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아직도 빵용 밀을 심고 있나

— 국산 밀의 현실과 표준화의 본질

일본은 전체 밀 소비량(약 600만 톤)의 15%인 90만 톤가량을 자국산 밀로 소화한다. 반면 한국은 고작 2만 톤을 생산하면서도 그마저 판로가 없어 남아돈다고 난리다.


숫자만 봐도 대조적인 이 상황에서, 우리가 진짜 주목해야 할 본질은 '일본이 국산 밀을 어디에 쓰고 있는가'다.


그들의 주력은 빵이 아니라 우동을 비롯한 '면류'다. 자국 땅에서 자란 밀이 단백질(글루텐) 함량이 낮아 빵보다는 국수에 적합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기후에 맞는 중력분 위주로 재배 구조를 짰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분수를 알고 기후에 맞춘 전략적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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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빵용 강력분은 원래 우리 땅에서 나오는 밀이 아니다


빵의 뼈대를 만드는 경질밀(강력분)은 미국 중부 대평원, 캐나다 서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처럼 '겨울엔 춥고 수확기엔 극단적으로 건조한' 대륙성 기후의 산물이다.


반면 한국과 일본은 봄부터 여름으로 이어지는 수확기에 비가 많고 고온다습한 몬순 기후대다. 이런 환경에서는 경질밀이 자라기 어렵고, 연질밀(중·박력분)이 자라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냉정하게 말해 우리 기후는 중력분도 빠듯하고, 글루텐 함량이 낮은 박력분이 훨씬 현실적이다. 심지어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계속 오르고 있으니, 고글루텐 밀 재배는 갈수록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정부와 농가는 여전히 "빵을 만들겠다"며 고글루텐 경질밀 품종 개발과 강력분 재배에 집착한다. 기후학적 한계를 무시한 채 수입 강력분의 '가성비'와 정면 승부를 벌이겠다는 이 무모한 도전을 과연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지, 솔직히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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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렇다면 국산 밀 2만 톤, 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이제는 무의미한 빵용 밀 환상에서 벗어나, 철저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우리 기후가 선물한 '낮은 글루텐'이라는 약점을, 현대인의 위장을 편안하게 만드는 "Low-Gluten + 속 편한 프리미엄 가치"라는 강력한 무기로 세탁해야 한다.


국산 밀의 진짜 무대는 빵집이 아니라, 박력·중력분의 연질 특성이 극대화되는 시장이다.


- 치킨 파우더(튀김옷): 글루텐이 적어 튀겼을 때 떡지지 않고 극상의 파삭함(Crispy)을 내는 시장.


- 프리미엄 라면·면류: 과도한 글루텐 구조를 줄여 "밀가루를 먹어도 국수처럼 소화가 잘되는" 웰빙 시장.


- 고부가가치 제과류: 천안 호두과자, 도라야키(경주빵, 십원빵 등등), 쿠키, 케이크 등 주로 선물용, 이벤트용 시장.


연간 200만 톤이 수입되는 거대한 치킨, 라면, 제과 시장에서 단 1%의 프리미엄 마이너 마켓만 뾰족하게 뚫어내도, 판로가 없어 썩어 나간다는 국산 밀 2만 톤은 순식간에 동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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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판로를 찾았다고 끝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표준화'의 부재


"그럼 당장 치킨 파우더나 제과용으로 공급하면 되겠네?"라고 생각하겠지만, 지금 수준의 국산 밀을 대형 가공업체나 프랜차이즈 공장에 가져가면 백전백패 퇴짜를 맞는다.


대기업 공장의 자동화 라인이 국산 밀을 외면하는 건 '국산이라서'가 아니다. 들어올 때마다 품질이 제각각이라 기계를 멈추게 만들기 때문이다. 밀가루 품질은 단순히 단백질 함량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회분, 백도, 손상전분, 섬유질 함량 등 다른 품질지표도 같이 본다. 가공 적성을 좌우하는 이 지표들이 일관되게 통제되어야 한다. 글로벌 제분의 표준인 '뷸러(Bühler) 제분기 매커니즘'에 맞춘 국산 밀 고유의 데이터 표준과 관리 가이드라인이 부재한 것이 지금의 가장 뼈아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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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0년의 빌드업, 이제 대안을 직접 만든다


지난 2017년쯤, 충남에 있을 때 국산 밀 표준화 정부 과제에 도전했던 적이 있다. 당시의 정부 과제들은 특정 연구자나 대기업 중심의 카르텔로 움직였고, 외부인이었던 내게 돌아올 자리는 없었다. 냉정히 말해 그때는 표준화에 대한 개념만 서 있었을 뿐, 실무적 데이터와 인프라가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난 10년간 현장에서 뼈저리게 경험을 쌓았고, 표준화의 목표는 완벽하게 선명해졌다. 무엇보다 생산자와 생산품의 품질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규격화할 수 있는 기술적 솔루션을 확보했다. 실용화에 단 한 걸음만을 남겨둔 셈이다.


그래서 다시 정부 과제를 받아서 진행할 거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No"다. 정부 과제를 받으려면 소위 그쪽에 잘 보이는 일을 해야하고, 그렇게 진행한다 한들 공고된 과제제안서에서 정해진 가이드라인과 보고서용 연구 목표에 손발이 묶여, 시장이 진짜 원하는 혁신을 시도할 수 없다.


현재 진행 중인 투자 라운드가 마무리되는 대로, 국산 밀 표준화와 스펙 규격화 사업을 내 방식대로 직접 시작할 것이다.


정부가 세금으로 해결하지 못한 국산 밀 산업의 푸드테크 솔루션으로 현장에서 진짜 증명해 보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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