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사랑

미친 사랑을 하는 자의 행복

by제이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
꽃과 촛불과 술이 있어요
당신이 안 오신다면
이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당신이 오신다면
또한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폐루시아 시인 루미의 詩-



60년대 초등학교 졸업반 때.
반 아이들에게 존경,사랑을 받던 한 애가 있었다.

천방지축이나 감수성 많았던 그때, 어린 우리들이 보기에도 그 애는 너무 조신하고 예뻤다.
공부도 잘했지만 박학다식했는데
그 애 집에 함께 사는 철학 전공한 삼촌이 그녀에게 매일 많은 걸 가르쳐 준다는 소문.
그랬던 그녀가 대도시로 이사 가면서 명문여중에 입학했다.

몇 번 편지가 오가다가 연락이 끊어졌다.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 되고서 어쩌다 그 애를 만나게 되었다.
고혹적인 여인이 된 그 친구.
그러나 그 아름다운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

친구는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미친 사랑.
남자는 이 여자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온 마음을 다해 남자를 사랑하고 사랑한다.
그가 알아주던 몰라주던.

청춘의 한때.
미친 사랑을 하는 사람들.
반응 없는 상대를 그리워하며
답장 없는 편지를 쓰고 쓴다.
그녀의 모습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 지나칠 골목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린다.
급기야 몸져 누워 입원하는 이도 있었다.

가곡 '그 집 앞'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이장희의 '그건 너'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웬일인지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그건 너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사랑하는 그의 집 앞을 맘 졸이며 서성거리는 이.
종일 그녀에게 전화하다가 막상 받으면 끊으며 오열하는 이.

이루어질 수 없는데도,
본인도 어쩌지 못하는 사랑.
미친 사랑.

반세기가 흘렀다.
청춘의 한때
이루어지지 않을 미친 사랑을 했던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내 친구도...

그런데
슬프게도 미친 사랑은 한때.
세월이 흐르면 정열은 사라진다.
허무하게도 미친 듯 사랑했던 그녀도 늙고 백발이 되고 치매에 걸리고 세상에서 없어진다.
이슬 같고 그림자 같은 허무한 인간을 사랑했던 덧없는 한때의 사랑.

60년대 방영된 영화 '초원의 빛'.
서로 사랑하는 한 연인.
어쩌다 보니 오해는 오해를 낳고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여주인공 나타리우드는 급기야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한다.
세월이 흘렀다.
재회하는 연인들.
미친 사랑을 했던 빛나던 그 청년은
평범한 한 여자의 남편
칭얼대는 아기의 평범한 농부 아빠가 되어있었다.
빛나던 청춘의 빛은 평범한 현실이 되어있었다.

'한때는 그토록 찬란했던 빛이었건만 이제는 사라져
다시는 찾을 길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월리엄 워즈워드의 시>

특별한 한 미친 사랑이 있다.
사랑하는 그를 위해 담보로 자기 아들을 걸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지만 괜찮아.
너의 사랑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이건 과히 메가톤 급 미친 사랑.
미친 분.

유치환 님의 시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중략)
.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 모른다.
.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그 아들의 목숨을 내어놓아 진홍빛 양귀비꽃 같은 선혈을 흘리게 한 그분.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다는
이 미친 사랑.

그는 밤늦게 귀가하는 내 동네 골목길에서 기다리셨다.
이런저런 사람들을 보내어 때로는 기적을, 때로는 내가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면서 그를 알아주길 원하셨다.
그의 마음을 담은 66편의 러브레터를 보내고 보내신다.
무엇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나 대신 죽게 하셨다.

유한한 인간이 유한한 인간을 사랑하는 허무한 미친 사랑이 아니라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하늘의 그분이
천하고 유한한 이 땅에서의 미물 같은 인간을 사랑하는 미친 사랑.

저리 이리 피하고 때로는 모른척하고 때로는 무시하다가
결국 그분의 내미시는 손을 잡았다.
그 사랑이 받아졌을 때 그는
'그가 나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나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나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셨다'
(스바냐 3장 17절)

난파선같이 세상에서 향방없이 표류하던 나의 인생
비로소 안식의 항구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