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전략은 누구를 위한 전략도 아니다

by전우성


브랜딩을 업으로 삼으며 느낀 것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브랜드만큼 모호하고 매력 없는 브랜드도 없다는 사실이다.


예전에 알던 한 스타트업 대표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분은 원래 10대를 타깃으로 한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미팅 때마다 "20대로 연령대를 확장하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10대의 지갑은 20대에 비해 얇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고민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한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20대의 구매력을 흡수하고 싶어 하면서도, 당장의 트래픽이 나오는 10대를 놓을 생각은 전혀 없으셨다는 점이다. 10대와 20대는 가치관도, 생활 패턴도, 심지어 사용하는 브랜드와 소비 규모도 완전히 다르다. 이 둘을 동시에 잡으려니 서비스의 정체성은 점점 희미해졌다. 10대에게는 점점 올드하게 변해갔고, 20대에게는 아직도 10대들이 이용하는 너무 어린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어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하기는 한계점이 있었다. 결국 그 사업은 이 타깃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저 타깃도 놓치면서 서서히 가라앉았다.


모두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메뉴를 늘린 식당은 맛집이 될 수 없고, 10대부터 60대까지 모두를 타깃으로 한 브랜드는 그 누구의 지갑도 열지 못한다. 이는 삶의 전략에서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한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아무에게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전략적으로 보면 최대 다수의 교집합을 찾는 행위다. 모두가 싫어하지 않을 만한 안전한 지점. 뾰족한 곳을 갈아내고 둥글게 다듬은 그 지점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통계학에는 평균의 함정이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사람의 신체 치수를 평균 내어 만든 의자가 있다고 가정해 볼 때 그 의자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대충 맞을지는 몰라도, 단 한 사람에게도 완벽하게 편안한 의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케팅에서 타기팅의 핵심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이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구를 버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용기에 더 가깝다고 본다.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두렵기 때문이다.


오토바이 브랜드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은 얌전한 모범생들을 고객 리스트에서 과감히 지워버렸다고 한다. 대신 거친 자유와 반항을 꿈꾸는 이들을 그들의 주요 고객으로 선택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시끄러운 소음과 진동을 싫어하는 다수에게는 철저히 외면받지만, 소수에게는 마치 종교와도 같은 브랜드가 되었다. 만약 할리데이비슨이 소음을 줄이고 승차감을 개선해 대중성을 노렸다면, 지금의 그들의 명성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맞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뚜렷한 주관, 호불호, 그리고 뾰족한 태도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반감을 살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뾰족함 때문에, 나와 결이 맞는 누군가는 나를 간절히 필요로 하게 된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감은 언제나 그 호불호의 경계에서 피어난다.


그러니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허상은 버리는 게 좋겠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미지근한 물 한 잔을 건네는 것과 같다. 갈증을 해소해 줄 수는 있어도, 뇌리에 박히는 기억에 남는 맛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전략은, 그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전략이다. 우리의 고객도, 우리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전부가 되기 위해서는 기꺼이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용기도 필요하다.


그러니 포기할 대상은 미련 없이 포기하는 게 좋다.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는 분명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