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4장 사용법

by김광일

토요일 아침, 만호는 시장 뒷길 입구에서 트럭 핸들을 꺾다 말고 도로 풀었다. 정류장에 교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그 녀석이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었다. 만호는 깜빡이를 끄고 큰길 쪽으로 차를 몰았다. 십오 분이면 될 길이 삼십 분이 걸렸다. 평일이었다면, 트럭을 곧장 시장 뒷길로 몰고 들어가 부부닭강정 건물 옆 자판기의 동전통까지 느긋하게 비우고 나왔을 터였다.

만호는 차를 세우고 공구 가방을 들고 걸었다. 모퉁이 앞에서 그는 걸음을 늦췄다. 안경점 유리창에 등 뒤 골목이 비쳤다. 빨간 것이 지나가는가 싶어 목을 빼고 들여다봤다. 우체부의 가방이었다. 만호는 숨을 내쉬다가 유리 속의 자기와 눈이 마주쳤다. 기름때 묻은 감색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남의 가게 유리창에 코를 박을 듯 붙어 서 있었다. 안경점 주인이 계산대 너머에서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만호는 공구 가방을 반대쪽 손으로 옮겨 쥐고, 유리창에 붙은 안경테 할인 광고를 읽는 척하다가 자리를 떴다.

트럭으로 돌아온 만호는 운전석에 앉아 한참 시동을 걸지 않았다. 그 녀석이 누구한테든 한마디만 흘리면. 시장 바닥에 소문이 도는 데는 반나절이면 됐다. 소문은 교회 마당으로 흘러갈 것이고 목사의 귀에 닿을 것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가면 쓴 여자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었다. 입 다무는 값으로 빚을 지워 준 여자였다. 그 여자가 마음을 바꾸면 명희의 다음은 없었다.

만호는 지갑을 꺼냈다. 만 원짜리를 몇 장 세다가 손가락이 멈췄다. 고등학생 입을 돈으로 틀어막겠다고. 지갑을 닫는 손이, 사채 사무실 문 앞에서 봉투를 내밀던 그 손과 똑같았다.

그런데 만호를 정말로 붙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 새벽 이후로 광수가 자판기를 쳐다보는 눈빛이었다. 만호는 그 눈빛을 알았다. 삼 년 반 전 아내의 진단서를 받아 든 날, 화장실 거울 속에서 자기를 마주 보던 눈이었다. 만호는 백미러를 손바닥으로 돌려 버리고 시동을 걸었다.

그래도 자판기를 관리하는 사람이 거리를 안 다닐 수는 없었다. 만호가 정작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 녀석의 입보다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그 새벽 그 녀석은 주술을 부리는 자신을 보고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고 달아나지도 않았다. 그 뒤로 시장에서 마주칠 때마다 녀석은 대단한 기술자라도 본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차라리 손가락질을 했다면 만호도 낯을 두껍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들킨 상대가 자기를 우러러보는 일은 처음이었고, 그 눈앞에 서면 아픈 아내의 모습이 떠올라 어디에 손을 둬야 할지 몰랐다.

광수가 만호를 본 것은 그 새벽이 처음이었다. 가게 앞 자판기를 고치러 오는 아저씨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지나가며 고개를 까딱한 적만 있을 뿐 그 얼굴을 떠올려보라면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새벽 이후로는 시장 건너편 인파 속에서 감색 작업복만 비쳐도 광수의 팔이 먼저 올라갔다. 이날도 그랬다. 익숙한 그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만호는 공구 가방을 반대쪽 손으로 옮겨 쥐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아휴. 징글징글한 놈.

이 구도심에 남은 커피 자판기는 다섯 대였다. 광수는 다섯 군데만 지키면 된다고 계산했다. 토요일 새벽에 목욕탕 앞과 버스 종점을 돌았고, 마침내 세 번째인 시장 입구에서 공구 가방을 든 감색 작업복을 찾아냈다.

만호가 못 본 척하고 걸음을 빨리하자 광수도 걸음을 빨리했다. 만호가 골목으로 꺾자 광수도 덩달아 꺾었다. 만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면 광수는 세 걸음 뒤에서 같이 멈춰 서서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만호는 자판기 문을 열고 부품을 갈아 끼우는 동안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광수는 한 발짝 뒤에 쪼그려 앉아 그 모습을 구경했다. 나사가 풀리고 판이 열리고 안쪽의 낡은 관들이 드러났다.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다음 나사로 옮겨 갔다. 그 새벽 아주머니의 신발을 벗기던 손이었다. 오른쪽을 먼저, 왼쪽을 다음에.

"이봐, 정 사장. 저 총각은 누구야? 자네 아들이야?"

"아들은 무슨."

"아들 같은데. 요새 저렇게 일 배운다고 아버지 따라다니는 효자가 어디 있어. 부럽구먼."

그날 저녁 만호가 국밥집에 들어가 앉자 광수가 맞은편에 앉았다. 만호가 국밥을 먹는 동안 광수는 아무 말 없이 숟가락통만 만지작거렸다. 주인이 광수에게 물었다.

"어, 학생. 뭐 줄까?"

"저는 그냥, 물 주세요."

"뭐. 물?"

주인이 광수 앞의 빈 식탁과 만호의 국밥 그릇을 번갈아 봤다. 만호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사장님. 여기도 순대국밥 하나 말아주세요."

"사장님, 순대 말고, 돼지국밥이요. 고깃살 많이 넣어주세요."

광수가 넉살 좋게 주문했다. 주인이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 뜨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돼지국밥이 나왔다. 광수는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다. 만호의 그릇은 반이 남아 있었다.

***

다음 날에도 만호는 시장통에 갔다. 일요일 오전의 시장통은 장바구니끼리 부딪칠 만큼 붐볐다. 만호는 건어물 가게 앞 자판기 문을 열어젖히고 동전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아저씨!"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길 건너 뻥튀기 기계 옆에서 광수가 두 팔을 머리 위로 휘젓고 있을 것이었다. 만호는 드라이버를 쥔 채 자판기 안으로 상체를 더 깊이 밀어 넣었다.

바로 옆에서 "어이쿠" 소리가 났다. 열무 단을 머리에 인 할머니가 물 고인 보도블록을 밟고 한쪽으로 기우뚱했다. 열무 잎이 만호의 어깨를 쓸고 지나갔다. 만호가 손을 뻗기도 전에 광수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달려와 할머니 머리 위의 열무 단을 두 손으로 받쳐 내렸다. 녀석은 그것을 잠깐 안고 서 있더니 아예 제 머리에 얹었다.

"할머니, 어디까지 가요?"

광수가 열무 단을 이고 시장통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초록 공룡이 그려진 노란 티셔츠 아래로 빨간 양말과 하늘색 양말이 번갈아 나왔고, 걸음을 뗄 때마다 열무 잎이 녀석의 귀 옆에서 출렁였다. 생선 좌판 아주머니가 고등어 배를 가르던 칼을 도마 위에 세운 채 멈췄다. 떡집 주인은 김 서린 유리문을 밀고 고개를 내밀었다. 누군가 키득거렸고 어디선가 박수 소리도 났다.

정류장 앞에서 짐을 받아 내린 할머니는 숨도 고르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돌아왔다. 광수가 빈손을 털며 뒤따랐다. 할머니는 아직 자판기 앞에 서 있는 만호의 기름 묻은 작업복 소매를 덥석 붙들었다.

"아이고, 착한 아들 둬서 복 받았네. 나도 이런 손주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아드님이 인물이 훨씬 좋아. 엄마 닮았나 보네."

"……."

"복 받았어, 정 사장. 복 받았어."

내 자식 아니요, 하는 말이 만호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내려갔다. 할머니는 벌써 광수의 등을 두드리며 주머니에서 박하사탕을 꺼내고 있었다. 만호는 손에 쥔 드라이버로 나사를 하나 더 조였다. 이미 다 조인 나사였다. 드라이버가 헛돌며 끽소리를 냈다. 아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만한 아들이 하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나사는 이렇게 조이는 거고 저 부품은 저렇게 갈아 끼우는 거라고 옆에 세워두고 일렀을 것이다. 거기까지 가다가 만호는 드라이버를 공구 가방에 던져 넣었다. 아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할머니들 틈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는 광수를 만호가 불렀다.

"짜샤, 빨리 와."

광수는 할머니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달려왔다.

"왜요. 이제 아들 하기로 하셨어요?"

"시끄러워, 인마."

만호가 앞장서 골목으로 걸었다. 뒤따르던 광수는 만호의 귀가 빨갛다는 것을 보았다. 일요일 오전이라 부부닭강정은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셔터 앞에 누렁이가 엎드려 있었고 그 옆에 어제 팔다 남은 튀김 부스러기가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만호는 그 앞을 지나 자판기 앞에 섰다.

멀리서 교회 종이 울렸다. 열한 시 예배였다. 만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종이 울리는 동안 그는 자판기 옆면의 녹을 엄지로 긁었다. 종소리가 그칠 때까지 긁었다.

생명을 바꾸려고 처음 자판기 버튼을 누른 것이 삼 년 반 전 토요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양복을 입고 넥타이까지 맸다가 현관에서 구두를 신지 못했다. 예배당 의자에 앉아 찬송을 부르는 자기가 아무렇지도 않을까 봐서였다. 그 뒤로 성경은 안방 서랍 맨 아래 칸에 있었다. 아내가 찾을 때만 그가 꺼내주었다. 꺼낼 때마다 그는 표지에 손바닥이 닿지 않게 모서리를 쥐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떨었다. 만호가 꺼내 화면을 봤다. 교회 문자였다. 정만호 성도님, 이번 주일도 예배당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오영훈 목사 드림. 주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오는 문자였다. 만호는 엄지로 그 문자를 길게 눌렀다. 삭제 버튼이 떴지만, 그대로 창을 닫았다. 받은 편지함에는 같은 문장이 백 통 가까이 쌓여 있었고 그중 한 통도 지워진 것이 없었다. 만호는 화면을 엎어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만호는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에 뒤를 돌아봤다. 녀석은 만호의 바지 주머니를 빤히 보고 있었다.

"이리 와봐라. 너 이거 알고 싶어서 그런 거지?"

만호가 자판기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광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귀찮다. 제대로 알려 줄게. 이미 너한테 들켰는데 감춰 봐야 뭐 하겠냐. 대신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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