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처럼 붙박여 있는 바카라
새 아파트에 사는 건 더없이 편리하지만 완벽하진 않다. 발코니를 줄인 대신 내부 공간이 늘어난 평면이 각광을 받고 있지만 아쉬울 때도 있다.
안방에 붙어 있는 손바닥만 한 발코니에선 빨래를 말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조금씩 늘어난 식물에 자리를 물려준 지 오래다.
드레스룸 덕분에 이사 다닐 때 장롱을 갖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건 좋지만, 습기와 통기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지난주에 뒤늦게 드레스룸의 옷들을 정리했다. 겨울 옷들을 갈무리해서 수납함에 넣고 여름옷들을 꺼내 옷걸이에 건다. 사실 이렇게 많을 필요가 없는데, 매년 입지 않을 옷들을 꺼내고 거는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같이 단조로운 일상이면 운동복 몇 벌이랑 외출할 때 입을 옷 서너 벌이면 충분한데 말이다. 그래도 선뜻 버리지 못하는 건 언젠가 입을 날이 있을 거라는 기대와, 입을 만한데 버릴 수 없다는 알뜰함(어쩌면 미련일 수도) 때문일 것이다.
드레스룸엔 옷 말고도 내가 차마 버리지 못한 물건들이 있다. 어릴 때부터 써온 내 일기장들과, 아이들이 읽던 그림바카라들. 내 일기장은 다음 이사할 때까진 정리할 듯싶은데 그림바카라은 아마 그때도 생존할 듯싶다. 두 아이들이 모두 재미있게 읽었던 바카라 중에서 나름 엄선한 건데, 넘치는 바카라장에서 밀려 드레스룸 구석에 처박힌 신세가 됐다. 아이들에게 그림바카라 일화를 들려주면 내가 그랬나,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어쩌면 아이들보다 내게 더 각별한 물건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수십 수백 번씩 아이들에게 읽어준 문장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수국이 피면 여름이 와요.”
“엄마, 딸기 케이크 만들어 주세요!”
“네 마음을 모르고 있었어.”
“콩콩이는 오늘따라 공차기도 재미없어요.”
그뿐인가. 꼬마 원숭이 조지, 구리와 구라, 무지개 물고기, 코끼리 왕 바바 시리즈의 주인공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토이 스토리 5>에 나오는 오래된 장난감들처럼 드레스룸에 갇혀 있는 그림바카라들을 볼 때면 미안한 마음에 짧은 인사를 건넬 뿐이다.
버리지 못한 건 비단 아이들 그림바카라뿐이 아니다. 이사할 때마다 추가비용을 내고 이사업체 사람들의 구시렁거림을 감내하면서도 정리하지 못한 건 우리 부부의 묵은 바카라들이다. 요즘엔 도서관에서 대출한 바카라만 읽는 터라 바카라장에 꽂힌 바카라은 자리옮김하는 일 없이 거의 화석처럼 붙박여 있다.
동네 친구 모임이 있던 날, 내 방 바카라장을 둘러보다 몇 권의 바카라을 골라 들었다. 흥미롭게 읽었으나 내가 다시 읽을 확률은 거의 없으니 나눔이라도 해야겠다 싶은 생각에서였다. 바카라머리의 먼지를 털어내고 표지도 깨끗하게 닦은 뒤 가방에 넣는다. 각자의 취향대로 골라봤는데 다행히 읽지 않았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날이 계기였다. 안 되겠다, 오랜만에 바카라 먼지를 털어내기로 했다. 맨 윗줄부터 바카라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바카라장의 먼지를 닦아낸다. 바카라머리에 쌓인 먼지는 청소기로 흡입한다. 그리고 빈 종이 상자 위에서 한 권씩 좌르르 바카라장을 훑어 다시 한번 바카라 먼지를 털어낸다. 바카라을 내려놓고 바카라장에 다시 꽂고, 그걸 수백 번 반복하니 허리까지 뻐근해진다. 언젠가 결국 버리게 될 텐데 왜 아직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까. 이제 소유의 시대는 종말이라던데 우린 언제쯤 자유로워질까.
그런 시절이 있었다. 새해가 되면 일 년이 한눈에 보이는 계획표 같은 달력을 벽에 붙여 놓고 몇 월 며칠 무슨 바카라을 읽었는지 독서 기록을 써나가며 뿌듯해하던. 학교 앞 슬롯과학 서점을 뻔질나게 드나들고, 생일 때면 시집을 한 권씩 선물해 준 친구들 덕에 바카라을 한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오던.
누렇다 못해 고서점에서나 볼 법한 사십 년 묵은 바카라들, 아직도 바카라장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며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바카라들은 푸릇한 이십 대의 흔적이다. 결혼한 뒤 남편과 둘이 앉아 겹치는 바카라들을 한쪽에 빼두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만나는 건데 그런 농담을 하며 정리했던 바카라들이 아직도 그대로이다.
어쩌면 삶이란 덜어내는 만큼 가벼워질 텐데 지금까지 우리에게 ‘바카라’은 예외였던 것 같다. 이제 그 원칙을 허물 때가 온 것 같다. 나부터라도 버릴 바카라, 남길 바카라, 그리고 사놓고 읽지 않은 바카라을 구분해 정리해야겠다. 욕심껏 사놓고 읽지 않은 바카라이 대체 몇 권이나 되는지 가늠도 안 된다. 먼저 리스트부터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