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25년째 파라파라나 추고 있다 - 10
어쩌면 ‘유로비트’가 뭔지는 몰라도 ‘이니셜 D 음악’이라고 말하면 바로 알아듣는 사람이 꽤 있지 않을까?
‘이니셜 D’는 자동차 경주를 소재로 한 일본의 만화바카라이며, 애니메이션과 게임으로도 만들어졌다. 이 애니메이션과 게임에 삽입된 유로비트 곡들이 레이싱의 속도감과 잘 어우러지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서양에서는 ‘유로비트’와 ‘이니셜 D 음악’이 완전히 같은 뜻이라고 알고 있거나, 유로비트가 자동차에 대한 음악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 보인다.
그리고 이니셜 D는 또 한 가지 측면에서 전 세계에 유로비트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자동차가 질주하는 영상, 또는 꼭 자동차가 아니더라도 운전이나 속도를 연상시키는 영상에 유로비트를 입힌 밈이 수없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니셜 D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밈보다 그렇지 않은 밈이 훨씬 많지만, 그래도 시작점은 이니셜 D다. 유로비트와 운전이 결합된 밈은 한국에도 꽤 많이 알려졌고 ‘한문철 변호사도 풀악셀 밟게 만드는 곡’ 등의 한국화된 밈도 생겨났다.
유로비트와 이니셜 D가 마치 한 몸 같은 존재가 된 배경에는 일본 최대의 음반사 중 하나인 에이벡스가 있다.
에이벡스가 설립 초기에 주력했던 장르는 유로비트를 비롯한 디스코텍 음악이었다. 이후 에이벡스는 일본에서 유로비트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디스코텍 음악뿐만이 아니라 일본 음악계 전반에서 점점 큰 성공을 거둔다.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자라난 에이벡스는 1998년 애니메이션 분야에 진입한다. 이때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이 바로 이니셜 D다. 에이벡스는 이니셜 D의 모든 레이싱 장면에 각각 잘 어울리는 유로비트 곡을 아낌없이 사용했고, 이것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이니셜 D 하면 유로비트, 유로비트 하면 이니셜 D를 연상하게 됐다. 유로비트 곡으로만 이루어진 이니셜 D의 사운드트랙은 2000년 일본 골드디스크에서 올해의 애니메이션 앨범상을 탔다.
세가에서 2002년부터 발매하기 시작한 이니셜 D 게임도 마찬가지로 에이벡스와 연계해서 유로비트를 삽입했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오락실용과 가정용이 있는데 오락실용 시리즈가 특히 장수했다.
이니셜 D의 배경음악으로 유로비트를 사용한다는 발상은 아주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니셜 D 이전에는 유로비트와 레이싱이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었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일본의 유로비트 유행은 1980년대에 디스코텍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다시 말해 유로비트는 춤을 위해 존재하는 음악이었다. 그런데 디스코텍이 아닌 곳에서 유로비트를 듣기가 쉽지 않았던 초창기부터, 디스코텍이나 춤에 전혀 관심이 없는 유로비트 팬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팬들은 드라이브를 즐기는 사람들이었고, 차에서 듣기 위해 유로비트 음반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유로비트는 원래부터 운전과 인연이 있는 장르였던 것이다. (심지어 에이벡스의 설립자 마츠우라 마사토도 한때 자동차 폭주족이었다는 이야기를, 관계자들이 유튜브 방송에서 슬쩍 흘린 적이 있다)
다만 이니셜 D 이전에는 드라이브를 즐기는 사람들과 유로비트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 통로가 없었다. 이니셜 D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서 유로비트를 삽입한다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것도 에이벡스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후지TV에서 이니셜 D를 애니메이션으로 방영하기로 결정했고, 에이벡스에 합작을 제안했다고 한다.
에이벡스에서 이니셜 D 초기 시즌들의 유로비트 선곡을 담당했던 쿠니토 케이이치로는 훗날 이 제안을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마침 90년대 말 당시는 유로비트에 위기가 찾아온 시기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기존의 디스코텍이 쇠락하고 클럽이 등장했는데, 유로비트는 클럽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어울리는 장르는 아니었다. 에이벡스는 디스코텍에서 유로비트를 트는 것 외에는 유로비트를 홍보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새로운 활로가 필요했다. 그때 마침 이니셜 D가 나타난 것이다.
이니셜 D 애니메이션의 1화가 완성된 후, 관계자들은 에이벡스의 직영 디스코텍이었던 ‘벨파레’에 모여서 시슬롯를 열었다. 첫 운전 장면과 함께 유로비트 곡인 Space Boy가 나온 순간 다들 ‘새로운 시대의 막이 열렸다’라며 감동했다고 한다. 나도 Space Boy를 처음 들은 순간의 감동을 아직까지 어렴풋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그 시슬롯를 상상해 보게 된다.