숟갈 뜨다가 다시 맞은편을 힐끗 봤다. 잘생기긴 했다. 그건 인정.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제 취향은 아니었다. 키가 쓸데없이 큰 것도 그렇고. 지나치게 반듯한 얼굴도 그렇고. 무엇보다 저— 주변에서 뭐라 떠들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득 며칠 전 수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랑 차하루 은근히 성격 비슷해서 서로 싫어하는 거 아니냐? 일종의 동족혐오 같은 거.’
도경은 입안의 음식을 천천히 삼켰다. …개소리. 내가 어디 저 재수탱이랑 닮았다고. 시선을 느꼈는지 하루가 숟가락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눈만 들었다.
“뭘 봐.”
아우. 재수 없어. 도경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로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게 진짜 동족혐오인가.
아, 됐고. 지금 중요한 건 강다온이었다. 도경은 쓸데없는 생각을 밀어내듯 고개를 한번 흔들었다.
“뭐, 그래도.”
맞은편의 하루를 보며 입을 열었다.
“대충은 수습된 것 같네.”
하루가 젓가락질을 멈췄다.
“뭐가.”
“강다온.”
도경은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번 휘저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대놓고 밥 먹는 거 소문 좀 돌면, 적어도 너랑 강다온이 썸 탄다는 어이없는 소문은 잠잠해지겠지.”
도경이 잠깐 뜸을 들였다.
“아침에 내가 사진 보내준 거 봤지? 신발장 엉망 된 거.”
하루의 손이 멈췄다. 떠놓은 국물이 숟가락 안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도경은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네 잘난 팬들 덕분에 우리 강다온 학교생활만 피곤해지게 생겼잖아.”
“팬은 무슨….”
“아, 됐고.”
도경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하루의 말을 잘랐다.
“야. 근데 강다온 말인데.”
도경의 표정이 조금 진지하게 가라앉자, 하루가 시선을 올려 도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걔 그런 쪽으로 진짜 아무 생각 없는 애야.”
“알아듣게 말해.”
“그러니까 남녀 사이의 연애 감정 같은 거 말이야.”
도경이 눈을 가늘게 뜨며 한숨처럼 덧붙였다.
“몸만 컸지 그런 쪽은 거의 초딩 수준이라고.”
하루는 여전히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도경은 젓가락 끝으로 하루를 콕 가리켰다.
“그러니까 너, 강다온한테 괜히 흑심 품지 마라.”
“…흑심?”
하루가 어이없다는 듯 도경을 바라보다 낮게 웃었다.
“그건 내가 아니지 않나.”
“뭐?”
“동아리 들어오라고 한 것도.”
하루가 기다란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친해지고 싶다고 한 것도.”
손가락을 하나 더 접었다.
“다 내가 아닌데? 그럼 오히려 강다온 쪽 아니야?”
“야. 그거는 네가 땡이를 닮아서—”
“…땡이?”
도경의 입이 딱 멈췄다.
아.
실수했네.
도경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하루의 시선이 완전히 도경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땡이가 뭔데?”
“뭐, 그건….”
도경은 컵을 내려놓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나중에 강다온한테 직접 물어봐.”
“뭘?”
“아, 그냥 직접 물어보라니까.”
하루가 더 물으려 하자 도경은 아예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 문득 자기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다는 걸 깨닫고 손끝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도경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됐고. 지금은 협조나 해.”
“뭘 또.”
짧고 무성의한 대답에 도경의 턱이 아주 조금 들렸다. 진짜. 말투 하나하나 마음에 안 드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웃어. 나처럼.”
도경은 두 손가락을 제 입꼬리 양옆에 대고 위로 쭉 끌어올렸다. 하루는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마치 처음 보는 생물을 관찰하듯. 도경이 손을 내렸다.
“너 그때 강다온이랑 있을 때 그렇게 잘 웃었다며.”
“내가?”
하루가 미간을 좁히며 뭔가 말하려 하자 도경이 바로 끊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또 강다온 신발장에 계란 들어가는 꼴 보고 싶냐?”
그 말에 하루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하.”
길게 숨을 내쉰 하루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웃었다.
“….”
도경은 말없이 그 얼굴을 바라봤다. 웃기는 웃는데. 입만 웃고 있었다. 눈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도경의 얼굴이 절로 찌그러졌다.
“아, 진짜 못 봐주겠네.”
그러다 문득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우리 둘 다 강다온 때문에 지금 뭐 하는 거냐.”
그래도 도경은 다시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하하.”
하루도 마지못해 따라 했다.
“…하하.”
몇 초 동안 둘 사이에 영혼 없는 웃음소리만 흘렀다. 옆을 지나던 학생 하나가 이상한 눈으로 두 사람을 한번 쳐다보고 지나갔다. 도경의 웃음이 먼저 멎었다. 하루도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 짧고 처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경이 결국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됐다.”
도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루도 질렸다는 듯 식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먹자.”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편이 나았다. 도경은 부대찌개를 뜨다가 문득 맞은편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다 조금 뜻밖이라는 듯 눈길을 멈췄다.
“뭐야. 그래도 쟤네는 잘하고 있네.”
도경이 턱으로 몇 테이블 건너편을 가리켰다. 하루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따라갔다. 다온과 재하가 마주 앉아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다온이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을 때마다 오른쪽 뺨에 익숙한 보조개가 깊게 패였다. 재하 역시 웃으며 무언가 말하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온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툭, 툭. 어깨에 붙은 무언가를 털어주는 듯한 손길이었다. 다온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웃다가 재하의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하루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재하의 손은 이미 다온의 어깨에서 떨어졌는데도 하루의 시선은 한동안 그쪽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