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을 베다

상처 끝에 다다른 감사함

by데이지

요리하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노랑 빨강 파프리카로 맛있게 잡채를 할 계획이었다. 파프리카 꼭지와 밑을 잘라내고 착착착 최대한 얇게 썰어 기름을 넉넉히 두른 팬에 살짝 볶아내면 된다. 그런데 아뿔싸. 새로 산 칼갈이 덕분에 무딘 칼이 이제야 쓸 만하다 싶었는데 너무 잘 갈았나. 살짝 스친 것 같은데 피가 난다. 왼쪽 세 번째 손가락에서 아주 작은 뭔가가 떨어져 나왔다. 윽~!


사실 내가 칼질하다 베는 건 다반사. 오히려 최근엔 그런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는데 속상하다. 평소처럼 대충 지혈하고 밴드를 붙인다. 물론 잡채 요리도 무사히 끝냈다. 식구들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밴드 붙인 손가락이 보일 새라 밥 먹을 때도 왼손은 식탁 밑으로 조용히 떨군다. 뭐 그렇게까지 하나 싶겠지만 나를 걱정하는 잔소리와, 나란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는 걸까 자바카라이 이어지는 게 싫다.


아쿠아 밴드라 물이 살짝 묻어도 접착력은 괜찮은데 피가 많이 묻어나 있다. 저녁에 갈아주느라 봤더니 다시 피가 난다. 더럭 겁이 난다. 이번엔 알코올 스왑으로 살짝 닦고 후시딘을 바른 다음 밴드를 붙인다. 자고 나면 괜찮겠지, 제발.

다음날 아침. 여전히 밴드에 피가 많이 묻어 있다. 챗GPT에 물어보니 지혈이 제대로 되어야 한단다. 5분간 상처 부위를 꾹 누르라고 일러준 대로 해본다. 왜 이렇게 시간이 더디게 가는 걸까. <베니스의 상인>을 떠올린 건 그때였다. 다 헛소리야. 고작 직경 5밀리미터 될까 말까 한 작은 상처에도 이렇게 호들갑인데 누가 1파운드의 살을 베는 조건에 응한단 말인가.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딜이다.


두 번의 지혈 시도 끝에 다행히 피가 멎었다. 병원에 가봐야 하나, 약국에 가서 지혈제를 사 와야 하나. 쫄보의 상상력이 공포의 부피만큼 커졌다가 피가 멎자 잠잠해졌다. 다행이야. 가만, 수영장에 못 가겠는 걸? 풀썩. 어젯밤에 수영 가방을 챙길 때만 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러네….


한시름 놓았으니 그제야 가족들에게 말한다.

“또? 으이그. 살림한 세월이 얼만데… “

“나한테 얘기하지 그랬어. 혼자서 밴드를 어떻게 붙였어?”

“안 되겠다. 이제부터 엄마, 요리하지 말고 시켜 먹자.”

야, 셰프는 안 다치는 줄 알아? 만날 베이고 데고 그런대. 이렇게 말문을 막고 애꿎은 손가락만 쳐다본다. 다 나으려면 대체 며칠이나 걸릴까.


엄마를 면회하러 간 날. 동생이 엄마에게 이른다. 덜렁이 언니가 또 다쳤다고.

엄마는 제대로 알아들으신 걸까. 놀리는 어투 때문인지 살짝 웃기만 하신다. 내가 당신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실까.

나는 엄마가 곱게 키운 대로 결혼할 때까지 제대로 요리를 해본 적이 없다. 칼을 쓰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사과를 깎을 때뿐이었다.

결혼하고 나서 요리는 해야겠는데 아는 게 없었다. 요리바카라을 사서 하나씩 배워나갔다. 과도만 잘 다뤘으니 당연히 칼질이 서툴다. 왼손을 둥글게 모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어설프게 재료를 잡느라 손가락들이 자꾸만 삐죽 나온다. 요리 잘하는 올케 언니가 “아니, 왜 세 번째 손가락을 베었대요? 이상하네….”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지금까지 밥 안 굶기고 식구들 챙긴 게 용하다.


청개구리라서 그런가. 손가락이 아프니까 피아노가 치고 싶다, 키보드를 휭휭 날며 글을 멋지게 쓰고 싶다, 아침 수영을 가지 못해 몸이 근질근질하다…. 그깟 작은 상처 하나 때문에 못하는 일이 수두룩하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낫는 이런 상처야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돌아보면 사람 때문에 일 때문에 속을 끓인 날들이 더 많았다. 역류성 식도염으로 잠을 깨고, 소화가 되지 않아 밥을 제대로 못 먹는 날들이 숱했다. 내 깐엔 잘해보겠다는 발버둥이었지만 몸을 혹사하고 스트레스를 내버려 두었다. 우리 몸이 얼마나 복합적인지, 내 신경이 어떻게 연결돼 소화기관을 무기력하게 하는지 깨닫지 못한 날들이었다. 그때도 보이는 상처엔 호들갑 떨었지만 몸 안의 이상 신호엔 둔감했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건너와 이제라도 내 몸을 돌볼 수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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