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항로를 노리는 부산의 입장에서 본 철학도의 한 사변

<부제: 디지털 新 냉전의 한 틈바구니에 선 부산의 한 철학도의 변론>

<지은이 주: 본인이 돈으로 크게 투자하는 해운물주가 아니므로 북극항로가 잘 열려 수많은 무역선이 오르고 내리고 달리더라도 나에겐 일종의 客外之物이 될 뿐이다. 설사 내가 돈을 받고 그 배를 운항하는 선장이나 선원이라 하더라도 나는 직접적인 거물의 수혜자가 될 가능성은 매우 얕고 미미하다. 이에 나의 깊은 영속적인 소외와 고뇌적 고민이 번민으로 있지만 실존적 哲人의 한 사람으로 참여의 기회를 나만(the Self only Mine)으로 노리며 모든 것을 그대로 다 인정하면서 깊이 바라보고자 한다.>


얼음이 녹는 바다, 길 위에 선 나의 실존

기술의 神들이 하늘을 가르고 거대한 제국들이 알고리즘의 세계를 둘로 쪼개어 영토를 다툴 때, 한 인간으로서 나는 거대한 역사적·기술적 도도함 앞에서 아득한 무력감을 느낀다. 미·중의 AI 패권 전쟁은 거대한 비트(Bit)의 유령이 되어 우리 모두의 사유를 규정하고, 개인을 데이터의 부산물로 환원하려 한다.

나는 지금 한반도의 남쪽 끝, 부산의 바닷가에 서 있다. 저 멀리 차가운 북극의 얼음이 녹아내리며 비워낸 자리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북극항로’라는 아득한 지평이 열리고 있다. 거대한 국가적·지정학적 담론을 탈색시키고 나면, 이 장면은 오롯이 ‘세계라는 거친 장소에 던져진 한 인간(Dasein)’의 실존적 투쟁으로 다가온다.

부산이 북극을 바라보는 시선은 곧, 시스템의 거친 기계음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으려는 한 인간의 사유이자 실존의 몸부림이다.


1. 피투성(Thrownness)을 넘어서는 결단: 갇힌 인간과 갇힌 도시

실존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한 시공간에 던져진 존재(피투성, 被投性)'라고 설명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내 삶의 조건과 부산이라는 도시의 운명은 닮아 있다. 거대한 AI 네트워크와 자본이 수도권과 선진국으로 쏠리는 시대, 지방이라는 지리적 변두리에 던져진 한 인간의 삶은 늘 ‘결핍’과 ‘외곽’이라는 정체성에 갇히기 쉽다. 부산 역시 대륙의 세력과 해양의 세력이 선을 그어놓은 분단의 한반도 끝자락에서,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막다른 바다’를 바라보며 멈춰 서 있었다.

그러나 북극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현장은 나에게 묻는다.

“너는 던져진 환경에 순응하며 갇힌 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스쳐 지나가는 파도 너머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것인가?”

북극항로는 단순한 물류의 단축이 아니다. 그것은 주어질 수밖에 없었던 지리적·존재론적 한계를 거부하고, 갇혀 있던 바다를 향해 자신의 삶을 던지는 ‘기투(企投, Projection)’의 행위다. 인간은 스스로 결단하고 나아갈 때 비로소 진정성 있는 자기 자신이 된다.


2. 물성(物性)의 고통과 실존적 감각의 회복

AI라는 형체 없는 유령이 거대한 계산 능력으로 인간의 노동과 의식을 대신하려는 시대, 인간은 점차 자신의 신체와 감각을 잃어버린다. 철학에서 실존은 추상적인 개념에 앞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경험이다. 미·중의 알고리즘이 아무리 정교해질지라도, 북극해의 살을 에우는 바람과 유빙(流氷)을 가르는 철갑 선박의 육중한 진동, 그리고 그 배에 몸을 싣고 항해하는 인간의 피부 감각을 대신할 수는 없다.

부산항의 크레인 아래에서, 그리고 북극해를 향해 이물(Bow)을 돌리는 선박의 갑판 위에서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실재(Reality)를 느낀다. 안전한 가상공간의 모니터 뒤에 숨어 삶을 아웃소싱하는 존재가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거칠음과 직접 맞닥뜨리는 고통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북극항로를 향한 발걸음은 알고리즘의 유령에 맞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의 삶’을 되찾으려는 실존적 회복이다.


3. 불안(Angst)을 뚫고 나아가는 자의 자유

심리적 철학에서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 부를 수 있다. 길도 없고,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얼음의 바다로 나아가는 것은 선택의 자유인 동시에 극심한 불안을 동반한다. 한 개인으로서 미·중이라는 거대한 패권의 틈바구니에서, 그리고 그 누구도 가기 힘든 차가운 북극의 수로로 나아가는 일은 위험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기존의 수에즈 운하라는 안락하고 친숙한 길을 벗어나 북극의 암흑과 유빙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자유를 갈망하는 주체만이 감당할 수 있는 현기증이다.

부산이라는 도시의 시선을 빌려 내 삶을 되돌아본다. 나 역시 타인이 그어놓은 안전한 트랙 위에서, 강대국과 대도시가 다듬어놓은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로 살아가는 것에 안주하고 있지 않았던가?

북극항로를 바라는 실존적 사유는 나에게 거친 질문을 던진다. 안전하지만 타자화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불안하지만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하는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인가. 북극해의 고요한 얼음판을 깨뜨리는 소리는, 내 안의 안일함을 깨뜨리는 실존적 자각의 파쇄음이다.


결론: 내 안의 북극해를 가르는 나만(only Me)의 항해자

미·중의 AI 패권 전쟁이 거대한 시대의 배경음악처럼 울려 퍼지는 오늘, 나는 부산의 바다에서 거대한 거인의 싸움이 아닌 ‘한 인간의 작고도 위대한 결단’을 본다. 부산이 꿈꾸는 북극항로는 지도 위의 선 하나를 새로 긋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 구조의 소외 속에서도 나만의 길을 찾아 나서는 모든 실존적 인간들의 초상이다. 세상이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으로 나를 규정하고, 강자들의 물리적·디지털 장막이 나를 둘러쌀지라도, 내 안에는 아직 녹지 않은, 그러나 이제 막 해빙을 시작한 ‘나만의 북극해’가 존재한다.

기술의 신들이 가상의 우주를 다투는 동안, 나는 실재하는 이 바다에 서서 나만의 키(Helm)를 잡는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유빙 사이로 난 작은 물길을 바라보며 심연의 심정으로 사유한다.

“세계가 나를 어디에 던져놓았든, 내 삶의 항로는 오직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노를 저어 가는 이 순간에 완성된다.” 얼어붙은 시대를 가르고 나아가는 부산의 항해는, 바로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고자 하는 한 인간의 위대한 실존적 항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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