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역의 추억

백화점 구경

by데이지

동네 친구 중에 수도권 생활을 유독 그리워하는 이가 있다.

“여긴 백화점 하나 없잖아.”

도대체 그에게 ‘백화점’이 상징하는 건 뭘까.

소도시에 살지만 유체이탈처럼 마음은 여전히 그곳에 두고 온 사람처럼 말할 때 이질감을 느낀다.


숨 막히게 더웠던 7월 말, 미국에서 시누이 E가 왔다. 보고 싶은 꼬맹이는 벌써 사춘기에 돌입한 모양이다. 엄마가 없는 느낌이 뭔지 알고 싶다며 혼자 다녀오라 했다 한다. 아빠 등에 매달리던 귀염둥이가 벌써 그렇게 큰 걸까.

긴 일정이 아니라 우리가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호텔은 삼성역 근처. 올라가는 길이 막히진 않았는데, 삼성역 주변이 대형 공사 때문에 번잡했다.


그 시절이 떠오른다. 결혼 전 온라인 게임이 삼성역 근처여서 매일 이 길을 오갔다. 에어컨도 없는 지옥철 1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삼성역에 도착하면 출근 전부터 몸은 이미 지쳐버리곤 했다. 대치동 방면으로 몇 블록 걸어야 하는 오르막길은 언제나 힘들었다.


월간지 마감이 끝나면 서울문고에서 시간을 보냈고, 가끔 코코스에서 점심을 먹었다. 회식 뒤에 호텔 나이트에 갔는데 영업부 모씨가 자기가 다 결제한다고 객기를 부렸다가 다음날 N분의 1 하자고 했다는 웃픈 이야기, 맥주 한 잔 하고 켄터키프라이드치킨 앞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기억, 완전 내성적인 사람이 술만 먹으면 부장 나오라고 주사를 부렸던 친구도 생각난다.


E 덕분에 30여 년 전 그때를 회상하면서 제대로 호캉스를 누렸다.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고, 신선한 채소가 맘에 드는 조식도 맛있게 먹었다.

E가 백화점에 볼 일이 있다고 해서 함께 가기로 했다. 전날 산 핸드백이 맘에 안 들어서 환불해야겠단다. 아울렛 쇼핑몰에서만 가봤지, 줄 섰다 들어가야 한다는 L매장에 가본 건 처음인 것 같다. 사실 백화점 구경도 오랜만이다.


오픈하자마자 환불 처리를 해달라고 하면 싫어하지 않나, 나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웬걸. 너무나 친절하다.

“한번 볼게요. 너~무 예쁜 핸드백을 고르셨는데 문제가 있나요?”

“생각보다 무거워서요.”

고객의 변심에 무슨 말을 보태랴. 다만, E가 어제 택스리펀을 받은 터라 취소하고 와야 한단다.

다시 찾은 매장. 응대한 직원은 눈치 빠르게 음료수를 준비해 주겠단다. 탄산수를 마시며 숨을 돌린다.

직원은 30대 중후반으로 보인다. 가는 컬로 파마한 단발에 반지와 팔찌 액세서리로 힘을 줬다. 영화에서 본 듯한 개성 있는 이미지. 취소 영수증을 정성껏 접어 봉투에 넣으면서 자신의 명함도 함께 넣었으니 다시 방문할 때 찾아 달란다.

”한국엔 얼마나 자주 오세요?”

“1년에 한 번 정도?”

“그럼 우리 1년에 한 번밖에 못 만나는 거예요?”

이 친구의 느끼한 농담이 어쩐지 익숙하다. 어디서 들었더라.


20대 시절, 친구들과 이대 앞에 구두를 사러 간 적이 있었다. 요즘과 달리 그 당시 그 거리는 쇼핑의 명소였다. 이것저것 골라 신어보는 우리에게 젊은 직원이 말을 건넨다.

“자기, 우리 학교야?”

우리를 까르르 웃게 했던,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그 청년이 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세월은 흘러도 여자들을, 아줌마들을 웃게 만드는 농담은 여전하구먼.


직원의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매장을 빠져나온다. E가 필요한 거 없냐고 하는데 백화점에서 내가 살 게 뭐가 있겠나.

백화점 구경의 마지막 코스는 지하 식품 코너. 아침도 먹었겠다 살 게 없는데도 눈이 즐겁다. 줄이 길게 늘어선 집은 진짜 맛있는 덴가 궁금해진다. 괜히 쓸데없는 뭔가를 살 것 같아, 하나같이 단 디저트들뿐이라며 발길을 돌린다.


오랜만에 백화점 구경을 하고 나오면서 동네 친구를 생각한다.

우리의 오해와 달리 그가 백화점에서 사고 싶은 건 명품이나 고가의 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이쇼핑을 하더라도 유행에 대한 감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이러다가 지방 소도시에 사는 사람으로 굳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 아닐까. 이러저러한 현실적인 이유로 이곳에 정착했지만, 더 이상 수도권 공화국 시민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상실감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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