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양이로소이다 4편
점심시간, 창문 너머 화단에서는 잡초를 뽑는 하루의 모습이 내다보였다. 옆에는 뽑아낸 잡초가 수북이 담긴 커다란 봉투가 벌써 두 개나 놓여 있었다. 하루는 허리를 펴고 화단을 쓱 훑어보더니, 구석진 자리에 용케 남아 있던 작은 잡초 하나를 발견하고는 다시 쪼그려 앉았다.
“저거, 무슨 잡초 못 뽑아서 한이 맺힌 귀신이라도 붙었나.”
도경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자, 창가에 딱 붙어 있던 다온 역시 입을 멍하니 벌린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하루는 굳이 화단 맨 끝자락까지 걸어가 그 조그마한 잡초 뿌리까지 흙을 털어내며 뽑아내고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도경이 손목시계를 흘끗 확인하더니 이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늦었다. 강다온, 나 먼저 간다! 이따 봐!”
“어, 방송 잘하고 와!”
점심시간마다 방송반 마이크를 잡아야 하는 도경은 손을 짧게 흔들고는 서둘러 동아리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다온은 여전히 창밖의 하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차하루의 검푸른 머리칼이 바람이 결을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그 보송보송해 보이는 머릿결을 보고 있자니, 다온의 손끝이 허공에서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캬하….”
저렇게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두고 쓰다듬지도 못하다니. 그림의 떡이라는 게 딱 이런 심정일까. 다온은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대로 허공을 슬쩍 한번 쓰다듬어 보았다.
하루가 봉사부에 들어온 지도 벌써 한 달째였다. 첫인상과 달리 차하루는 맡은 일을 꽤 성실히, 아니 지나치다 싶을 만큼 구석구석 해냈다. 정확히는 청소라는 행위에 한해서만 말이다. 문제는 일이 끝나기만 하면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진다는 거였다. 덕분에 지난 한 달간 나눈 대화라곤,
‘간다.’
‘응.’
‘잘 가.’
‘뭐 해?’
‘청소.’
이 정도가 전부였다.
다온은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어보다 얼굴을 구겼다. 어떻게 대화가 전부 두 글자를 안 넘냐고. 친해져서 머리를 한 번 더 만져보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시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때, 복도 쪽에서 깔깔거리는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야, 차하루 좀 봐. 잡초 뽑는 데 무슨 광고 찍는 줄?”
“키가 187이래. 비율 미쳤다, 진짜.”
187cm?크다 싶긴 했는데 진짜 크구나. 어쩐지 동아리실에 들어올 때마다 문짝이 작아 보이더라. 꺄륵거리는 여학생들의 수다에 다온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차하루는 그냥 ‘하루’라고 부르면 싫어한대. 꼭 성까지 붙여서 차하루라고 불러야 된다더라.”
“왜?”
“강아지 이름 같아서 싫다는데?”
“아, 미쳤다…진짜 너무 귀엽지 않냐?”
강아지 이름 같아서라니…
다온이 저도 모르게 풋 웃음을 터뜨렸다가 이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가다듬었다. 본인이 싫어한다니 이건 아주 중요한 고급 정보였다. 앞으로는 부를 때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하루 말고.
차하루.
차하루.
차하루.
머릿속으로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던 다온은 가방 안쪽 깊숙이 손을 넣어 뒤적였다. 손에 잡힌 건 앙증맞은 수첩 한 권이었다.
[차하루 프로필]
* 이름: 차하루
* 키: 무척 큼
* 쉬는 시간: 주로 엎드려 자거나 농구
* 좋아하는 음료: 파인애플 탄산수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상대를 제대로 파악해야 제대로 친해질 수 있는 법. 다온은 여전히 빈칸이 빼곡한 수첩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다물었다. 뭐, 이제부터 하나씩 채워 나가면 그만이었다. 나 강다온,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로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올해가 가기 전에 반드시 차하루와 친해지고 말 테다. 그리고 꼭 한 번 더 머리를 쓰다듬는다!
다온은 '무척 큼' 옆에 작게 '187cm'라고 덧붙여 적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정성스럽게 새 정보를 적어 넣었다.
* 반드시 '차하루'라고 부를 것.
(하루 X. 강아지 이름 같아서 싫어함)
다온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수첩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온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차하루였다. 한 손에는 잡초가 가득 담긴 봉투를 들고 있었다. 긴 다리로 몇 걸음 성큼 들어온 하루는 봉투 입구를 한데 모아 천천히 묶기 시작했다. 별것 아닌 동작인데도 이상하게 눈이 갔다. 쓰레기 봉투 하나 묶는 게 저렇게 화보같이 보일 일인가. 다온은 잠깐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진짜 얜 잘났구나.
그러다 문득 손에 쥔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으아, 또 넋 놓고 쳐다볼 뻔했네. 다온은 급히 수첩을 덮어 가방 구석으로 가볍게 밀어 넣었다.
“안녕!”
하루의 손이 잠깐 멈췄다. 창가 구석에 다온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어색한 정적이 감돌자 다온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 말이나 뱉어냈다.
“너 때문에 화단에 잡초가 싹 사라졌다고, 교장 선생님이 봉사부 칭찬을 엄청 하시더라고!”
하루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한 번 무심하게 까딱였다. 다온은 할 말이 떨어져 괜히 가방 지퍼만 만지작거렸다. 그때, 하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좀 쉬어도 돼?”
하루의 손가락이 맞은편 빈 의자를 가리켰다.
“응? 아, 응. 당연하지.”
하루는 고개를 한 번 까딱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러더니 정말 쉬러 왔다는 듯 곧바로 바카라상에 엎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다온은 어이가 없어 눈을 깜빡였다.
…진짜 자네. 편의점에서도 그렇고, 머리만 대면 자는구나. 뭐, 나야 눈치 안 보고 편하게 감상할 수 있으니 나쁠 건 없지만.
엎드려 있는 하루의 정수리가 바로 눈앞에 놓여 있었다. 검푸른 머리칼이 햇살을 품어 은은하게 빛났는 검푸른 머리 칼 몇 가닥이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살랑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다온의 오른쪽 뺨에 보조개가 살포시 패였다.
다온은 근처에 굴러다니던 바카라 한 권을 잽싸게 집어 들었다. 뭐라도 읽는 척해야 덜 수상해 보일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흘끔. 또, 흘끔. 바카라장을 의미 없이 넘기는 척하며 하루의 뒤통수를 지그시 감상했다.
15분쯤 흘렀을까. 하루의 어깨가 움직이더니 느릿하게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몽롱한 시선이 맞은편 다온에게 닿았다.
“…아직 있었네?”
몰래 관찰하다 딱 걸린 다온은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아, 응! 바카라… 바카라 좀 읽고 있었어.”
다온은 얼른 들고 있던 바카라을 들어 보였다. 하루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가 바카라 표지에 머물렀다.
“…그걸 읽는다고?”
“어? 왜?”
다온 역시 그제야 제 손에 들린 바카라을 내려다보았다. 체육 교과서였다. 아니, 하필 집어도 왜 이런 걸 집은 거야. 그보다 이게 왜 동아리실에 굴러다니는데.
“하하, 내가 또 알고 보면 체육 이론에 관심이 좀 많거든.”
하루가 바카라을 한번 뚫어지게 보더니, 다시 다온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체, 체육 이론을 무시하는 거야? 그것도 편견이다? 엄청난 편견이야!”
“아.”
하루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려 세웠다.
“그래. 재밌게 읽어.”
“….”
다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거 비웃는 거 맞지. 분명 나 놀리는 거지! 다온은 말없이 체육 교과서를 쫙 펼쳐 제 얼굴을 가려버렸다. 그래, 마음껏 비웃어라 비웃어.
이럴 때일수록 얼른 자연스럽게 주제를 전환해야 한다. 머리를 굴려라, 강다온! 문득 시선이 구석진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다온은 얼른 교과서를 내렸다.
“저기, 너 뭐 마실 것 좀 줄까?”
하루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다온은 잰걸음으로 냉장고로 달려갔다. 아침에 원플러스원 행사로 사두었던 파인애플 맛 탄산수 한 캔이 다행히 남아 있었다.
캔을 꺼내 내밀자 하루의 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역시나. 편의점에서 처음 마주쳤던 날에도,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저 탄산수를 들고 다니는 걸 보았다. 차하루 역시 이걸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고마워. 나 이거 좋아하는데.”
“알아.”
생각할 틈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다온의 손이 그대로 멈추고, 하루도 캔을 받으려던 손을 잠깐 멈췄다. 시선이 마주치자 하루의 눈에 희미한 장난기가 번졌다.
“나를 많이 관찰했나 보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다온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이거 엄청 맛있잖아. 누구든 안 좋아할 수가 없으니까!”
하루는 더 추궁하지 않은 채 캔 고리를 따냈다. 치익— 탄산 빠지는 소리가 청량하게 퍼졌다. 여전히 눈가에는 옅은 웃음기가 맺혀 있었다.
“맛있긴 해.”
“그, 그렇지?”
“응. 잘 먹을게.”
시원하게 탄산수를 삼키는 하루를 보며 다온의 입꼬리도 슬그머니 따라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하루의 손에 쥐어진 건 고작 탄산수 한 캔이 전부였다.
“근데 너 점심은 안 먹어?”
“잘 안 먹어.”
“왜? 우리 학교 급식 얼마나 맛있는데.”
“시간 아까워서.”
“밥 먹는 시간이?”
“응. 자유시간이잖아. 잠도 잘 수 있고, 운동도 할 수 있고.”
다온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껌벅였다. 그러다 하루를 슬쩍 위아래로 훑어봤다. 저렇게 안 먹고도 키가 저렇게 크다니. 잠을 많이 자서 자라는 건가?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는 다온에게 하루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근데.”
“응?
하루가 손가락으로 냉장고를 가리켰다.
“이거 나도 써도 돼?”
“당연하지. 너도 봉사부인데. 좀 작고 낡긴 했어도 꽤 쓸 만해.”
다온이 냉장고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자 하루도 옆으로 다가왔다. 냉장고를 한번 훑어보던 하루의 시선이 문 한쪽에서 멈췄다.
“저건 뭐야?”
하루가 가리킨 곳에는 바랜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일곱 살 남짓의 다온이 엄마 품에 대롱대롱 안겨 있는 모습이었다. 모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란히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도경과 둘이서만 쓸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붙여둔 것이라, 이제는 사진이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이거? 어릴 때 나랑 엄마야.”
하루는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다온은 괜히 볼을 머쓱하게 긁적였다.
“엄마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거든. 엄마 생각날 때마다 제일 먼저 이 표정부터 떠올리고 싶어서 붙여놨어.”
말을 내뱉고 나서야 다온은 아차 싶었다.
“아…우리 엄마 돌아가셨거든. 내가 열 살 때.”
하루의 시선은 한동안 사진 위에 묵묵히 머물러 있었다. 다온은 괜히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너무 쓸데없이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나 싶었다. 아직 제대로 친해지지도 않았는데 무거운 분위기를 만든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저기, 내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나도.”
다온의 말이 뚝 끊겼다. 하루가 사진에서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읊조렸다.
“우리 엄마도 돌아가셨어.”
“…아.”
“열두 살 때.”
다온의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건 뭐.
나 탄산수 좋아해.
응, 나도.
그런 것도 아니고.
엄마 없어.
응, 나도.
…라니.
하루가 지나치게 무덤덤하게 말을 건넨 탓에 다온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만 몇 번 달싹이다가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미안.”
하루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뭐가?”
“아니, 괜히 네 개인적인 일을 들춘 것 같아서…….”
“내가 스스로 말한 건데?”
“그렇긴 한데.”
“그럼 됐지.”
민망할 정도로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하루를 보며 다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차하루, 생각보다 되게 쿨하네.
다온은 손끝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힘을 풀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미안해하며 눈치를 보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다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평소보다 한 톤 밝게 말했다.
“그럼 이것도 인연인데.”
다온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엄마 없는 애들끼리 한번 잘 친해져 보자!”
하루는 내밀어진 작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어이없다는 듯 짧은 실소를 터뜨렸다.
“엄마 정도는 없어야 너랑 친해질 수 있구나?”
“어?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하루는 당황한 다온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농담.”
그리고 다온이 내민 손을 잡았다.
“잘 지내보자.”
하루의 손은 생각보다 컸다. 손을 맞잡자 다온의 손이 거의 가려질 정도였다. 따스한 온기가 전달되자 다온의 손끝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가, 괜히 어색해져 먼저 손을 슬그머니 빼냈다. 손을 놓고 나서도 조금 전 닿았던 온기가 손바닥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다온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시선을 슬쩍 피했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친해진 기념으로 비밀 하나 알려줄까?”
하루가 말해보라는 듯 턱을 살짝 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영상을 남겨주셨거든. 내 생일마다 하나씩 열어보라고.”
“영상?”
“응. 스무 살 될 때까지, 총 열 개.”
“아.”
하루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물었다.
“무슨 내용인데?”
“음… 사실 대부분 잔소리지 뭐. 이를테면 재작년 영상은 '공부 열심히 해라!' 같은 거.”
“그래서 공부는 열심히 했고?”
“… 노력은 했지.”
“결과는?”
“그건….”
하루가 짧게 웃었다. 다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얘, 좀 얄미운 구석이 있네. 하루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다시 물었다.
“올해 건?”
“아직. 내 생일이 좀 남았거든.”
하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잠시 끊겼다. 하루는 말없이 다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온도 자연스럽게 그 시선을 마주했다.
새까맣고 깊은 눈. 땡이의 맑은 금빛 눈과는 전혀 달랐다. 처음에는 저 검푸른 머리카락 때문에 자꾸 땡이가 떠올랐는데. 이제는 땡이와 닮은 점보다 차하루에게만 있는 것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온은 괜히 시선을 피했다가 슬쩍 다시 하루를 봤다. 하루는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왜? 나 얼굴에 뭐 묻었어?”
다온이 볼을 손등으로 한번 문질렀다.
“아니.”
하루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 혹시 괜찮으면….”
드르륵.
“강다온! 미안, 늦었지? 빨리 밥 먹으러 가자!”
문을 열고 들어온 도경이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도경의 눈동자가 다온과 하루 사이를 가쁘게 오갔다. 그러더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입모양으로 물었다.
'방해함?'
다온이 눈을 부릅뜨는 사이 하루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갈게.”
“어? 잠깐!”
다온이 얼른 하루를 불러 세웠다.
“너 아까 뭐 말하려고 했잖아.”
문고리를 잡은 하루가 돌아봤다.
“아.”
“뭔데?”
하루는 대답을 기다리는 다온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뭐, 됐어.”
“왜?”
“다음에 말하지 뭐.”
“아, 뭔데! 말해주고 가!”
다온이 다급하게 한 걸음 따라붙자, 하루는 그런 다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낮게 실소를 흘렸다.
“궁금해?”
“당연히 궁금하지!”
“그럼 다음에.”
“다음? 다음이 언젠데?”
하루는 더 대답하지 않고 무심하게 문을 열었다.
“밥 맛있게 먹어.”
문이 닫히고, 다온은 황당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도경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내가 뭔가 잘못한 건가?”
다온은 대답도 하지 않고 닫힌 문만 노려봤다.
혹시 괜찮으면….
괜찮으면 뭐.
대체 뭐가 괜찮으면 인데.
게다가—
궁금해? 그럼 다음에라니.
“아! 진짜, 사람 궁금하게!”
갑자기 터진 소리에 도경의 어깨가 움찔했다.
“야, 미안하다니까!”
“아니, 너 말고!”
다온은 씩씩거리며 가방을 뒤졌다. 아까 넣어둔 작은 수첩을 꺼내 펼쳤다. 잠깐 고민하던 연필 끝이 맨 아래로 내려갔다.
[차하루 프로필]
* 말하다 말고 사람 궁금하게 하는 버릇 있음.
그리고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 약간 얄미운 성격.
“야, 강다온. 근데 무슨 얘기 했는데?”
“아, 별거 아니야.”
다온은 대충 대답하며 수첩을 덮었다. 그러고도 잠깐 닫힌 문을 흘끗 바라봤다. 그래도 오늘은 두 글자짜리 대화에서 꽤 벗어났으니,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곧 자신을 보며 얄밉게 웃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다온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다 다시 수첩을 펼쳤다.
* 약간 얄미운 성격.
잠시 그 글자를 빤히 내려다보던 다온은, 연필로 '약간'이라는 단어 위에 굵게 줄을 벅벅 그어 버렸다.
* 약간 얄미운 성격.
…진짜 얄미워 죽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