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불편한 관계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던 이에게 혐오가 가득한 말을 들었다. 그중 나를 가장 깊게 타격했던 건 내 바카라에 관한 말이었다. 그는 우연히 바카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중 한 부분이 자신의 이야기라는 걸 알아챘다고 날을 세워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누구나 쉽게 펼쳐볼 수 있는 바카라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타인을 비난한 사람이 되어 버린 듯했다. 거북스러운 무언가를 삼킨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억지로 침을 삼키며 그 감각을 꾹꾹 눌렀다.
내 삶을 글로 옮겼기에 주변의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은 최대한 넣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 그랬다고 믿었다. 누군가를 언급할 때조차 특정 인물이 아니라 살면서 한두 번쯤 마주칠 법한 공공의 적처럼 묘사했다고 생각했다. 정작 당사자는 단번에 자신을 알아보았다.
그 일을 겪고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글은 쓰지 못했는데 내 속에서는 수많은 글자가 지나갔다. 분노와 미움, 원망, 그리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수많은 언어의 조합이었다. 자기검열에 빠져 그 말들을 단속하고 조정하느라 세월 가는 줄도 몰랐다.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이 텁텁한 미세먼지처럼 늘 공기 중에 함께했다. 그것들은 숨을 들이쉴 때마다 기관지 깊숙이 달라붙어 끈적한 가래처럼 변했다. 곧 제멋대로 증식하는 세포같이 내 정신세계까지 지배했다. 모두 떨쳐버리기 위해 오랜 날을 허덕거렸다.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이 떨어져 나간 건 정작 시간이었다.
점점 글이 무서워졌다. 상처를 주기 싫었고 상처받기도 싫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쓰기 싫었다. 겨우 타인의 몇 마디 말로 바늘에 찔린 상처에 놀라 온몸에 마비가 온 것처럼 과민반응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내 유리 멘탈은 알고 보니 유리보다도 약한 설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왜 이렇게 내 영혼은 나약할까.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원인으로 몇 가지 답이 물망에 올랐다. 갈등이 생기면 도망치기 바쁜 겁쟁이라서.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져 일단 내가 참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딸 셋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언제나 동생들을 이해하고 양보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신념이 확장되어서. 사지선다형 문제에서 1번, 2번, 3번 모두 정답처럼 보일 때 ‘4번. 모두 맞다.’를 고르게 되듯 떠오르는 모든 이유가 맞는다고 느껴졌다.
무기력이 찾아왔다. 그래도 온라인 게임에 가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했다. 퇴근 후 운동도 꾸준히 했다. 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휴대전화로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는 짧은 영상을 끝없이 넘겨보며 무거운 생각을 덮어버렸다. 잠들기 직전까지 콘텐츠로 만든 각성제를 무방비로 흡수했다. 그 효과가 지나치게 강했던지 새벽에 눈을 떠 이런저런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날도 여럿 있었다.
내가 우울을 고백했던 지인 중 한 사람은 상담을 한 번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그의 걱정스러운 말을 부러 털어냈다. 상담이 필요한 만큼 내가 무너져 있다는 걸 인정하기엔, 일상이 너무 멀쩡해 보였다. 오히려 전보다 일에 더 깊이 몰입하며 온라인 게임에서 어느 정도 인정도 받았다. 일 년 넘게 나를 괴롭히던 목디스크 역시 꾸준한 재활 운동 덕분에 상태가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내 삶은 콘크리트 바닥에 단단히 박힌 말뚝처럼 흔들림이라곤 없었다.
내 인생 찾겠다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되레 내가 쓴 글로 길을 잃었던 자아는 잠시 글을 놓으며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이제는 그 일을 떠올려도 살을 에는 겨울바람보다는 이른 봄날의 찬바람 정도로만 느껴진다. 나를 사정없이 할퀴었던 그와도 앞으로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시간이 모든 일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과거의 윤곽을 지우고 희미한 그림자 정도만 남겨주었다.
겨울의 시간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좋은 일이 찾아와도 행복은 잠시뿐이고, 금방 나쁜 일을 걱정하는 건 우리가 그 사실을 바카라이 아닌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반대로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슬그머니 들어 올려본다. 물론 앞으로도 크고 작은 불행 앞에서 감정은 변덕스러운 봄 날씨처럼 흔들리겠지만, 이제는 잠시 숨을 고르며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릴 줄 아는 성숙함도 자라지 않았을까. 이런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도 깊은 바닷속처럼 쪽빛으로 멍들었던 마음에 비하면 나아진 상태다. 무엇보다, 다음에는 아무리 어두운 색이라도 환하게 밝혀줄 열정의 계절, 여름이 올 테니까.
다시 글을 쓰는 재미를 알아간다.
#라이트라이팅#라라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