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한다는 것
마음이 심란할 때면 회사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 트랙을 걸었다. 한 바퀴, 두 바퀴, 걷다 보면 생각이 정돈되고 마음이 가라앉았다.
바카라임져야 하는 자리에 오르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할 땐 내가 리더십이 없나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리더가 여자로 바뀌니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제일 듣기 싫었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사양세를 눈치채고 재빠르게 탈출한 그들 대신 조직을 버티고 있는데도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떠들어댔다. 삐끗하길 바라는 그들의 기대(?)를 불식시켜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과부하가 필수였다. 일을 잘 해내는 건 그나마 쉬운 일이었다. 복잡하게 얽힌 사람들의 말을 해석하고 조율하는 게 어려웠다. 운동장 트랙을 걸어도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 땐 동생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 어떻게 생각해?
- 그건 이래서 그랬을 거야.
동생의 말은 늘 명쾌했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지점을 짚어주기도 했다. 역시 사람들을 많이 상대해 본 현장의 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트랙’을 돌고 나면 실마리가 풀리듯 마음이 가벼워지곤 했다.
큰 일을 앞두고 있는 S가 퇴근길에 전화를 걸어온다. 오늘도 버거운 하루였을 것이다. 피곤한데도 좀 더 걸어야겠단다.
S가 그렇게 몇 개의 지하철 정거장을 지나치면서 정리하고 싶은 마음, 너무나 잘 알 것 같다. 주어진 프로젝트를 잘 해내고 싶은 마음, 디테일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 두루 좋은 평판을 얻고 싶은 마음….
나도 그랬다. “모든 이에게 두루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면 인생을 잘못 산 것이다”라는 말을 되새길 때도 있었지만, 모든 이를 만족시킬 만큼 완벽하고 싶었다.
S와 통화할 때마다 내가 걷던 그 운동장 트랙이 떠오른다. 동생이랑 통화하면서 차근차근 정리가 되던 순간들.
그래서 S 얘기도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자꾸만 내 얘기를 얹는다. 그렇게 진저리 치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 맞아, 나도 그랬어. 빨간펜 선생 같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어.
- 불안하지. 이겨내는 수밖에.
- 주말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OTT 시리즈물 엄청 봤잖아.
내가 1순위로 두었던 ‘일’이라는 게 사실 별거 아니었다는 깨달음은 퇴직한 뒤에 찾아왔다. 내게 성취감을 주고, 나를 성장시킨다고 생각하기에 더욱더 박차를 가했지만, 내상이 깊어가는 건 몰랐다. 무엇보다 나를 돌아보지 못했다. 가족들에게도 소원했다. ‘뭣이 중한디’를 생각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가 묻는다.
- 퇴직한 거 후회하지 않아?
- 아니, 전혀! 난 진짜 할 만큼 했거든.
그랬다. 그땐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는 바카라이 나오기 전이었으니까. 아니, 받는 돈만큼만 일하면 없어 보였으니까. 나를 갈아 넣어 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집에 가면 말하기 싫을 만큼 지겹도록 업무상 전화를 하고, 가기 싫은 저녁 모임이나 술자리에 가야 되고, 내 성격에 맞지 않게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던 그런 일들을 하지 않으니 좋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를 만큼 나를 잃어버렸던 시간들을 뒤늦게나마 회복할 수 있어 좋다.
S에게도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니라고 적당히 하라고 조언하고 싶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내가 만일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대도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때로 ‘생각 트랙’을 찾아갈 테지만 나를 위해 운동 하나는 하고 있을 것 같다.
최선을 다한다는 구실로 자기 몸을 혹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