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의 길목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보낸 使者를 기다리다.
나의 경우 지식은 3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사바세계에서의 생계유지용 지식이다. 대학이나 학교 및 슬롯에서 터득한 지식이다.
2단계는 사후의 한 절차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목의 지식이다. 심연의 요단강을 건너는 하얀 쪽배이다. 바로 그 유명한 푸른 하늘 은하수의 하얀 쪽배 말이다. 나를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둘 이상 있을 수 있다.
3단계는 바로 영원한 적멸의 경지로 죽음 그 자체이다. 유와 무도 있을 수 없는 바로 그 적멸의 세계를 말한다. 나는 이를 공(空, Sunya)의 세계로 보고 있다.
각설하고 2단계를 바로 말해본다. 2단계의 세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설한 분으로는 중세의 독일 신학자 에크하르트를 꼽고 있다. 그분은 신(神, God)을 따르는 성직자로서 공의 세계에는 들어가질 않겠지만 이승과 저승의 관계에 대한 노도돌이나 징검다리로서는 그저 그만이다.
그럼 에크하르트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바라마지 않는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약 1260–1328)의 사상은 중세 가톨릭 신학 안에서 전개되었지만, 단순한 교리 해설을 넘어 “인간의 내면에 있는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만나는가?”라는 문제를 탐구했다는 점에서 매우 독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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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를 단순히 “죽음 이후의 천국을 말한 중세 신비주의자”로 읽기보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인간의 내면에서 이미 경험하게 하는 사상가로 읽으면 그의 사상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특히 죽음을 앞둔 노객(老客)의 자리에서 에크하르트를 바라본다면, 그의 핵심어인 초탈(Abgeschiedenheit)과 놓아버림(Gelassenheit)은 단순한 수도자의 수행법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는 정신의 마지막 공부가 됩니다.
1. 에크하르트에게 죽음은 ‘끝’만이 아니다
에크하르트의 사상을 죽음의 관점에서 관조하면 먼저 이런 질문에 닿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잃는 것인가?”
몸을 잃는다.
재산을 잃는다.
지위를 잃는다.
슬롯적 이름을 잃는다.
그리고 결국에는 ‘나’라고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데 에크하르트는 인간이 죽음의 순간에 강제로 내려놓게 될 것을 살아 있을 때부터 자발적으로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의 초탈은 죽음을 준비하는 정신의 훈련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강제로 요구하는 ‘놓음’을 삶 속에서 먼저 연습하는 것.
2.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문’이 아니라 ‘내면’이 있다
전통적인 종교에서는 이승과 저승을 공간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승은 여기이고,
저승은 죽음 이후의 저편입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사상에서는 조금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승과 저승의 거리는 공간의 거리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거리라는 것입니다.
욕망과 집착에 붙들려 있는 인간은 살아 있어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 들어간 인간은 아직 이승에 있으면서도 이미 초월의 문턱에 서게 됩니다.
따라서 에크하르트를 죽음의 철학자로 읽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저승은 죽어서 처음 가는 곳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마음이 준비하는 곳이다.”
물론 이것은 에크하르트의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을 죽음의 관점에서 해석한 표현입니다.
3. ‘나를 비운다’는 것은 ‘나를 없앤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에크하르트의 가장 깊은 부분이 등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자아의 비움은 자기 존재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가 평생 ‘나’라고 생각했던 것 가운데 상당 부분은 사실 슬롯가 만들어준 나입니다.
직업의 나,
명예의 나,
재산의 나,
가족 안의 나,
타인의 평가 속의 나,
성공과 실패 속의 나.
죽음은 이것들을 하나씩 벗겨냅니다.
그렇다면 죽음 앞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무엇인가?
에크하르트라면 바로 그 질문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져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서 인간은 자신이 평생 붙들었던 ‘외적인 나’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의 차원을 발견합니다.
4. 그래서 에크하르트의 ‘초탈’은 죽음의 연습이다
일흔을 넘긴 노객의 눈으로 보면 젊은 날의 삶은 대체로 얻는 과정이었습니다.
더 배우고,
더 가지고,
더 인정받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고,
더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서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무엇을 더 얻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이제 내려놓을 것인가?”
에크하르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 노년의 철학자가 됩니다.
젊음의 철학이 획득이라면, 노년의 철학은 초탈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철학은 결국 놓아버림의 철학입니다.
5. 저승에 가기 전에 이승에서 먼저 자유로워져야 한다.
여기서 에크하르트의 사상은 인류의 오랜 관심인 ‘자유정신’과도 일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보통 자유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적 관점에서는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내가 지배당하지 않는 것.”
돈이 나를 지배하지 않고,
명예가 나를 지배하지 않고,
분노가 나를 지배하지 않고,
사람에 대한 집착이 나를 지배하지 않고,
과거의 상처가 나를 지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또 하나의 정신적 자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에 가장 잘 준비된 사람은 죽음을 많이 생각한 사람이 아니라, 삶에서 집착을 조금씩 내려놓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6. 에크하르트와 죽음 앞의 노객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결국 혼자입니다.
가족도 끝까지 함께 갈 수 없고,
친구도 대신 갈 수 없으며,
돈도 따라오지 않고,
직함도 따라오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때 에크하르트가 조용히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대가 평생 움켜쥐었던 것을 놓아라.”
그러면 죽음은 단순한 상실이 아닙니다.
죽음은 마지막 해방이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에크하르트 사상을 죽음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나타나는 놀라운 역설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는 사건이지만, 동시에 모든 집착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7. 그러나 이것은 죽음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에크하르트의 사상을 가지고 죽음을 낭만화하거나 현실의 삶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말하는 초탈은 “살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알기 때문에 삶을 더 깊게 살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말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정성껏 하고,
미워했던 사람을 마음에서 조금씩 놓아주고,
이미 지나간 일을 붙잡지 않고,
남은 시간 동안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것.
이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8. 결국 이승과 저승은 ‘놓음’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를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사상가로 해석한다면, 그 연결점은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보다 초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에서는 소유하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연습을 하고,
죽음에서는 마지막 소유마저 놓으며,
저 너머에서는 존재의 근원과 하나 되는 것.
기독교 신비주의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깊은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고, 철학적 언어로 말하면 경험적 자아를 넘어 존재의 근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9. 노객이 에크하르트에게 묻는다면
일흔의 노객이 에크하르트 앞에 앉아 이렇게 묻는다고 생각해 봅니다.
“나는 이제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에크하르트는 아마 재산 목록도, 명예 목록도, 업적 목록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는 듯합니다.
“무엇을 아직 놓지 못하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노객은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놓지 못한 사람,
놓지 못한 기억,
놓지 못한 명예,
놓지 못한 분노,
놓지 못한 욕망,
그리고 끝내 놓지 못한 ‘내가 옳다는 생각’.
그리고 하나씩 내려놓습니다.
그러면 죽음은 조금 달라 보입니다.
죽음은 더 이상 단순히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이 아니라,
“내가 끝내 나를 붙들고 있던 마지막 손을 놓는 날”처럼 보입니다.
그때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거대한 벽이 아니라 아주 가느다란 하나의 길이 놓입니다.
그 길의 이름은 어쩌면 초탈(Abgeschiedenheit)이고,
그 길을 걷는 정신의 이름은 자유이며,
그 끝에서 인간이 만나고자 하는 존재의 이름을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이라 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객은 마지막에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사는 동안 잘 사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고,
잘 놓는 것이 마지막 자유를 준비하는 것이다.”
“나는 저승을 空(Sunya)으로 보긴 보지만,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승에서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는 조금 알 것 같다.”
“아마 그것이 죽음 앞에서 인간이 배울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깊은 철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