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꽤 친해졌나?

그는 고양이로소이다 5편

by사랑의 생존자


“머리 좀 쓰다듬어봐도 돼?”


음료수를 마시려던 도경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갑자기 머리는 왜.”

“…라는 부탁을 하려면 얼마나 친해져야 할까?”


아. 또 그 고민이구만. 도경은 지겹다는 듯 고개를 한번 흔들고는 캔을 다시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맞은편의 다온을 지그시 바라봤다.


“글쎄. 내 기준으로는 엄청 친해야 가능하지.”


그러고는 다온을 한 번 위아래로 훑었다.


“게다가….”


남자애한테 머리를 만져도 되냐고 물을 정도면 적어도 썸 정도는 타야 하지 않겠냐. 거기까지 말하려던 도경은 입을 다물었다.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강다온이 이해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도경은 다온을 흘끗 보며 말을 돌렸다.


“그래서 뭐, 진척은 있는 거야?”


다온은 빨대로 음료를 길게 빨아 마시더니 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은, 내 생각엔 나랑 차하루 꽤 친해진 것 같거든.”

“…그래?”


도경의 눈이 의심스럽게 가늘어졌지만, 다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빛냈다.


“일단 마주치면 나한테 항상 먼저 인사해.”

“난 걔가 너한테 인사하는 거 본 적 없는데?”

“눈인사!”


다온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나 보면 딱 눈 마주치고 고개를 이렇게 살짝 까딱하거든.”


직접 고개까지 까딱이며 그럴싸하게 재현해 내는 다온의 모습에 도경이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인사라기보단… 최소한의 예의 아니냐?”

“아니거든? 엄청 반갑게 한다니까.”

“다온아.”


도경이 다온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그건 슬롯생활이라는 거야. 지나가다 옆집 아저씨 만나도 인사는 하잖아. 아니면 그냥 시야에 네가 들어와서 반사적으로—”

“야.”


다온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도경은 결국 웃음을 삼키듯 코로 짧게 숨을 뱉었다.


“그래. 그렇다 치자. 또?”

“그리고 또 이거!”


다온은 이번엔 자신 있다는 듯 앞에 놓인 파인애플 탄산수 캔을 검지로 가리켰다.


냉장고를 써도 되냐고 물었던 바로 다음 날, 차하루는 파인애플 탄산수를 아예 박스째 사 들고 와 동아리실 냉장고 안을 빼곡하게 채워 넣었다. 다온이 옆에서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하루는 냉장고 문을 툭 닫으며 무심하게 한마디 던졌었다.


“맘껏 먹어도 돼.”


그때를 떠올리자 다온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도경은 그런 다온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거 원래 차하루가 좋아하는 거라며.”


도경이 턱으로 캔을 가리켰다.


“지가 먹으려고 저렇게 잔뜩 사놓은 거잖아.”

“나보고 먹어도 된다고 했다니까? 그것도 맘껏!”

“됐고.”


도경이 다온의 양어깨를 덥석 잡았다. 이어질 말을 미리 차단하듯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딱 그 정도 사이에서 ‘머리 좀 쓰다듬어도 돼?’ 하면.”


도경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너 진짜 변태 되는 거야.”

“…그런 거야?”

“어. 그런 거야.”

“아니, 근데 그것 말고도—”


도경은 아예 손바닥을 들어 다온의 말을 막았다. 그러다 벽시계를 흘끗 본 순간 얼굴이 굳었다.


“아, 쓸데없는 소리 듣느라 또 늦었네.”


도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챙겼다.


“하여튼 내 말 명심해. 나 간다!”

“야, 서도경! 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다온의 억울한 외침을 뒤로한 채, 도경은 손만 대충 흔들며 복도 저편으로 냅다 뛰어 나가 버렸다.


“아, 진짜 친해진 거 맞는데.”


다온은 투덜거리며 닫힌 문을 빤히 노려보았다. 잠시 입술을 삐죽이던 다온은 가방을 뒤적여 작은 수첩을 꺼냈다. 일명 [차하루 프로필]. 최근 들어 틈만 나면 차하루를 관찰해 하나씩 적어두고 있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고작 몇 줄뿐이었는데, 어느새 한 페이지가 빼곡했다. 다온은 적어둔 것들을 하나씩 훑었다.


“기분 좋을 땐 손끝으로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펜 끝이 다음 줄로 내려갔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을 땐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가고.”


그리고 그 아래.

당황하거나 부끄러울 때는—

다온의 펜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러고 보니 차하루가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음….”


어땠더라. 생각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장면이 없었다. 다음엔 좀 잘 봐야겠다. 한참 고민하던 다온은 문득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슬슬 올 시간인데. 시선이 자연스럽게 동아리실 문으로 향했다.


드르륵.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다온의 오른뺨에 작은 보조개가 패였다. 역시. 시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킨단 말이지. 아, 이것도 이따가 적어놔야겠다. 다온은 잽싸게 수첩을 덮어 가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루는 점심시간인데도 여전히 잠이 덜 깬 얼굴로 들어왔다.


“안녕!”


다온이 손을 흔들자 하루는 고개를 한 번 까딱하고 곧장 냉장고부터 열었다. 치익. 탄산수를 몇 모금 길게 마신 하루는 캔을 손에 든 채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하….”


낮게 숨을 내쉬자 눈가에 남아 있던 졸음이 조금 걷힌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온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물을 마시고 나면 한동안 멍하니 있곤 하던 땡이가 떠올랐다.


피식. 작은 웃음소리에 하루의 시선이 다온에게 닿았다. 다온은 얼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한 번 더 흔들었다. 하루는 그런 다온을 잠깐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까딱했다.


봤지? 저거! 저게 얼마나 다정한 눈인사냐고! 아까 도경에게 못다 한 항변이라도 하듯 다온의 눈이 반짝였다. 하루는 그대로 맞은편 자리에 앉아 팔을 포개더니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날, 서로 엄마 이야기를 나눈 뒤부터 하루는 빠짐없이 점심시간마다 동아리실을 찾았다. 탄산수를 하나 마시고, 잠깐 낮잠을 잔 뒤 시간이 되면 농구를 하러 갔다. 매일 비슷했다. 그리고 어느새 다온에게도 익숙한 풍경이 되어 있었다.


잠시 후 맞은편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다온은 바카라상에 턱을 괴고 잠든 하루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했다. 그 뒤로 둘이 긴 대화를 나눈 적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점심시간을 이렇게 보냈다. 하루는 자고, 다온은 바카라을 읽고. 가끔 눈이 마주치면 몇 마디 나누는 정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불편하지 않았다.


다온은 원래 조용한 분위기를 잘 견디지 못했다. 어색한 사람과 둘이 남으면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 아무 말이나 떠들었고, 집에 돌아가서야 뒤늦게 이불을 걷어차곤 했다. 그런데 차하루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이상하게 어색하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다온은 잠든 하루를 잠깐 바라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고는 집에서 가져온 소설바카라을 펼쳤다. 지난번 체육 교과서 사건 이후로는 제대로 된 바카라을 꼭 챙겨 다녔다. 복도 저편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바카라장을 살짝 흔들고, 그 사이로 하루의 고른 숨소리가 이어졌다. 다온은 바카라장을 한 장 넘겼다.


아, 좋다.

별것도 아닌데.

그냥 이 시간이 참 좋네.


지이잉.

바카라상 위 휴대폰이 울리자 다온이 화들짝 놀라 얼른 낚아챘다.


“으악.”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맞은편에서 옷자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루가 팔에서 얼굴을 떼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헝클어진 앞머리 아래로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아, 미안. 나 때문에 깼지?”

“…아니. 괜찮아.”


목소리에도 아직 잠이 묻어 있었다. 다온은 미안한 얼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도경에게 온 문자였다.


[오늘 방송반 급한 행사 때문에 밥 같이 못 먹을 듯! 먼저 먹어라, 미안!]


다온의 입술이 살짝 삐죽 나왔다. 혼자 밥 먹는 거 싫은데.


“왜?”


잠긴 목소리가 불쑥 들려오자, 다온은 얼른 표정을 풀었다.


“응? 아, 도경이가 오늘 점심 같이 못 먹는다고. 근데 어차피 나도 별로 배 안 고팠—”


꼬르륵. 너무도 선명한 소리가 동아리실 안에 울렸다. 다온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황급히 배를 감싸며 애써 웃었다.


“속… 속이 안 좋나? 왜 이러지.”


하루는 아무 말 없이 다온을 바라봤다. 몇 초쯤 지났을까.


“큭.”


결국 참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온의 귀 끝까지 뜨거워졌다. 아, 진짜. 하필 배꼽시계는 또 왜 이렇게 정확한데.


“하하. 그, 그럼 나는 밥 먹으러 가야겠다.”


다온이 민망함을 털어내듯 급히 바카라을 덮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같이 가자.”

“응?”

“밥 먹으러.”


다온의 움직임이 멈췄다.


“…너 점심 안 먹는다고 하지 않았어?”

“뭐, 나도 마침 배고프고.”


하루는 별일 아니라는 듯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자느라 구겨진 셔츠 소매를 대충 펴며 먼저 문 쪽으로 향했다. 다온은 그대로 앉아 하루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같이?

차하루가?

밥을?

나랑?

둘이?


문 앞까지 걸어간 하루가 인기척이 따라오지 않자,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안 가?”

“어?”

“얼른.”


하루는 처음부터 같이 밥을 먹기로 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다온을 재촉했다. 다온은 잠깐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 가…… 같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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