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두어라

삽목이니 뭐니 하지 말고

by데이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여느 날처럼 안방에서 나와 내 방으로 들어가려다 TV 장식장 쪽을 봤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어스름하지만 뭔가 풍경이 달라졌음을 감지한다.

세상에. 동양란의 이파리가 기우뚱, 이미 초록별로 떠나고 있었다. 싱크대 쪽으로 가져와 자세히 들여다봐도 회생은 불가능할 것 같다. 언제 저렇게 됐을까. 며칠 친구들과 여행 다녀오느라 집을 비웠는데 그새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미리 물을 주고 갔어야 했나. 이미 전조가 있었는데 그동안 무심했던 걸까.


알 수 없는 이유를 찾다가 처음 이 화분을 만났던 때가 생각난다. 2007년, 서울의 한 대학병원 병실. 어디 개업식에나 어울릴 법하게 꽃을 활짝 피운 화사한 동양란의 이미지와 달리 병실 분위기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당시 시아버님은 담도암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인 상태였다. 어머니 지인이 면회하러 오면서 사 오신 모양인데, 어머니는 당신이 키울 여력이 없을 것 같다고 내게 가려가라 하셨다. 일단 받아 들긴 했는데 그때의 나는 식물 무관심자라 뜨악했다. 사실 잘 키울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우리 집에 오게 됐고 물 주기 담당은 버티기에 실패한 남편이 맡게 됐다.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화려한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았지만 난은 까탈 부리지 않고 잘 자랐다. 다른 화분 때문에 잠시 벌레가 꼬인 적이 있었지만 이겨내고 새 잎을 내곤 했다.


사실 문제는 늘 내게 있었다. 언젠가 자칭 식물박사가 사무실에 가득한 난 화분을 뒤집어 분갈이하는 걸 보고, 집에 와서 어쭙잖게 따라한 게 몇 번인지. 미리 고백하건대 그럴 때 나는 무식하게 과감하다. 처음으로 난 화분을 분갈이 해준 날. 썩은 뿌리는 잘라내고 온전한 뿌리만 살린다는 생각에서였지만 제대로 했을 리가 없다. 또 어느 해인가엔 다른 식물과 함께 분갈이하다 아무 생각 없이 난석 대신 일반흙에 심은 적도 있었다. 다행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나서 부랴부랴 다시 화분을 갈아엎고는 참, 너도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이 많다, 그렇게 혼잣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부실한 식집사 때문에 난은 세월이 흐를수록 포기수가 줄어들었고 자연히 화분도 점점 작아졌다. 최근엔 도무지 자라는 것 같지 않더니 결국 이렇게 이별하게 됐다. 차마 내 과오가 낱낱이 드러날 화분 속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베란다에 가만히 놓아 두었다. 큰 관심을 주지 않아도 거실 한 귀퉁이에서 온 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난의 20년. 그동안 함께 해줘서 행복했어, 고마워. 늦은 인사를 보낸다.


처음 식물을 키울 땐 정말 많은 정보를 얻고자 했다. 유튜브를 보고 적절한 타이밍에 줄기를 자르고 지피 펠렛을 여러 개 사서 새 가지를 심어 보고. 마치 삽목만이 살 길인 양 자르고 또 잘라 개체수를 늘렸다. 하지만 시도가 많다는 건 실패할 확률도 많다는 얘기. 많은 식물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나둘 떠났고, 삽목에 성공한 것들도 모체만 못했다. 오히려 자잘한 화분이 많아지면서 관리하기 힘들어졌다.


무모한 과감함은 후회를 낳는다. 어떤 조건에서든 쑥쑥 자라던 몬스테라는 나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얼마나 시련을 겪었던가. 겨울준비 한다고 가지치기해서 물꽂이를 한 것까지는 괜찮았다. 실내에 머무는 동안 충분히 뿌리도 잘 자랐고 봄이 됐으니 다시 화분에 옮기면 되겠다 싶어 심었는데 과습이 문제였다. 조금 더 기다리면 좋았을 걸, 성급하게 물을 준 게 화근이었다. 그렇게 튼튼했던 몬스테라 잎이 시든 다음에야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결국 심폐소생처럼 다시 물꽂이. 뿌리도 다 삭아버리고 이파리 하나만 달랑 남아 있는데 다시 살아날까. 그냥 둘 걸, 나는 대체 왜 이럴까. 미안해, 몬스테라. 자바카라의 마음을 받아주듯 다행히 몬스테라가 다시 뿌리를 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친구 말이 맞았다. 식물도 그냥 두는 게 좋더라는 얘기. 오랜동안 키워 봤는데 굳이 인위적으로 삽목을 하거나 모양을 낼 필요가 없는 것 같더라는 말.

하긴 화분이 아무리 잘 자라려 해도 식집사의 능력을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결국 우리 집 베란다에도 강한 녀석들만 살아남았다. 몬스테라, 스파티필룸, 홍콩야자, 커피나무, 스킨답서스, 국화, 아보카도, 오렌지. 고맙고 고마운 식물들이다.


가을바람이 산들 부니 서서히 분갈이를 해줘야 할 것 같다. 올해는 그저 뿌리 정리나 해주고 맞춤한 화분 집으로 옮겨주기만 해야 할 것 같다.

이제 식집사도 기다리는 연습을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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